〈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목소리만 들어도 미성년임을 알 수 있다. 성년을 향해 가는 관문 앞에 이제 막 선 소년이 들린다. 그 소년, 얼마나 해사하게 컸는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랑받으며 자랐구나, 아더. 웃어주는 아버지와 스스럼없이 장난을 걸어오는 형, 여러 명의 친구에게 시끌벅적 둘러싸여 사랑 가득 받으며 자랐구나.

이런 캐릭터가 여태껏 없었다.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여 주는 친구들을 지척에 두고 마음껏 누리는 그를 본 적이 없다. 투박하지만 애정 깃든 팡팡 세례, 기습뽀뽀에 꿈꾸듯 황홀해지는 얼굴, 주저 없이 영원을 맹세할 수 있을 결속감의 연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편’을 티 하나 없이 웃는 얼굴로 노래할 수 있는 그라니.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극 중의 그가 이렇게 사랑받는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겠나. 웃고, 또 웃는 맑은 얼굴이 너무나도 애틋했다.

 

 

그런데 누가 18세를 성인이라 하였을까. 

“제가 케이한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입술이 한껏 나온 얼굴로 눈썹은 잔뜩 내려 퉁퉁대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아버지 엑터 앞에서 무장해제된 것처럼 투정 부리는 듯한 음성에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도 잠시,

“원하는 게 뭐야.”

낯선 이의 등장에 경계하는 음성이 알려주었다. 왕의 혈통과 엑터의 품격이라 하였지. 18살이라면 아이도 어른도 둘 다라는 엑터의 말이 맞다.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지?”

엑터를 대할 때와는 판이한 톤이었다. 낮고 강하며 의지를 품은 음성에서 느껴졌다. 그의 피에 흐르는 기사의 자질이.

타고난 기품은 기도할 때도 어김없이 발현된다.

“주님, 제가 당신 앞에 여러 번 왔었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좌절해서요, 또 화가 나서요!”

무릎꿇고 손을 모은 모습은 길을 구하고 있음에도 고결해보였다.

 

이쯤에서 꼭 말해야 하는 건 리허설 때는 일부는 백작님, 또 다른 일부는 모차르트, 어딘가는 지욱이다 싶었던 부분들이 프리뷰를 거쳐 첫공이 되어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아더만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연상되지 않는 아더 본인이었다. 그의 안에서 살아서 숨을 쉬는 여러 캐릭터들의 아더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첫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첫공의 D에서 비로소 보았다. 멀린의 손길을 따라 용의 불길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하자 입가에 아주 살짝 떠오른 미소를. “도대체 이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라며 엑터 앞에서 한숨 쉬며 낙심했던 난제, 그 해답에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은 찰나의 입꼬리를. 어쩌면 앞으로는 불길을 조금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어린 순수한 기쁨을.

 

 

〈검이 한 사람을〉. 랜슬럿 너머에 엑스칼리버를 든 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아더가 있다. 엑스칼리버에서 도무지 시선을 뗄 줄 모른다. 이리저리 자꾸만 들여다보며 감탄한다. 검에게, 자신에게. 이게 정말 내 검이라니, 내지는 내가 정말 이 검을 뽑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도로록 도로록 굴러가는 눈동자,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너무너무 귀엽다. 영락없는 소년이야.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답게 아더는 자신의 감정을 참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하는데, 그런 점에서 검을 뽑은 후부터 멀린을 대하는 톤이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도 너무나 귀엽다. 낮고 날카로웠던 “원하는 게 뭐야”는 이제 없다. 아버지 엑터를 대하듯, 랜슬럿을 대하듯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묻는다.

“멀린, 이제 뭘 하면 되죠?”

신뢰 퐁퐁 피어나는 얼굴이 입술을 깨물어 물며 멀린을 응시하는데, 내가 멀린이라도 아들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틀림없다. 의심의 여지없는 이 구역의 다돌그다. 카멜롯 버전의 다돌그다. 사랑스러우며 애틋하고 보는 마음이 흐뭇해지니까, 그래서 울컥하고 마니까.

기네비어를 향하여 웃는 표정 하나, 동작 하나가 어찌나 전부 사랑스러운지. 짐짓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해보일 때는 숨을 참게 될 정도로 예쁘게 반짝반짝. 타이밍 좋게 등장한 엑터에게서 엑스칼리버를 받아들며 우쭐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엑터의 등장에 살짝 놀랐다가도 ‘아버지, 나이스 타이밍!’ 하는 것 같던 얼굴 잊지 못해.

가장 심장 아프게 좋은 부분은 “평범한 사람도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요?” 하고 건넨 질문에서 서서히 듀엣이 되어가는 장면. 아직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평범한 소년이 길을 찾고 방향을 찾아가며, 나침반이 되어준 이를 향한 신뢰와 사랑의 눈빛을 키워가는 대목. 장면이 통째로 반짝반짝.

 

 

〈이렇게 우리 만난 건〉. 손사래만 쳤던 프리뷰와는 달리 무례를 갱신하는 랜슬럿에게 양 검지를 와이퍼처럼 필사적으로 까딱여 보이며 ‘하지 마, 하지 마’ 말리는 얼굴이 귀여웠다. 말려도 듣지 않는 랜슬럿이 된통 당하자 연신 손뼉 치며 좋아했다. 박수 소리조차도 경쾌했다. 실력으로 랜슬럿을 응징하는 기네비어를 바라볼 때마다 사랑이 퐁퐁 피어나는 얼굴은 역시나 너무도 예뻤고.

이 대목의 심쿵은 랜슬럿이 몰고 온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기네비어와 둘만 남았을 때, 얼굴을 빼꼼히 그녀에게 내밀며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는 장면. ‘기네비어’의 달콤한 음성.

 

 

〈왜 여깄어?〉. 나의 원픽 삼중창. 들을 때마다 눈물 나는 가사를 어쩌면 좋겠나. 가장 평범한 동시에 가장 영웅적인 순간의 아더가 감동적일 정도다. 동시에 너무나도 시아준수인 점 역시.

 

 

결혼식. 2막의 그를 보자마자 마음으로 환호했다. 백의천사 만세, 하얀옷에 금박 만만세.

하지만 믿겨지나. 착장은 예고에 불과했다. 예식이 이렇게 성스러울 수가. 검에 닿는 콧등 키스, 살포시 무릎 꿇은 채 사랑 넘치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끼워주는 사랑의 반지,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마저도 성스럽다.

절정은 화음. 〈오래전 먼 곳에서〉의 아름다운 면사포 같은 화음. 어떤 분노에도 상처 입지 않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소리.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에 아더는 자기 자신을 마음껏 무장해제한다. 친구들을 스스럼없이 끌어안고, 짐짓 채신을 지키는 누이에게도 한달음에 달려가 손을 꼭 붙잡고 말한다.

“우리 여기 카멜롯에서 함께 살자.”

가족이니까.

“누나를 찾은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야.”

아더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들 앞에 설 때면 나오는 소년의 목소리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티 없는 음성에서 사랑받으며 자라왔음이 역력히 보이므로. 불길을 다스려주는 아버지 곁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으므로.

 

그런데 결혼식 피로연의 꽁냥꽁냥은 매일 달라지려나 보다. 프리뷰에서는 건배를 짠하며 속삭였는데, 오늘은 건배한 후 검지를 펴 보이며 한잔 더 할까? 물으며 눈썹을 까딱까딱. 사랑스러워 기절해.

 

마침내 춤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 아더는 총 세 번의 춤을 추는데 한번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기네비어와 살랑살랑 가볍게, 둘은 모르가나와, 셋은 아내와 정식으로. 세 번 모두 달라서 너무나 좋은 것이다.

누이와는 춤을 청하는 멘트부터 심장에 콕 박혔다.

“그 함께할 미래에 동생과의 춤이 있지?”

그렇게 말하고는 누이의 손을 잡고 중앙으로 이끄는데, 나라면 그 순간 용의 불길은 보내주고 천사의 숨결을 얻었을 것이다.

기네비어와는 춤의 맵시도 맵시지만 얼굴을 꼭 봐야 한다. 시아준수는 얼굴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더도 얼굴이다. 아름다움을 일일이 그려 넣는 것처럼 사랑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따뜻하다가도 매혹적이고, 사랑스럽다가도 한없이 애틋해진다.

 

 

〈심장의 침묵〉과 〈왕이 된다는 것〉에는 공통되는 점이 있다. 무대에 오직 아더뿐이라는 것. 대극장을 꽉 채운 무대들로 구성된 이 극에서 드물게 배우만이 존재하는 장면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혼자서 그 안을 채워낸다. 여타 장치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심장의 침묵에서 꺼내어 펼쳐보이는 좌절이 그의 안에 전부 있으며, 왕이 된다는 것에서 일어서는 내면이 그의 노래 속에 고스란히 있다.

 

〈세상의 끝 리프라이즈〉. 프리뷰보다 ‘모르-가나’의 톤이 훨씬 더 분명해졌다. 아더 본인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게끔 치명적이며, 거만하고, 음험하게. 모르가나를 향하여 돌아서는 맵시도 아더를 벗었다. 속여야 하는 모르가나조차도 흠칫하며 갸웃할 만큼이나 분명하게 달라졌다.

 

〈전쟁터〉. 슬로우 액션의 조명이 다소 바뀌었다. 원래는 잿빛 하얀색의 일정한 톤이었는데 오늘은 깜빡이며 명멸하는 그림자가 전장에 드리워져 있었다. 전자는 성스러움을, 후자는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강조하는 장치가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둘 다 좋아서 하루씩 번갈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비밀.

 

이하는 따로

눈에는 눈 leaplis.com/577329

이게 바로 끝 leaplis.com/577469

엔딩 leaplis.com/577226

 

마무리는.. 샤아더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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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6.28

공연적으로 대단히 좋았으며 완성형이었던 공연,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