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동자에 고였다가 랜슬럿의 얼굴로 곧장 낙하하던 눈물방울을 잊을 수 없다. 끝을 모르고 후두둑 떨어지던 눈물. 울지 말라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고 슬픔을 지워줄 수도 없어, 끊어져 가는 랜슬럿의 숨을 부여잡고 우는 얼굴이 끝을 모르고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한참을 울다 퍼뜩 정신이 든듯한 그가 허겁지겁 칼을 찾아 랜슬럿의 가슴 위에 포개어주었을 때는 그의 눈물이 나의 것이 되었다. 온기를 잃어가는 손을 검 위에 얹고 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애틋한 손길에 마음이 시렸다.

 

결국은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울음에 버거워 연신 숨을 몰아쉬면서 그가 랜슬럿의 뒤를 따랐다. 가누지 못해 추켜올린 턱으로 터덜터덜 망자의 행렬을 따라 걷는데, 그의 등 뒤로 나타나는 기네비어가 보였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잔인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 두 넘버가 교차할 수 있나. 보내는 사람 뒤로 또 떠나보내야 할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는 구도는 너무하지 않나. 이긴 전투 아닌가. 승리한 전쟁이지 않나. 그런데 눈물바다였다. 온통 상실이었다.

 

끝내는 속눈썹에까지 맺힌 눈물을 보았다. 길게 늘어진 눈썹 가닥마다 고인 눈물방울에 사고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철철 우는 그 얼굴로 ‘눈물로 상처를 지울 수 있을까’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저만치 내던져진 것 같았다. 카멜롯으로 돌아와 달라며 기네비어의 손을 부여잡은 얼굴은 또 어찌나 필사적인지. 오래전, 결혼식에서 반지를 끼워주고 소중히 그러쥐었던 손을 이제는 생명줄처럼 부둥켜 잡고 있었다. 이미 용서했다며, 제발 돌아와달라며, 혼자 되기 직전의 그가 애원했다.

 

운명의 수순을 따라 검과 단둘이 남아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감내하는 침묵의 얼굴이 다 말해주었다. 

바위의 검을 뽑아 왕이 되었지. 

그때는 운명이 선택한 왕이었다. 

하지만..

검을 들어올린 눈동자가 천천히 눈물을 삼켰다. 점점 굳건한 의지를 입어가는 두 눈이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가 선택한 왕의 길인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의 그가 들어 올린 것이 그저 검 하나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대변되는 세상 모든 극복의 서사였다.

 

*

 

음향의 상당한 발전. 가사가 무척이나 깨끗하게 들렸다. 불타는 이 세상이 갑자기 또렷하게 들리기에 놀랐어. 들리지 않던 부분의 귀가 뜨이는 짜릿함은 역시 초연만의 묘미이지 않을까. 여러모로 재미있다. 즐거워. 초연 참 좋다. 초연 참 좋아.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어른이 되는 날의 아더. 18세 생일을 맞아 친구들 전부 불러 일일이 모두와 건배하는 콧등에 찡긋찡긋 스미는 웃음이 얼마나 예쁜지. 너무 신이 나서였을까. 발끝 콩콩콩을 나란히 맞추어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차, 뒤늦게 시작한 콩콩콩은 신바람에 평소보다 빠르고 오래 갔다. 친구와의 박자는 하나도 맞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흥이 난 뒷모습이 귀여웠다. 

아, 팡팡 세례는 상반신으로 집중되었다. 첫공보다도 더. 아무래도 이렇게 갈 모양인 듯하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제가 케이한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말투가 대단히 순해졌다. 특히 저 말미의 두 음절이 대단히 소년의 것이었다. 두고두고 잘라서 듣고 싶을 만큼. 더불어 조금 더 신중해졌다고 해야 할까. 낯선 마법사의 등장에 대뜸 날을 세우며 경계하던 문장ㅡ‘원하는 게 뭐야’는 오늘은 존대가 되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보다 어른스러운 대처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의 B에서는 출생의 진실을 알아차린 그가 정면이었다. 그래서 또렷하게 보았다. B 앞에서 떨구던 고개, 짙은 충격의 얼굴을. 아버지라 믿고 신뢰한 사람이 사실 아버지가 아니었고, 친부는 전혀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며, 자신은 욕망의 결과일 뿐이라는 낯선 진실이 혼란스러운 그를. 당장에 소화하기 버거운 게 당연하다. 이 상황에서 무턱대고 왕이 될 운명을 받아들이라 한다면 누군들 반발하지 않겠나.

 

〈난 나의 것〉으로의 전개는 지극히 타당하다. 그가 선택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여기, 엑터와 친구들의 곁에 있는 것이다. 낯선 마법사에게 그에 대한 무슨 권리가 있으며 도대체 어떤 확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미래는 또 무슨 상관인가. 그의 삶은 온전히 그의 것일 뿐. 

스타카토로 강하게 끊어 부르는 노래는 분노와 의지로 범벅되어 있다.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거대한 동선에서도 느닷없이 들이닥친 침입자를 향한 일렁이는 분노가 느껴진다. 넓은 무대와 숨 가쁜 동선, 높낮이를 마구잡이로 오가는 음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난 나의 것임을 연신 강조하는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는 그의 것일 뿐이다. 그래야만 하고.

 

 

〈검이 한 사람을〉. 아더의 표정이 이처럼 변화무쌍한 넘버가 또 있을까. 자신이 검을 뽑아 든 사실이 감격스러워 몇번이고 두 눈을 깜빡이는 것에서부터, 검을 뽑고도 내가 과연 왕이 될 만한 사람인가 갸웃하는 얼굴. 확신을 갖지 못해 주저하고 망설이는데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엑스칼리버가 선택한 왕이라면 끝까지 지키겠다’며 굳센 충성을 맹세하자 감격하는 표정까지. 

백미는 랜슬럿을 돌아보는 얼굴이다. 랜슬럿도 나를 인정해줄까? 기대와 망설임이 한데 섞인 얼굴을 한 아더의 앞으로 랜슬럿이 무릎을 꿇자 그의 만면을 환하게 물들여가던 감정들ㅡ벅참, 기쁨, 신뢰. 벅찬 마음에 웃으며 계속 보고만 있으니 어서 기사로 서임해달라며 랜슬럿이 자신의 어깨를 툭툭이고 나서야 아차, 그런 거구나. 머쓱 웃는 낯으로 조심조심 신중하게 랜슬럿의 어깨에 날을 두드리던 것까지. 아더의 얼굴을 따라가기 바빠서 너무나 즐거운 순간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B의 각도에서는 한쪽 눈만 보일 정도로 바위에 폭 파묻혀 있었는데, 말그대로 눈 하나만 빼꼼 내민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딱 이런 각도였지. 나였더라면 그 얼굴이 귀여워서라도 모른 척해주었을 텐데.

그만 발각되어 랜슬럿에게 이끌려 나갈 때는 필사적으로 ‘어떡해, 어떡해’ 하는 입 모양을 보았다. 랜슬럿의 무례에는 화들짝 놀라며 두 팔을 교차하여 커다란 X자를 만들어 보였고, 그럼에도 말릴 수 없었던 두 사람의 대련에 시무룩하다가 기네비어의 의외의 실력에 놀람 가득 머금는 눈동자도 보았지. 오늘은 유독 목검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에 맞추어 동그래진 눈동자가 도록도록 이리로 저리로 굴러가는데, 귀여워서 원.

미끄러졌다는 랜슬럿에게 건네는 장난스러운 타박ㅡ뭐 하는 거야는 오늘은 ‘어떻게 된 거야~’가 되었다.

기억의 착오: 리허설을 제외하면 프리뷰부터 계속하여 어떻게 된 거야 였다.

 

그리고 얼굴을 말해야 한다. 너무 예쁘다고 말해야 해. 웃음 번진 채 그녀와 그녀가 펼쳐주는 길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반짝이는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노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만큼이나 어여쁘다. 특히 B의 각도에서는 두 사람이 바위산에 나란히 오르기 직전의 소절에서 진짜 천사를 만날 수 있다. 오늘의 각도 영원히 잊지 않을 것..

 

또 오늘의 아버지, 조원희 엑터. 처음 만나는 아버지가 아더와 대단한 쿵짝을 보여주셨다. 엑스칼리버의 검집을 완성하여 아더에게 건네주는 대목이었다. 아니 글쎄, 엑스칼리버를 먼저 기네비어의 눈앞으로 보란 듯이 휘익 내밀었다가 슬쩍 빼서 아더에게 주는데, 너무 아들 마음 아는 아버지가 아닐 수 없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기네비어와, 아버지 그래요 그거죠! 하는 듯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아더의 액션까지 모조리 유쾌했다. 저런 아버지 밑에서 얼마나 사랑 받으며 자라왔을지 보지 않고도 다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보고 싶은 장면이었어.

 

 

〈이렇게 우리 만난 건〉. 새삼 가을가을한 분위기마저도 이 노래에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첫 만남 이후 불타듯 여물어 깊어진 사랑과 ‘우린 다르지 않아 아니 완벽히 같아’에서 합일을 이루는 마음을 들려주기에 꼭 알맞다고.

 

기습을 만나 기네비어를 서둘러 보내는 대사ㅡ어서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요ㅡ는 “어서 가서 사람들을 대피시켜요.” 로 바뀌었다. 이 편이 더 좋은 게 확실하다. 위기의 순간에서 반짝반짝 왕의 자질이 숨김없이 드러나니까.

짧지만 격렬하였던 전투 끝, 색슨족에게 검을 겨누면서는 부상에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전쟁에 미친.. 전쟁에 미친 너의 이교도 군주에게 전하라.”

중간에 끊어진 문장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완벽하게 살려주었다. 그만 이 자를 보내라며 홱 눈짓하는 동작은 너무나 멋있었고.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리프라이즈〉. ‘나도 사랑해요.’의 진전. 오늘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리허설 때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바로 일어나는 느낌이라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몸을 비척이며 스르륵 천천히 일어나서일까. 물 흐르듯 미끄러웠어.

그런데 두 사람 암전 속에서도 끝까지 포옹하고 연기하는 모습, D에서도 그러더니 B에서도 역시 퇴장할 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리허설 때 보고 너무 놀란 디테일이라 보고 싶었는데 오늘도 보지 못해 슬펐다.

 

 

〈왜 여깄어?〉. ‘누나’의 존재에 놀람 번지던 얼굴. 곧이어 그녀가 들려주는 처참한 진실에 고통으로 얼룩지던 얼굴을 보았다. 출생의 비밀을 처음 들었을 때와 엇비슷한 충격을 머금고 있었다.

멀린은 낯선 마법사라며 그렇게 경계하고 외면했는데, 모르가나와 그녀의 고통에는 한달음에 달려가 두 손을 덥석 잡으며 그 운명을 함께 하겠다며, 위로를 받아달라 하니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다. 그 영웅적인 상냥함에 함락당하지 않을 수가 없어.

 

 

〈오래전 먼 곳에서〉. 아, 여기 걸어 나오는 모습 꼭 엽서로 내주기 바라. 시아준수가 작정하고 잘생김 입은 순간이니까 꼭 남겨주기를 바라. 세상에. 말끔하게 단장한 얼굴에 그윽한 눈동자, 단정하고 기품있게 다문 입술, 시아준수의 아더가 ‘나 지금 잘생겼다’고 선언하는 순간이라고요..ㅠ

 

오늘의 성스러움은 무릎 꿇고 반지 끼워준 손을 소중하게 부여잡는 모습에서 보았다. 한참을 꼬옥 쥐고 올려다보며 사랑을 맹세하는데, 아, B에서의 뒷얼굴로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랑 가득 담은 눈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아니 반지를 집어 드는 손가락조차도 너무나 우아하니 말 다 했지.

 

귀여웠던 건 누나에게 춤을 이케이케 손뼉 치며 하면 된다고 가르쳐주는 얼굴과,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기네비어와 엑터를 흘긋 보고는 또 저런다 하듯이 웃으며 절레절레하는 얼굴. 이어서의 ‘두 분, 이제 그만 좀 하시구요.’ 너스레가 느껴지던 음성.

 

 

〈더 깊은 침묵〉. 오늘의 B, 춤추는 두 사람과 모르가나가 대각선으로 한 시야에 들어오는 각도였기에 보았다. 모르가나가 처음부터 두 사람 너머의 랜슬럿을 눈여겨보고 있었음을. 랜슬럿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음을. 아니 그런데 사랑의 춤을 추는 두 사람 너머로 모르가나가 함께 보이니까 너무 오싹한 것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금 당장의 행복은 너무나도 짧으며, 곧이어 닥칠 불행의 형상을 눈으로 먼저 확인하는 기분이라..

 

 

〈눈에는 눈〉. 도입의 나직하였던 음성이 분노를 덧칠해가며 크레셴도를 보여주는 희열이란. 새하얀 옷을 입고 새하얀 조명을 받은 그가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쥐고, 정면을 향하여 두 눈을 번득이는 모습을 마주하는 짜릿함이란. 특히 리프라이즈에서 여기에서나 그의 음성이 합창을 뚫고 귀에 꽂히는 카타르시스는 아무리 말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서 가〉. 오늘 유독 심정적으로 울컥했던 가사는 랜슬럿이 아더를 광대라 칭한 대목. 이것이 기사가 자신이 맹세를 한 왕에게 할 소리인가. 광대라니, 아무것도 아니라니. 

 

〈세상의 끝〉. 아더가 멀린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건 너무 이해되는 일이다. 혈연이다. 멀린이 모르가나를 위협하는 모습에 아더의 눈이 뒤집히는 건 당연하다. 엑터를 향한 아더의 애착을 생각하면 놀랄 것도 없다. 

참 등장 시. 휘장을 헤치며 나올 때, 나의 각도에서는 그가 잠시 휘청하는 것만 보였는데 실은 그때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며 중심을 거의 잃었던 것을 바로 휘청하는 연기로 덧칠한 것이었다 한다. 세상에.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

“랜슬럿은 우리와 함께해줄 겁니다.”

프리뷰에서는 앞서 그렇게나 싸웠으면서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1막, 특히 〈검이 한 사람을〉을 떠올리며 이해했다. 아더를 향한 조건 없는 충성을 먼저 맹세한 건 친구들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검을 뽑았다는 사실만으로 왕으로 인정해주었던 친구들이다. 그런 그들이니 아더가 왕으로서 내린 결단을 지지해주지 않을 리 없으리란 신뢰였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랜슬럿, 랜슬럿을 찾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의심의 빛도 없었어서.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모르-가나는 치명미를 더해가고 있다. 매섭게 올라간 눈썹과 고혹적일 정도로 짙은 눈빛. 프리뷰부터 꾸준히 멀린의 느낌을 첨가하고 있는데, 완성형이 되면 도대체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돼.

 

 

〈왕이 된다는 것〉. 전주도 전에 그의 실루엣을 보고 울컥했는데 빛을 받아 드러난 그의 얼굴이 나의 것과 똑 닮아 있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하필 오늘따라 어찌나 처연하고 가여운지. 혼자된 상실과 검의 무게, 왕이라는 자리의 고독함을 짊어진 그가 작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였다. 두 팔을 넓게 벌리며 그의 목소리가 도약하기 시작했다. 음을 쌓고 의지를 넣어 왕으로서의 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왕이 되리라’는 마무리에 마음이 높낮이를 모르고 요동치는데 쐐기가 있었다.

전장으로 나가기에 앞서 울음 묻은 얼굴을 가다듬고, 손등으로 코를 훔치는데 세상에 비장하기까지 한 그 동작이 슬로우모션으로 두 눈에 박혔다. 배우로서는 천재적인 연기였고, 아더로서는 아름답게 비장했다. 가능하면 또 보고 싶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