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향 기네비어와의 이별은 항상 처절하다. 부둥켜 잡은 두 손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한 몸처럼 떨었다. 마지막을 앞두고 헤어지려는 와중에 이렇게나 애틋해도 된단 말인가. 서로를 생명줄마냥 움켜잡은 모습을 보노라니 지난 상처는 아무래도 좋으니 사랑이 아더의 곁에 남아주었으면..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는 이미 용서했어.”

아더도 그런 마음이었겠지. 

하지만 끝은 정해진 비극. 

오래전 언제나 함께를 맹세했던 사랑도 이제는 그가 딛고서야 할 ‘지난 역사’가 되었다.

 

혼자된 그가 방향 없이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바위산을 등 뒤에 둔 채 서 있었다. 운명의 산을 등진 채, 장갑 낀 손이 얼굴의 울음을 훔쳤다. 커다란 장갑에 얼굴이 전부 덮였다. 울음을 훔친 손이 서서히 얼굴에서 멀어지더니 가만히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다른 한 손은 검을 꼬옥 쥐고 있었다.

울음을 닦아낸 눈동자로 그가 조금씩 웃음을 시도했다. 눈 안에 그렁그렁한 물기마저도 자양분으로 삼아 반짝, 빛을 내며. 우느라 네모꼴로 무너졌던 입술도 지그시 깨물어 닫았다. 울음을 보내고 고요해진 얼굴은 새 땅에 새 각오를 심는 것처럼 새로운 표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위산을 재차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차례의 작은 끄덕임이 운명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운명ㅡ곧 스스로에게 건네는 약속과도 같았다. 젖었으나 단단한 눈을 하고 그가 자기 자신을 도닥였다.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운명은 그를 바위산으로 이끌었다. 다시금 눈앞에 놓인 오르막길의 초입에서 그는 전과 같이 망설이지 않았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묻지 않았다. 참담한 미래를 지레짐작하며 뒷걸음치던 소년은 더 이상 없었다. 지나간 모든 역사를 징검다리 삼아 묵묵히 산길을 오르는 그가 있을 뿐이었다. 오르며 몇 차례나 발을 헛디뎠지만, 그때마다 그는 검을 지지대 삼아 다시 일어났다.

 

마침내 다시 밟은 정상에서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엉겁결에 검을 뽑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들이닥칠 일들까지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소년은, 멀고 먼 길을 돌아와 그 모든 ‘지나간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검을 들어 올리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평범한 한 소년이 빛나는 제왕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

 

오늘의 넘버는 〈왕이 된다는 것〉. 가, 탄식하듯 뱉어진 음절과 함께 검지를 펼쳐 운명을 콕 찍어버리는 순간에 알았다. 오늘이 바로 이 넘버를 새로 쓰는 날이라는 것을.

그리고 기쁜 일 하나. 연이틀 음향이 나란히 좋은 공연을 만나고 있다. 무척 기쁜 일이야.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박자가 또. 시작부터 엉망진창으로 내달리는 오케스트라를 허들 넘듯 뛰어넘는 배우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다 발라당 드러눕기까지 하는 아더에게는 사랑과 신뢰의 포옹을.

 

〈난 나의 것〉에서는 변주가 있었다. ‘난 나↗︎의 것↗︎, 난 나의 것’의 마무리에서. 반음 정도 계단을 타고 오른 음이 나는 나의 것이라며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솟은 음정을 따라서 격해진 감정을 싣고.

이러한 변주에는 아마 손준호 멀린과 맞추는 합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묵묵한 편인 김준현 멀린과는 달리 손준호 멀린은 거침없이 아더를 몰아세운다. 아더가 벽을 치고, 멀린이 몰아세우고, 다시 아더가 벽을 치는 일련의 과정 동안 노래는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아더의 분노와 함께, 마치 짙어지는 그라데이션처럼.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멀린의 지도 하에 용의 불길을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다스려보는 순간의 아더. 오랜만에 망원경으로 얼굴을 가까이 보았고 입가에 사르르 피어나는 미소를 보았다. 일전에 목격했을 때보다 훨씬 분명하게ㅡ이제는 아예 완연한 미소가 되어있었다. 멀린과 눈을 마주하며 신기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린 고개가 이어서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안의 불길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가볍게 손가락을 팔랑이면서.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초반부의 일등 공신. 무척이나 산만하였던 내 ‘주위’의 공기마저도 사로잡아버린 오늘의 넘버. 

바위산을 오르는 동작들이 새삼 갖추어진 안무처럼 아름다웠다. 성큼 한 발로 한 칸을 올라섬과 함께 정상을 향하여 곧게 뻗은 팔은 꼭 커튼콜에서의 손인사처럼 우아했다. ‘넌 달랐어 아더, 특별했지.’ 멀린의 확신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산을 오르는 자태부터가 이미 선택받은 이의 것이었다.

정상에 올라서는 엑스칼리버를 앞에 두고 헤매다가, 멀린과 시선을 교환하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침착해진 어깨가 신중하게 검을 감싸 쥐고, 용의 숨결을 불러오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하는 미간이 살그머니 눈을 감는가 싶더니 또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용의 불길도 숨결도 모두 그 웃음 안에 있다는 것처럼.

 

오늘의 새로운 디테일 하나. 엑스칼리버를 뽑고 마냥 좋아하는 천진한 얼굴이 오늘은 검으로 새로운 포즈를 잡아 보였다. 두 손으로 검을 쥐고는, 가로로 비틀어서 기사처럼 멋지게 자세를 착! 멋있더라, 아더. 더불어 오죽 신이 났을까 싶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선명한 기쁨을 보노라니 실감되었다. 이제 고작 열여덟인 것을.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오늘도 엑터에게서 건네받은 검을 한껏 뽐내느라 다시 귀를 기울이는 동작을 까먹고 말았네. 뽐내기에 심취한 아더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새 검집 입은 검을 벨트 안으로 넣을 때 만난 예상하지 못한 귀여움. 오늘따라 검을 지나치게 수직으로 꽂아버렸지 뭔가. 아무래도 불편했는지, 기네비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 손가락을 꼼질대며 자세를 고쳐갔다. 눈은 기네비어를 따라가느라 바쁜데, 손가락은 검을 고쳐잡느라 바쁜 그가 참 귀여웠어.

 

그리고 역시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카돌그는 좋다.

“혹시 평범한 사람도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요?”

아더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 이 노래로 기네비어는 그에게 멀린과는 다른 의미에서 전환점이 되어준다. 넘어져도 괜찮으니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웃음 묻은 격려를 김소향 기네비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그녀의 노랫말을 따라 용기를 입어가는 그를 보면 끄덕이게 돼. 그가 가야 할 옳은 길을 보여준 소녀, 기네비어가 아더의 심장을 명중하였음을. 사랑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더가 나아가게 되는 운명 앞에 기네비어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다시 오랜만의 D, 고로 나무 뒤로 숨은 아더를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는 시야. 기네비어의 가시범위 안으로 자꾸만 침범하는 랜슬럿을 안쪽으로 숨기기 위한 필사의 손동작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랜슬럿의 팔뚝을 콱 잡고는 자기 뒤로 밀며 들어와, 들어오라구, 들어와, 안간힘을 쓰는데.. 휴우.. 💦💦 

또 D에서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것. ‘기네비어’ 하고 속삭이며 살짝 다가서는 얼굴.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유독 오늘의 화음이 좋았다. 별표.

 

〈왜 여깄어?〉. 어느 때보다도 분명한 “펜드라곤?”의 되물음이었다. 마지막 음절이 항상 애매한 ‘고’로 맺어지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펜드라‘곤’이었다. ‎‪(•̀ᴗ•́)و ̑̑‎‪ 

 

여기서 김소향 기네비어로부터 받은 예기치 못한 타격. 누이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하는 아더를 바라보던 그녀가, 그를 향해 나아가더니 등 뒤에서 상처를 감싸 안으며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염려가 담긴 시선이었다. 사랑이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사랑의 듀엣으로 마련된 넘버 이외에서 아더를 사랑하는 기네비어를 목격하기는 처음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준호 멀린과의 삼중창이 되니 새로웠던 건, 손준호 멀린이 굉장히 필사적이라는 것이었다. 심각한 미간과 다급한 음성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모르가나를 가라앉히려는 멀린의 다급함이. 아더를 모르가나에게서 떼어놓고 자신이 그려둔 운명 위에 붙잡아두기 위한 노력이.

 

〈기억해 이 밤〉. “네, 그러겠습니다.”는 도약을 이어갔다. 특히 두 번째 문장에서.

아니 그런데 너무.. 장면에 맞지 않게 재미있었던 것. 털망토를 입는 시간이 너무나도 지체되었다. 매듭고리를 찾지 못해 한참이나 망토 안에서 방황하던 신부님의 손이 마침내 옷매무새를 완성해주었을 때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여차하면 바로 엑스칼리버를 받아들고 노래에 임하려던 아더를 잡고 신부님이 전에 없던 속도로 성체 성혈 성호를 완성했다. 의식이 마무리되었다고 인지하기도 전에 정면을 향해 돌아선 아더가 재빠르게 검을 건네받고 노래를 시작했다. 따라가기에도 숨 가쁜 장면전환이었다. 혹 박자가 어긋날까 싶어 아찔했지만, 아슬아슬.. 재미있었다.

 

소릿결의 환청과도 같은 감각은 오늘도 이어졌다. 카멜롯 사람의 소리가 전부 다 그의 소릿결 같고, 배음의 한층 같고.. 만인의 합창이 그의 소릿결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것처럼 들리는 감각, 너무나 신기해. 

 

결혼식 피로연. 오늘 두 번째 잔을 마시기 위해 무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직접’ 잔을 가져오는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통은 앉은 채로 배달되어 오는 잔을 받고는 하는데, 오늘 의욕적이었어 아더. 

더 귀여웠던 건 기쁘게 원샷을 하고 보니 눈앞에 아버지가 잔을 내밀며 건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뒤늦게 발견한 아더, 화들짝 놀라며 아버지와 재차 짠. 이때 세모꼴로 벌어지며 놀란 입술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그리고 오늘의 목소리. “세상이 다 내 것만 같아요.” 너무 청아하고 맑았어. 꼭 잘라서 듣도록 하자.

 

〈눈에는 눈〉. 울프스탄의 소절, 겁에 질린 용이 숨을 곳을 찾는다는 말에 그의 눈썹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그럴까, 되묻는 것 같은 얼굴이 사납게 다음 소절을 이어받았다. 살은 썩어 흙이 되리.

멀린의 압박을 버텨내려는 동작은 점점 거세진다. 한 손은 검을 잡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움켜쥔 채 고개를 비튼다. 듣기 싫다는 듯, 떨쳐내려는 듯. 멀린의 언어는 그에게 더 이상 조언이 되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널 막아서라도.”

랜슬럿의 비난을 함께 들으면서, 기네비어는 왜 잠자코 있을까. 아더가 그녀를 해칠 리 없는데, 아더를 막아서야 할 일이 생길 리 없는데 왜 랜슬럿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까.

나를 막는다고? 되물으며 흐느낌에 빠져드는 아더를 보며 궁금해졌다. 기네비어도 랜슬럿에 이미 동조해버린 까닭일까. 그렇다면 아더는 자신을 통제불능의 괴물로 보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고립된 셈이네. 씁쓸했다.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때는,”

쏟아져나오는 분노를 잠시 맺으며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좀 더 조심해야 할텐데.”

어제와 같은 나직한 음성이었다. 어제와는 달리 검지를 펴보이며 경고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 악문 음성부터가 경고였다.

 

엘리자벳 삼연에서 신영숙 엘리자벳의 불패의 넘버로 〈추도곡〉을 꼽곤 했지. 엑스칼리버 초연의 아더에게는 〈심장의 침묵〉이 있다.

가장 먼저 완성형을 이룬 노래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곡. 오케스트라가 내달려도, 음향이 길을 잃어도 절대로 극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6월 27일에 결코 함몰하지 않는 이 노래를 보았고, 29일의 준완성을 만났으며, 7월 4일에 무르익어 만개한 모습을 보았다. 오늘은 이 모든 것의 재확인이었다.

〈왕이 된다는 것〉이 아직 완성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면 심장의 침묵은 오를 수 있는 모든 고지에 다 올라섰다. 이제 이 노래에 남은 건 ‘한결같을 것’ 그 하나뿐이다. 그리고 오늘 그 대답을 들었지. 늘 어제와 오늘이 같을 것이라고 굳세게 대답하는 심장의 소리를.

 

〈세상의 끝〉. “우리 누나한테 무슨 짓이야.” 버럭하는 아더와 절절매는 멀린을 흥미롭게 보다가 새로운 것을 보았다. 신영숙 모르가나.. 대체 무슨 눈빛이었던 거지? 아더에게 어깨를 안긴 채로 퇴장하며 멀린을 노려보는 듯 흘겨보는 듯 새침하게 가늘어진 눈이었다. 방금 전에 멀린에게 ‘욕망’을 깨우쳐주려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간극이 느껴지는..

 

〈이게 바로 끝〉. ‘무너지는 꿈’을 B에서 보았을 때 그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기네비어와 랜슬럿을 목격하고 무척 씁쓸했었지. 오늘의 D에서는 무너지는 그 너머의 모르가나가 함께 보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더가 고개를 떨구며 눈을 질끈 감을 때도, 쓰린 마음에 하늘을 원망스레 올려다볼 때에도. 아더의 등 뒤에서 소리 없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잔인한 시야였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죽여.”

단도를 건네받은 모르가나의 뒷모습을 보는 눈썹이 살짝 미끄러졌다. 제 흥분에 못 이겨 깔깔 웃기 시작하는 모르가나를 차분히 지켜보던 입술이 아주 옅은 곡선을 그렸다. 미묘한 웃음이었다. 찰나의 웃음이었다. 제대로 본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간적인. 또 볼 수 있을까?

 

샤아더 사랑해를 빼먹었었네.

 

*

원하는 게 뭡니까.

난 나↗︎의 것↗︎

저 엑스칼리버 앞에 나 맹세하리

멀린, 궁합도 볼 줄 아는 거예요?

멀린, 여기 있었네.

신은 날 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