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의 일이다. 아더로서는 줄곧 강직한 철심과도 같았던 목소리가 철가루가 되어서 왔다. 쇳소리를 노래에 이용하기는 해도 아예 가루처럼 흩어지는 음성은 처음이기에 놀랐다. 그래서 선뜻 확신하지 못했다. 목소리의 변화가 맞는지, 혹 음향의 문제는 아닐지. 내내 갸웃하며 귀를 기울였다. 대사하는 목소리에서 전자임을 확인하고부터는 마음졸임과 안도, 염려와 경탄의 반복이었다.
긁히는 소리, 갈라지는 소리, 끊어지는 소리, 흩어지는 소리가 모두 나왔고 그는 이를 아낌없이 이용했다.
“너도 나가”의 한순간에 메말라버린 음성은 시작에 불과했다.
〈눈에는 눈〉에서 인생 처음으로 불길을 해방하며 불안정하게 치솟는 내면을 끝 간 데 없이 서걱거리는 철성으로 극대화해냈다. 마치 쇳가루를 펴 바른 듯한 소리가 내내 귀를 자극했다. 만지면 까끌거릴 것만 같은 음성이었다. 가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일차원상에서 이미 소리가 전해왔다. 부서지는 의지, 불안정한 격노, 그로 인하여 위태로워지는 운명 전부를.
〈심장의 침묵〉은 마치 원래부터 이 소리가 제 옷인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더는 삶의 근간을 잃었지. 철심이 와해되어 가루가 된 오늘의 소리는 그런 아더의 모습 자체였다. 부서지고 만 심장을 부서진 목소리가 들려주었다. 무너진 무릎을 쏟아지는 금속성으로 보여주었다. 차갑기만 한 바람 앞에 홀로 선 쓰린 고독은 먼지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가는 소리 안에 다 있었다. 제격이었다. 흡사 맞춤옷이었다.
그랬었다. 내내 잘게 부스러진 소리를 근간으로 노래를 엮어가고, 그것으로 극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왕이 된다는 것〉에서였다.
도입부였다. 2막 내내 철가루처럼 흩어져있던 소리가 깊은 저음부에서 굳센 심지를 세운 채 뭉쳐있었다. 철가루가 다시 철심이 된 것이다. 정확히 이 넘버에서. 하필 이 노래의 도입에서.
〈왕이 된다는 것〉이 어떤 순간인가. 결전의 전쟁을 앞두고 모든 용기와 힘을 끌어모아야 할 때였다. 자신이 알던 세상 전부가 무너졌지만, 한 번 더 자신을 믿고 나아가야만 하는 처지였다. 도입의 소리는 그런 아더를 표현하기 위한 그의 선택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의지와 기력을 동원하여 흩어진 소리를 결집해내는 것으로. 2막에서 오늘 처음 들려주는 단단하게 뭉친 소리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 상태가 따라주지 않을 때 그가 얼마나 공을 들여 섬세하게 노래하는지 잘 알기에 더더욱.
하늘을 바라보며 울먹이다 이내 입술을 깨물고 앞으로 내디뎌보는 이, 오늘은 소리 또한 그랬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계를 넘어 나아가는 것도, 그를 향한 의심을 지우고, 진실 앞에 서서 물러서지 않는 일도. 겨울바람이나, 분노에 찬 바다, 발밑에서 전부 갈라지는 땅까지도 무엇 하나 만만하지 않았다. 모진 장애물 앞에 오직 의지 하나로 굳세게 뭉쳐 만든 소리가 점차 흩어져갔다. 일부는 가루가 되고 일부는 울음이 되었다. 또 일부는 땀으로 흘러내렸다. “자, 와, 가”를 거치는 동안 뭉쳐 만든 소리가 그렇게 산산이 흩어져갔다.
소리가 점점 깎여나가는 감각, 그건 마치 암초에 부딪히느라 점차로 너덜너덜해지는 사람의 인생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애써 두려움을 삼키고 부득불 용기를 내어보아도, 이 모든 각오를 무위로 돌릴 만큼의 거대한 시련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인간사를 소리로 듣는 느낌이었다.
천재적이지 않나. 서걱거리며 가루처럼 바스라지는 소리를 적시에 다시 이끌어오는 선택. 풍파를 만나 깎이고 쓰러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청각적 효과에 말문이 막혔다. 목 상태를 숨기는 대신 오히려 전면적으로 활용하여 여기, 이 장면에서 반드시 전달해야하는 모든 것을 표현해낸 것이다.
그래서였다. 어느 때보다 실감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건 용기가 덧없을 만큼의 거대한 운명이란 것. 새삼 운명이 그에게 지운 삶의 무게가 얼마나 가혹한가. 그걸 알고도 세상에 맞선다는 건 뭘까. 물러서지 않는다는 건, 나아가 한계를 넘는다는 건..
도대체,
왕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나의 의문이 곧 그의 물음이었다.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로 그는 묻고 또 물었다. 질문의 무게에 짓눌려가면서도 끊임없이. 그건 대답없는 야속한 운명에 맞서기 위해 그가 선택한 돌파구였다. 물음 하나에 두려움을 내던지고, 물음 하나에 의심을 지워갔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망설임, 두려움을 허물처럼 벗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끝까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은 이가 결연히 주먹을 쥐었다. 흩어져가는 소리의 뿌리를 틀어쥐고, 맺는 음으로 억세게 닫아걸었다. 기형적일 정도로 기적적인 소리의 결집이었다.
굳센 주먹, 굳세게 맺은음.
소리와 사람이 혼연일체 된 마무리였다. 연주가 멎고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사람도, 소리도, 노래를 거쳐 우뚝 선 모습을 보았다.
소리가 곧 사람이었던 7월 16일의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