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 또 철퍼덕 땅으로 몸을 무너트렸다. 눈앞의 검을 바라보며, 두 팔 두 다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아예 엎어지는 소리도 난다. 털썩 땅을 짚는 소리, 퍼덕 무릎이 무너지는 소리가 합창이라도 하듯.
지친 육신을 가눌 기력 하나 없음이 너무나 역력했다.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얼굴이 멍했다. 모든 것을 소진해버린 얼굴이었다. 너무 큰 장갑은 그의 손을 먹어 삼킨 것만 같았고, 무거운 갑옷에 눌린 몸에는 남은 힘도 없어 보였다.
그 얼굴이 검을 보았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그의 운명이 되고, 모든 것을 시작한 검. 회한하듯 흐려진 눈이 눈물을 삼켰다.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도 도전이었다. 7월 16일에 운명을 떨쳐내듯 분연히 일어서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오늘의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땅을 짚었다. 손으로, 검으로 차례로 땅을 짚어서 몸을 지탱했다. 땅으로 꺼진 듯한 몸을 겨우겨우 일으켰다.
간신히 추스린 그의 등 뒤로 천천히 밝아오는 첫새벽의 빛이 보였다. 깜깜했던 암흑에 조금씩 스미기 시작하는 따스한 빛은 자연히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에서 새출발을 앞두고 있던 그의 모습을 불러왔다. 그때는 멀린을 위시한 많은 이들의 바람을 날개 삼아 올랐지. 그때는 운명으로 이끌어주는 사람도,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같은 바위산 앞에서, 그날과 같은 여명을 바라보고 선 이제는 자신의 선택만을 믿고 스스로의 힘으로만 나아가야 했다. 말없이 바위산을 바라보는 등 역시 알고 있었다. 혼자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걸. 그래야만 이 비극에의 종지부를 찍고 다음 장을 열 수 있다는 것을.
힘겨운 한 걸음 한 걸음 끝에 다시금 정상에 오른 그가 모든 것의 시발점인 검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오랜 시선이었다. 짙고도 그윽한 눈이 검을 투시하듯, 시간을 돌이키듯 한참을 멎어있었다. 눈으로 건넨 여러 이야기 중에서 나의 눈에 또렷하게 보인 것은 질문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나의 운명이라면,’
‘선택받은 게 나라면,’
또한 각오였다.
‘모든 의심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회한도 자조도 모두 삼킨 얼굴이 태연히 정면을 바라보더니, 자답하듯 검을 치켜 들었다. 그순간에 내가 들은 것은 운명의 부름이었을까, 그의 목소리였을까. 분간키 어려운 하나의 소리가 메아리조차 남기지 않고 나의 심장으로 직행했다.
‘오라, 나의 운명아.’
모든 것의 끝에서 또 한 번의 시작을 여는 사람, 7월 19일의 그였다.
*
소리가 돌아왔다. 곧은 나무를 닮은 소리, 강건한 심지의 소리, 소리로 기둥을 심는 소리. 17일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처음으로 되돌아온 목소리에 처음에는 놀랐고, 곧이어 안도했고, 무엇보다 기뻤다. 〈난 나의 것〉의 설익은 채 용솟음하는 탄탄한 분노음,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의 다이아 원석 같은 음성. 그 원석이 스스로를 정제하여 가는 여정이 담긴 소리. 단단한 소리. 굳센 심지. 아, 단 하루 만나지 못했을 뿐인데 너무 그리웠던 이 소리. 그 자체로 아더이자 시아준수인 소리.
〈이렇게 우리 만난 건〉. 관록인지 성격인지, 랜슬럿 중에서도 발각되었을 때 무척 여유로운 엄기준 랜슬럿. 무례에도 서슴없는 탓에 결국 단단히 화가 난 기네비어와 대련을 하게 되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진 상황.. 뒤에서 열심히 말려보던 아더, 두 손에 얼굴을 폭 묻어버렸다. 아, 어떡해. 망했어. 찰나의 귀여운 좌절에 심장 콩 가슴 콩.
기네비어의 소절 내내 말도 못 하게 예쁜 얼굴도 꼭 적어야만 해. 결혼식에서 애틋하게 그려 넣은 잘생긴 미간과는 또 다르다. 여기에서는 아직 완전하게 사랑에 빠지기 전, 기네비어에게로 끌리는 마음, 뛰는 심장, 홀려 드는 두 눈을 기가 막히게 섬세하게 표현해. 정말 예뻐요. 공연장 안의 모든 사람에게 망원경을 들려주거나, 전광판으로 크게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은 얼굴이야.
〈왜 여깄어?〉. 17일에서 길게 맺지 못하고 끊어졌던 어미, 바로잡아야 ‘해.’도 돌아왔지♡
또 한 명의 펜드라곤 아이. 출생의 진실은 충격적이었으나 그래도 자신은 엑터 슬하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지. 그러니 같은 핏줄, 엇비슷한 처지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생각도 못 했던 모르가나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한다. 처음 만난 누나의 손을 움켜잡으며 곁에 있어 주겠노라 다가서는 동생. 낯선 호의에 경계심을 보였던 모르가나가 2절에서 먼저 그의 손을 잡을 때면 펜드라곤 남매의 행복을 바라게 된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아더의 손을 먼저 잡은 모르가나가 진심처럼 느껴져서. 누이가 잡은 손을 보고, 이어 그녀와 눈 맞추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더를 볼 때마다 이 남매가 이대로 행복을 찾아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해.
심장의 침묵 인트로. 등장하는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왼블에서는 심호흡하게 된다.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눈물만없다 뿐이지 우는 얼굴이다. 숨통을 틀어쥐는 슬픔, 턱밑까지 차오른 불길. 온통 그를 옥죄이는 것들 사이에서 한없이 고통스러워해.
가슴을 가장 따끔하게 했던 건 “날.. 날?” 하며 되묻던 그. 웃음처럼 흩뿌려지는 울음, 네모꼴로 무너지던 얼굴.
〈이게 바로 끝〉. ‘저어주 받았어’의 파편 튀는 음성도 돌아왔다♡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의 의심 어린 눈동자를 곧바로 보았다. 의구심을 품고 반박하듯 되묻는 얼굴이 부정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이 장면은 역시 B에서 봐야 한다. 모르가나의 피로 물든 손 바로 위에 의문 어린 아더의 눈동자가 나란한 이 각도로 봐야 해.
모두 거짓말, 사실 아냐. 배신을 목도한 아더를 모르가나가 흡사 어미새처럼 품을 때였다. 16일, 장은아 모르가나의 어깨를 부여잡았던 손이 오늘도 그녀의 어깨를 찾았다. 의지처를 찾는 것처럼. 지지대를 움켜쥐는 것처럼. 누이가 어느 방향으로 자신을 몰아세울지도 모른 채 그저 이끄는 대로 걸으며.
가장 슬펐던 장면은 오늘도 역시 ‘무너지는 꿈’을 시작할 때. 두 사람을 추방해놓고도 그들을 흘긋이던 시선에 또 따끔했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보는 걸까. 그들이 매달리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끝내 한마디 인사조차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인기척.. 이젠 정말 끝이라는 듯 질끈 내리감기던 눈..
꿈은 다 무너졌고 온통 검붉은 바다.
최후의 “이게 바로 끝”의 파열음은 소리로 세상의 끝을 전해준다.
“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왜. 왜.” 울음으로 무너지던 얼굴이 멀린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며 말했다.
“멀린, 멀린..”
연달아 부르는 음성이 꼭 매달리는 아이 같았다.
“그래…”
내가 전부를 밀어냈지.
“그럼 난 실패한 거야.”
푹 숙였던 고개를 힘겹게 일으키며 그가 다시 물었다. “랜슬럿 없이 어떻게 해.” 할 수 있고, 해내야 한다는 대답에 용기를 내보려 하다가도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모르가나는.” 그의 누이. 배신을 사주하고, 그의 앞으로 배신을 드리운 누이. 그녀의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오늘은 평소보다 뭉쳐있는 것 같았다. 다소 울컥한 음성처럼 들렸어. ‘모르가나마저도’ 처리를 물어야 하는 그 상황에.
〈왕이 된다는 것〉, 역시 오늘의 넘버. 17일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온몸으로 노래하는 그를 보았다. 17일을 겪고 급히 되살려온 오늘의 목소리가 2절에 이르러 한계치에 달했다고 여겨지는 순간부터였다. 불끈 쥔 주먹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으며, 어깨로 무거운 갑옷을 눌러가며, 그가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몸을 써서 노래를 끌어내는 모습은 막다른 길에 홀로 선 아더였고, 격전을 앞둔 아더였으며, 마지막으로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서는 아더였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래였다. 불굴의 무대였고, 무너질 수 없는 가치, 김준수 그 자체였다.
〈평원에 날 묻어〉. 이번엔 아니라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랜슬럿의 말을 그가 대번에 반박했다. 흐린 눈, 황망한 얼굴, 혼비백산한 목소리로, “아니야아.”
눈물을 뚝뚝 떨구는 그의 얼굴 아래로 엄기준 랜슬럿의 눈물을 보았다. 흐릿한 한 줄기의 그것은 차마 전하지 못하는 ‘형이 미안해’라는 마지막 말과도 닮아있었다.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민경아 기네비어의 대번에 비켜가는 고개, 마주칠 틈이 없는 시선. 제대로 어긋난 두 사람의 얼굴에 또 마음이 아프던 찰나,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기울이며 그녀의 눈을 찾던 그가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민경아 기네비어도 매몰차지만은 않다. 17일보다 조금 더, 몸을 숙여 그를 감싸 안듯 일으켜 세워주는 그녀를 보았다. 그와 공명하기보다는 그를 어르고 달래어 보내기 위한 손길이었으나, 너무나 철저한 외면이었던 10일보다는 훨씬 나았다. 바라보는 마음에도, 어쩔 줄 모르고 우는 그를 위해서도.
샤아더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