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보낼 수 있는 아더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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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막의 넘버로 꼽아도 좋을 〈난 나의 것〉. 아더의 분노가 드러나는 장면인 만큼 항상 강과 강으로 노래해 왔지만, 오늘은 그것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파워가 있었다. 두 번은 없을 것 같은 분노, 벼랑 끝에서 다 쏟아내는(극 초반인데도) 목소리를 잠자코 듣다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막공’이었다.

노래 안의 에너지에서 진실로 막공임을 실감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순간에 각성하듯 빨려드는 느낌이 도처에서 생생하게 전해졌다.

시아준수의 아더로서의 막공이 시작된 것이었다.

 

파워만 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또한 그의 막공.

아더가 용의 불길을 처음으로 다스려낸 순간이었다. 멀린의 두 손 아래에서 고개를 떨군 얼굴이 한 차례 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풀리며 참았던 숨을 일시에 토해낸 것이다. 강렬한 대신 섬세한 숨결에서 아직 어린 아더에게 용의 그림자가 얼마나 두렵고도 버거운 존재인지, 용을 다스려낸 감격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숨결 하나로 서사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는 장면 하나하나가 찬란한 계절과 같았다. 제각기 빛깔로 아름다운 계절처럼 아더의 순간순간이 반짝이며 다녀갔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의 ‘오라 나의 운명아’는 그려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절마다 제각각으로 모두 아름다운 넘버이지만, 오늘의 하나를 말하라면 주저 없이 이 구절을 댈 것이다. 망설임은 남겨두고 바위산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의 아더를. 한 손을 운명의 하늘을 향하여 우아하게 뻗으며, 눈을 감는 찰나를.

 

〈이렇게 우리 만난 건〉에서는 항상 반짝여서 예쁘디예쁜 얼굴을 본다. 왼쪽 눈썹 위로 보석 같은 펄 한 자국이 땀과 뒤엉켜 얼굴이 통째로 아름답게 반짝반짝. 이 넘버에서 기네비어를 바라보는 빛나고 따뜻하며 사랑스러운 표정과 만나 눈이 부셨다.

 

〈왜 여깄어?〉의 아더는 처음부터 잘생겨서 좋아했다. ‘잘생겼다’의 뜻풀이를 외양과 심성이 하나와 같이 반듯하여 지극히 아름답고도 선한 것이라 일컬을 때, 꼭 알맞는 얼굴이 이 넘버에 있다. 

오늘은 특히 모르가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일순간 움푹 패였던 미간에서 내가 사랑한 잘생김을 보았다. 1막의 아더가 잘생김의 극점을 찍은 순간이었노라 단언한다.

 

〈기억해 이 밤〉의 아더는 마지막까지 단단했다. 선하며 강건한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멀린에게 검을 건네주며 살짝 지어 보인 신뢰의 미소에는, 18세 어린 왕의 의젓함에 내가 다 울컥했다. 마치 ‘잘 나아가볼게요’ 하는 듯한 눈이 대견해서, 애틋해서.

이어지는 짧은 연설에도 계속 마음이 울렁거렸다.

“원탁의 기사”를 발음할 때 유독 성스러웠던 목소리. 카멜롯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울컥하는 것처럼 일렁이던 얼굴. 그러면서도 동시에 굳건한 눈, 시선, 입술. 바위산 꼭대기에서 왕관을 쓰고 검을 쥔 채 서 있는 그가 머금고 있던 그 모든 표정 하나하나가 전부 카멜롯의 희망의 상징, 믿음의 증표 그 자체라 나의 울렁거림을 더욱 부추겼다. 마음이 촉촉해지면서 바싹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결혼식 피로연에서는 잠시나마 유쾌했다. 함께 춤을 추자며 눈을 빛내는 동생을 대번에 거절하지 못했다가, 결국 안 되겠다며 그의 가슴을 콩콩 두드리는 장은아 모르가나 덕에 조금 웃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웃음과 함께 좋은 한때가 스쳐 갔다. 극 중 펜드라곤 남매가 가장 친밀해 보였던 이 찰나도 잠시, 아더가 떠나가자 싸늘하게 변해버린 누이의 얼굴을 따라서.

 

〈눈에는 눈〉, 곧 본격적인 비극의 시작. 낭떠러지인 듯 오르막길인 듯 알 수 없는 곳으로 던져진 그의 아더는 표정도 목소리도 변했다. “겁에 질린 늑대는 숨을 곳 찾고”라며 그가 싸느랗게 비웃었다. 티 없던 소년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조각나고 있었다. 웃음과 소란이 온화하게 가득했던 곳을 어둠이 전부 삼켜버리면, 혼자 되어 “용의 날이 밝았다”며 득의양양하게 선 그가 고집스러운 얼굴로 검을 치켜들었다. 불행이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서 가〉. 원탁의 기사들이 아더의 자질을 의심하는 대목에서는 고립의 넘버. 둘도 없는 형제인 랜슬럿의 가사를 듣노라면 배신의 넘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남는 이들이 있어 다행인 넘버.

마지막의 그는 어느 때보다 거리낌 없이 분노했다. 덕분에 다시 들을까 싶었던 소리도 들었지. 생명에 대한 존중 없는 왕이라는 힐난에 기사들에게 잡혔던 몸을 비틀어내며 “놔, 씨!”

더불어 드물게만 보여주었던 발동작도 보았다. “어릴 때처럼 다시 붙어봐”에서도 붙들린 몸을 한껏 뒤틀며 한쪽 발을 앞으로 쾅.

그야말로 아낌없는 분노였다.

 

〈이게 바로 끝〉은 그저 분노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경지에 닿은 지 오래다. 파멸, 종말, 세상의 끝과 같은 절체절명의 수식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매 순간 ‘이다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넘버인데, 마지막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파열음으로 표현하는 눈물을 보았다. 검을 들고 달려드는 걸음에서, 세상이 무너져내린다던 비명 같은 노래에서(오늘의 소절이었다. 얼굴을 아예 기네비어의 머리에 댈 듯이 다가서서, 속삭이는 듯이 비명 하듯이 씹어냈던 목소리까지 전부), 끝내 배신을 처단하지 못하고 감아버린 두 눈에서 메말라 보이지 않는 눈물을 보았다.

이 모든 소스라치는 배신과 절망이 곁에 남은 단 한 명의 피붙이의 형상이 되어 그의 뒤에 서 있다는 잔인한 진실을 그가 똑바로 마주하는 최종장에는 피눈물이 되었다.

 

제 눈물이 굳은 땅 위에서 그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왕이 된다는 건 뭘까.

 

첫 소절의 까끌한 음성은 온갖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서부터 나는 ‘오늘의 공연’과 ‘마지막이 주는 감회’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극렬히 노력해야 했다. 시작할 때부터 애써서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아주 작은 자극에도 와르르 무너질 만큼 아슬아슬해진 탓이었다. 

쉽지 않았다.

사지로 나아가는 청년왕의 뒷모습에서부터 눈이 쓰렸다. 어느 날엔가는 무덤덤하게 보았던 전쟁씬이 그렇게나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적과 아군 틈에서 뒤엉킨 얼굴, 밀쳐지고 넘어진 채로 형의 죽음을 목격하는 동생, 소리도 없이 처절한 안된다는 비명, 동시에 어둠 속에서 말없이 죽어가는 또 다른 형제ㅡ원탁의 기사들.

비극이 연달아 다녀가는 와중에 자꾸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끼어들며 감회를 부추겼다.

 

전쟁과 죽음의 뒤를 이어서는 이별이었다.

기네비어와 마지막으로 이별하는 그를 보는 것은 못질하는 감각을 느끼게 했다. 그냥만 바라보아도 아픈데.. 무릎 꿇은 그가, 다급하게 장갑을 벗는 손이, 바들바들 떠는 그 손으로 그녀를 잡아보려는 동작이 그냥만으로도 슬픈데, 동작마다 ‘마지막’을 노래했다. 날아간 시간이 야속했다. 벌써 아더가 너무 그리울 것 같았다. 시간을 잡아두고 싶었다.

 

그런데 시아준수 또한 그랬던 걸까.

기네비어가 떠난 자리에 끝끝내 혼자 남겨진 그가 소절을 쉬이 맺지 못했다. ‘갈 곳 없는 이별’ 단 한 문장을 남겨두고 자꾸만 시간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이는 노래를 마무리하면 영영의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하기에 차마 맺지 못하고 주저하는 아더인 것도 같았고, 마지막 넘버에 앞서 시간을 잡아 두고 싶어 하는 시아준수인 것도 같았다. 후자의 어렴풋한 시아준수로서의 감회는 ‘막공’에 매몰되기 직전인 내게 작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검의 눈물 또한.

혼자 남은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들어 올리자, 검날을 따라 손가락 두 마디 남짓 흐르는 검의 눈물을 보았다. 잘 울지 않는 검이다. 드물게만 우는 검이 ‘마지막’을 아는 듯이 울었다. 검의 눈물을 인지한 즉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제 손안에 남은 단 하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온갖 이야기가 얽혀 있었다.

 

가해자이자 동료이며 운명인 검을 쥐고 그가 다시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험난했고, 오르는 과정은 눈물겨웠다. 겨우겨우 정상에 이르러서도 깎아지른 듯 가파른 꼭대기에서는 중심 잡기도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평형을 맞추어 중심을 잡아보는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스스로의 눈물과 그녀의 눈물, 검의 눈물을 모두 딛고선 바위산 정상의 모습도 오늘로 마지막일 것이었다.

어렵사리 힘을 들여 중심을 잡은 그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꼿꼿하게 선 어깨 위로 빛이 쏟아졌다. 땀범벅의 얼굴이 따사로운 빛 속에서 이목구비의 윤곽만을 남기고 번져갔다. 그렇게 빛이 그인 듯 그가 빛인 듯 아리송해지려는 찰나, 그가 검을 치켜올렸다.

빛 한가운데로 검날이 박혔다.

바위산의 정상, 가장 높아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피할 수 없는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홀로 선 그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단 한 명의 왕, 나의 아더, 김준수의 아더 펜드라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