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의 왼블. 기차역에서 미나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그가 정면이었다. 그래서 참 잘 보였다. 그녀를 따라와 놓고 안절부절못하며 한껏 초조한 얼굴이. 두 손을 예의 바르게 포개어 선 채로 미나가 돌아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는 그의 모습이.

곱게 차려입고는 풀이 죽은 그가 참 단아했다. 그녀와의 대화를 제가 망쳐버린 전적이 있는 터라 매사 언행에 조심스럽게 구는 모습이 사랑 앞에 서툰 소년 같았다. 무구한 얼굴 덕에 더더욱. 

 

실수를 만회하고자 최선을 다한 애드립까지도 그랬지.

“그럼 다른 걸로 다시 해볼게요.”

“그만.” 

두 손을 낮게 들어 동작 그만, 단호하게 주문하는 미나 앞에서 금방 꼬리 내렸지만.

“미안합니다.”

정중한 사과는 잊지 않았다. 부드럽지만 빠르게 덧붙인 미안하다는 말에서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개인적으로 감탄스러웠던 건 어느 때보다도 애드립과 다음 대사의 연결이 조화로웠다는 점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웃음이 만발한 객석만 아니라면 애드립이 아니라도 믿겠을 만큼!

 

이어서는 왼블 특수 하나.

“지금의 전, 더 늙고, 더 외롭고, 더 못돼졌죠.”

터벅터벅, 그가 나의 정면으로 찾아왔다. 시야 가득 짙은 빛의 동공이 들어찼다. 반짝임으로는 둘째갈 수 없는 그의 눈동자가 암막에 틀어박힌 듯 까맣게 바래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그 어떤 빛도 없이 까맣기만 했다. 그의 눈을 뚫어지도록 마주 보는 내게로 공허함이 그대로 전이될 것만 같이.

 

하지만 미나를 볼 때만큼은 생기를 얻는 눈이었다. 오늘의 시야에서 가장 두근거리게 아름다웠던 순간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말아요. 조금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쁨을 찾을 수도 있거든요.” 라는 미나를 향하여 웃었을 때. 미나의 안에 살아서 숨을 쉬는 엘리자벳사의 영혼을 확인한 그가 달게 웃었다. 사랑하는 그녀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임을 확인하였으니 그럴 수밖에.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에게 되물었지만,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반색하는 눈동자는 이미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그리고는 불멸의 삼연곡. 기차역에서부터 도란도란 쌓은 해후를 따라 이어진 삼연곡이었다. 오늘의 감정선, 삼연 들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고도 할 수 있다.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휘몰아치는 She에서 압도당한 객석이 숨죽인 채 고요했다. 덕분에 She를 막 끝낸 그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밭고 거친 숨이었다. 어느덧 40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선연하여 떠올릴 때마다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이야기를 그녀를 위하여 꺼내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되새길 때마다 상처받는 것도 매양 같아서, 힘든 기색이 역력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로 그녀가 다가왔다. At Last였다.

오늘의 두 사람은 내내 서로의 손을 부둥켜 잡고 있었다. 한 몸처럼 붙어서는 웅크린 채로 나란히 어깨를 떨었다. 서로를 알아본 기쁨에 우는 얼굴로 웃다가, 서로를 향한 그리움에 울었고, 평행세계처럼 머나멀기만 한 서로의 처지에 또 울었다.

먼저 일어선 건 오늘도 미나였다. 오늘따라 북받친 그녀가 문장 틈새로 울음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말했다.

“난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

울컥하여 짓눌린 문장을 되받아치는 그 또한 평소보다 절절했다. 

“당신은! 나와 결혼했어.”

너무 절절한 나머지 오늘은 미어지는 심장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4월 21일이나 22일처럼 손바닥으로 심장을 내려쳤다간 그대로 깨져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삼연곡의 종착지. Loving You Keeps Me Alive. 개인적으로 가장 울컥하는 부분은 도입부의 ‘아물지 않은 내 상처’ 언저리. 가사도, 가사에 담은 그의 애원도, 다가서는 그와 멀어지며 거리를 벌리는 그녀의 교차도 모두 슬프다.

이 대목에서 임혜영 미나는 항상 그에게 등을 보인 채로 오열한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애원을 압도할 때도 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얻는 위안이 있었다. 그만의 오열이 아님을 확인받는 것에서 오는 위로가 있다.

마지막ㅡ“함께 춤춰요 새벽을 향하여.” 한 걸음만을 남겨둔 거리에서 미나가 멈추어 섰다. 곧 닿을 듯한 그녀를 향하여 그가 손을 뻗었다. 나란히 마주 뻗은 손이 꼭 트레인 시퀀스에서처럼 닿을 듯 말 듯 한 대치 상태에 놓였다가, 끝내 그녀가 돌아섰다. 지나쳐가는 그녀를 두 눈으로 집요하게 좇던 그가 그녀의 걸음 끝에 선 조나단을 확인하고 무너져 내렸다.

 

웨딩, 역대급, 잘생김. 왼블의 시야가 너무 오랜만이라 새로운 탓에 눈을 뗄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조나단과 미나를 투시할 듯 올려다보는 얼굴이 정말 정말 정말 잘생겼었다. 숨을 진정시키느라 올록볼록해진 얼굴이 진짜로.. 네모반듯 강렬하게 잘생겼었다.. 그릴 수 있다면 그렸을 것이다.

“안돼”의 처절한 생목소리를 듣고서야 환상 같은 얼굴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Life After Life, 창조물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유독 가깝고 농밀했다. 뺨에서부터 턱선을 따라 입가에 오래도록 머물며 제 손으로 빚은 존재를 깊이 탐망했다.

 

It’s Over, 막아서는 미나를 오늘도 재차 불렀다. “미-나!” 4월 22일의 그가 당혹스럽고도 서글픈 나머지 그녀의 이름을 저도 모르게 발음해보았다면, 오늘은 얼핏 탓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훨씬 강해지고 탁해진 목소리가 책망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어떻게 저들의 역성을 들 수 있느냐고.

 

Train Sequence, 고른 치열 와중에 정말 살짝만 도드라져 빛을 받는 앙니를 홀린 듯이 쫓아가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깨닫고 보니 퇴장하는 와중이었다. 난입한 반헬싱의 목소리에, 혼란스러운 미나의 음성에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며 한동안 그렇게 고개를 내저었다.

 

Finale, “나와 같은 어둠에 갇히게 할 수가 없어”

미나로부터 그가 뒷걸음질할 차례에서 그만 옷자락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일전 The Longer I Live에서처럼 잠시 휘청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걸음이 꼬인 끝에 몸이 기울어지고, 균형을 잃은 팔이 땅헤엄을 치며 제대로 넘어졌다. 긴 옷이 결국 사달을 낸 것이다.

금세 일어나 원래의 동선대로 오블 저 끝에 가 있는 그를 보는데, 그가 넘어진 것보다 충격적인 게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는데, 노래가 넘어지지 않았다. 균형을 잡아보려 애쓴 통에 머리는 전부 헝클어지고 차림새도 만신창이가 되었건만 노래는 제자리에 그대로였다. 부지불식 간에 균형을 잃고 넘어졌으니 당연히 놀라고 철렁했을 것이다. 그러면 음이 튀거나 요동치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그의 노래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늘 하던 그대로 드라큘라였다.

 

이어서는 완벽주의자 시아준수의 무대였다. 실수 한 번에 페이스를 잃고 마는 건 그와는 먼 이야기다. 오히려 그는 불붙곤 한다. ‘차가운 암흑 속에’를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터트려내어 회장을 송두리째 휘어잡은 그는 내가 익히 아는 ‘시아준수’였다. 실수에 삼켜지는 대신 금세 하나의 에피소드로 만들어버린 그가 최후의 소절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이런 삶, 이런 인생, 죽음보다 ‘괴로워’ 

고통 어린 몸부림 끝에 그가 허리를 잔뜩 수그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몸짓을 따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넘어진 통에 만신창이 된 차림새를 이용하여 한껏 처연함을 연출해내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뜨겁게 차올랐다.

언제 어느 때고 가진 것은 모두 활용하여 ‘맡은바 무대를 백 퍼센트 이루어낸다.’

그는 시아준수였다.

눈앞의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눈물로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덧. 미나의 유혹 오늘은 박력의 두 팔 빼내기. 그리고 눈맞춤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