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5월 14일의 드라큘라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탄 하루가 또 있을까.

 

시작은 좋았다. 피트에서 부음감님을 확인하고 지휘자마저 드림캐스트인 오늘에 기뻤지. 음향이 못내 아쉬웠으나 옥에 티가 되리라 믿었다. 예상치 못한 사안은 마이크가 야기했다.

 

입맛 다시기를 대체한 모자 벗기가 오늘은 한 번에 성공을 하였기에 역시 시작부터 좋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에서 조나단을 겁박하는 기세도 등등했고, 가로횡단의 파워도 훌륭했다. 그러니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기승전결의 ‘결’을 도맡는 회춘의 대목에서 마이크가 나가버릴 줄을.

 

“너의 피 몇 방울로 얻게 될 부귀영화”ㅡ 침대 위에서는, 그러니까 그가 코트를 벗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나마 노랫소리가 들렸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답답하게 막힌 소리였을지언정 마이크를 거쳐서 나오는 소리였다. 진짜 사고는 코트를 벗은 후부터였다. 마이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처럼 소리가 소거되었다. 

 

드라큘라의 소리가 소거된 프레시 블러드, 그것도 회춘한 그의 소리가 사라진 공간. 마이크를 잃은 노래는 오로지 육성으로만 전달되었다. 

회춘의 쐐기를 박아야 할 첫 소절 “끝없는 이 새벽, 불타는 저녁”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와 앙상블의 소리는 무대와 객석의 두 공간을 모두 빨갛게 적셔가는 중인데, 그의 엄포는 객석까지 닿지 못한 채 무대 안에만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무대 밖, 객석이었다.

주연 드라큘라의 소리가 소거된 객석에서 나는 당황했다. 말을 잃은 정적 속에서 숨죽이는 청중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가고 있었다. 일시 정지된 나의 감각 속에서 그는 마임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지.. 왜 하필 프레시 블러드에서.. 프레시 블러드에 그가 갖는 애착과 책임감을 알기에 마음이 동동 탔다. 어쩌면 좋아..

 

그런데 음절 하나가 천년의 단위로 흐르는 것만 같은 노래 속에서 그가 조금씩 알을 깨기 시작했다. ‘새 운명의 길’을 타고 오블 앞으로 날아온 그가, 

“영원히 함! 께! 해!”

음절 위에 음절을 쌓으며 소리를 곧추세웠다. 오케스트라와 앙상블의 소리 사이에서 그의 생목소리가 크레셴도로 커지고 있었다. 전신에 바짝 들어간 힘이 오로지 소리를 내는데 집중하는 게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반주도 아니고, 오케스트라에 여러 사람의 화음까지 팽팽하게 깔린 공간에서 어떻게 마이크도 없이 노래를 메꾼단 말인가. 오늘만 노래하는 사람이라도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니, 그가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고였다. 사고를 왜 인력으로 수습한단 말인가. 이런 일은 사고로 두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시아준수의 최선 앞에서 나의 걱정은 월권이었다.

“수많은 새 생명, 날! 거부 못 해” 에서 완전히 득음한 육성은 마지막 소절을 뱀파이어 슬레이브의 화음과 나란히 쏘아 올렸다.

“영원히 살! 리라” 

제 소임을 다한 후 어둠 속에 잠겨가는 눈동자를 향하여 객석의 환호가 쏟아졌다. 그 안에는 감탄과 격려, 신뢰와 감사가 뒤섞여 있었다.

 

이후부터는 시아준수의 성격대로인 공연이었다.

실수 후의 시아준수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완벽을 선보이곤 하지. 그런데 실수도 아니고, ‘사고’를 겪는다면? 

완벽을 넘어선 오늘이었다.

 

Life After Life는 출사표가 아니라 개선식이었다. 삼연곡으로는 노래의 정점을 찍었다.

피날레는.. 

피날레는 오늘의 프레시 블러드가 불러온 필연의 완성작이었다.

김준수, 임혜영의 조합에서 보고 싶었던 피날레의 차원을 떠나 ‘김준수의 피날레’로서 단 하나로 남을 엔딩이었다.

 

단단한 노래에 한숨결의 울음을 허락했던 것, 차가운 ‘암흑 속에’를 긁지 않고 원음에 가깝게 노래해 보이면서도 격정은 긁을 때와 다름없이 펼쳐 보였던 것, ‘자’유를 줘요에서 일전에 딱 한 번 들려주었던 옅은 한숨을 다시 불러온 것, 그리고 부음감님과 함께 세상의 끝까지 가는 어미, 자유를 줘 ‘요’의 호흡까지.

 

정점은 기진맥진한 애원이었다.

“부탁해요 제발, 내게 밤을 허락해요.”

육신의 균형을 유지할 힘조차 남지 않아 휘청거리면서도 그가 웃었다. 옅게. 피로에 감긴 두 눈을 부러 크게 부풀리며, 그녀와 시선 맞추어서. 이것이 곧 나의 바람이자 구원이니, 당신의 사랑을 허락해달라며.

상냥하게 커진 눈동자는 괜찮다며 웃는데, 목소리는 점점 울음으로 번져가는 것까지 내 마음을 뜯어냈다. 

 

쐐기는 최후의 소절이었다. “사랑해서 그댈 위해 내가 떠날게요” 울음기는 묻었을지언정 마지막만큼은 단단하게 맺고 마는 데서 사랑을 위해 결단한 그의 고결한 성정이 보였다. 그것은 꼭 오늘의 프레시 블러드를 끝까지 책임져냈던 시아준수와도 나란하여, 나는 내 눈물의 근원지를 알 수 없어졌다. 

드라큘라인지, 시아준수인지. 닫힌 관을 바라보며 둘 다였으리라 짐작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파도쳤다.

이 사람을 사랑하여 한없이 축복 되나 이 사랑이 주는 눈물에는 이따금 기쁠 때에도 가시가 있어 따끔하다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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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3.01.15

2023년에서 왔어요. 1월 13일의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서 이날의 드라큘라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겪었거든요. 음향이 처음부터 나오지 않아 공연이 잠시 중단되었는데, 대번에 드라큘라의 5월 14일이 생각나더라고요. 이때 오빠가 무대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만들어냈던 경이를 2023년의 웨사스에서는 공연 구성원 모두가 함께 이루어냈어요. 오빠가 참여하는 극에서 모두가 동질한 소명감을 공유한다는 것, 그게 참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