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시목 아마데와의 내 운명 피하고 싶어. 시아준수가 한쪽 팔을 온전하게 내맡길 수 있는 아마데와의 공연이 대체 이 얼마 만인지. 그리고 실로 얼마 만에 아마데가 칼심처럼 찔러넣은 펜촉에 직격타를 얻고, 팔을 부여잡으며 치솟아 오르는 그를 보았는지.
시아준수는 무대의 대소를 불문하고 공간을 담대하리만치 온전하게 홀로 채워낼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대단히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기도 해서 상대역과의 호흡에 따라 무척이나 기민하게 달라지곤 한다. 부족할 때는 부족한 만큼 스스로 채워 넣고, 훌륭할 때는 꼭 자극받는 사람처럼 증폭되어 윈윈의 공연을 이끌어낸다. 관객으로서는 악전고투하는 전자의 감탄도 소중하지만, 역시 후자의 카타르시스 충만한 찬탄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은 후자인 날이었다.
‘제 몫’을 해내는 사람, ‘잘하는’ 상대역을 만날 때 시아준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20일 만에 다시 만난 이시목 아마데와의 오늘의 내 운명, 나는 나는 음악, 그리고 모차르트의 죽음이 그 답을 보여주었다.
*
내 운명 피하고 싶어. 항상 볼프강과 아마데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야 하는 장면을 ‘혼자’ 해내면서도 마치 ‘두 사람이 하는 것처럼’ 고군분투해왔던 그가 오늘은 아마데에게 한쪽 팔을 온전히 맡기고 있었다. 제 소매를 끌어올린 후 재차 단단하게 틀어쥐는 아마데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그가 몸을 떨었다. 두려움과 무력함 사이를 오가던 음성이 점차로 쫓기듯 빨라지다가 아마데가 팔에 펜촉을 찔러넣는 순간 직격타를 입고 증폭되었다.
“날 따라오는 그림자 언젠가 날 죽이고 말 거야.”
진정되지 않는 숨을 격하게 내뱉으며 그가 찔린 팔을 부둥켜 잡았다. 팔에서 철철 솟구치는 피분수처럼 격양된 노래가 소름벽을 쌓았다.
거울을 깨부수고, 파편에 치여 제가 헤매는 와중에도 끝까지 펜을 놀리는 아마데를 보고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서슬 퍼런 검지가 아마데를 찍었다. 저 존재를 보라는 듯이.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 격양된 손짓에서 느껴졌다. 절정으로 수직상승하는 동력을 그가 오늘 아마데로부터 전해 받았고, 동시에 아마데에게 돌려줌으로써 무대를 함께 나누고 있음을.
나는 나는 음악. 나는 나는 음악은 볼프강이 음악 그 자체인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느끼는 한때다. 음악에의 황홀한 갈망, 순수한 생명력, 아직 세파를 타지 않아 무구하기까지 한 열정이 재능상자를 여는 순간 반짝이며 피어난다. 시아준수가 늘 영혼을 담아 표현해내는 ‘볼프강’의 감정들은 관객에게도 매번 설레는 황홀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오늘, 아마데의 얼굴에서도 볼프강의 감정을 보았다.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울림이 깃든 표정을 두 사람이 주고받았다. 받으며 공명했다. 볼프강과 아마데, 아마데와 볼프강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영혼인 것이 ‘두 사람의 호흡’을 통해 전달되었다. ‘혼자서’ 만들어냈던 호흡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무대.
아마데의 살아 숨 쉬는 반응에 실로 즐거워하며 생생하게 피아나는 시아준수를 보았다. 시아준수의 볼프강이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하게 웃고 있었다. 기쁘고도 즐겁게, 기꺼이 행복하게.
모차르트! 모차르트! 작곡하며 거의 울면서 뽑아내던 영감. 중압에 짓눌려 더딘 손으로 악상을 전해주면서도 질린 얼굴. 얼마나 더 주어야 만족하겠니, 묻는 듯하던 우는 눈이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얼마를 더 준다 한들 만족하지 않겠지. 아마데를 사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은 끝났다. 끝모르는 탐욕이 그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를 악문 그가 아마데로부터 깃펜을 낚아채듯 앗아 들었다. 매섭게 빛나던 아이의 눈이 그제야 재촉의 고삐를 늦추었다. 아득바득 휘갈기는 그의 등 뒤에서 아이가 그제야 웃었다. 포식자처럼 배부르게 웃는 아이를 등진 채로 그는 떨었고, 또 울었고, 그러면서도 버텼다. 버티고 버티며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늘어지고 마는 어깨.
스러져가는 그의 육신 너머로 재능이 다시금 눈에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모차르트의 죽음. 아마데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마이크도 차지 않는 아이에게는 대사 한 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아마데는 소리로도 연기했다. 말을 할 수는 없으니 몸을 써서. 팡, 팡. 두 주먹으로 피아노 의자를 아이가 연신 내리쳤다. 피아노에 기댄 그가 제 성화에 미동도 하지 않자 깃펜을 빼앗아 직접 써보았지만 고갈된 악상. 나오는 것이 없자 이번에는 두 손과 깃펜을 모두 써서 불만을 표했다.
팡, 팡, 팡. 전에 없는 소리였다. 지난 20일 동안 그 누구도 이런 성화를 부리지 않았다. 어떤 아마데도 소리까지 동원하여 여봐란듯이 그를 압박하지 않았다. 유난하게 빗발치는 성화에 그가 움찔대며 떨었으나 그뿐이었다. 남은 기력으로는 이제 뜻대로 운신하는 것조차 버거워진 탓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팡, 팡, 팡.
재촉하는 소리가 마치 임종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고요한 공간을 두드렸다.
실로 끔찍한 장면이었다.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아마데와 꺼져가는 볼프강. 사랑해 마지 않았던 음악이 그를 집어삼키는 광경은 잔인하리만치 적나라했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온통 그를 몰아세우는 것뿐인 공간. 사실적인 동시에 극적이었고, 그래서 끔찍했다.
당사자인 그는 오죽했을까.
“나는, 난, 음악…”
행복의 정점에서 불렀던 노래가 울음이 되었다. 마지막 음절은 쉽게 맺어지지도 못한 채 늘어졌다. 길게 늘어지며 왈칵 울음을 입은 음성에서 온갖 감회가 끓어올랐다. 회한, 자조, 후회, 서러움, 울분, 분노, 그리고 두려움.
“나는 내 자신 모든 걸 다 바쳤네, 또 주었네. 내 어린 시절, 그리고 나의 누나, 내 아버지, 나의 사랑.”
제 손으로 놓아버린 하나하나를 꼽으며 그가 숨을 삼켰다. 웅크린 그대로 흘긋 눈동자만 굴려 아마데를 보았다. 유난히 움츠러든 모습이 가여웠다. 슬쩍 아이의 동태를 살피는 그의 모습은 꼭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언제 다시 아이가 손을 팡팡 두드려댈지 몰라 불안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지만 어느 사이에 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가 되었다. 아마데의 그늘 하에 덩그러니 놓인 제 처지를 실감하는 등이 파르르 떨렸다. 명백하게 예감하고 있었다. 모든 걸 삼켜버린 재능이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를 원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마지막 남은 힘을 그러모아 그가 두 팔을 벌렸다. 품 안에 들어온 아이를 향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곧 나이고, 나는 곧 너.
섧은 울음으로 그가 체념의 웃음을 그렸다.
한 명의 사람으로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천재가 끝내 재능이라는 화마로 투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