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엮은 목걸이를 두르고, 시원한 아이스티 한 모금 걸친 채, 눈앞에서 한 방향으로 나란히 흐드러지는 야자수들.
기억을 헤아리는 잔잔한 그의 목소리를 따라 보라보라의 정경이 그려졌다. 기억을 옮겨온 듯이 고스란하게. 감탄했지. 시아준수는 왜 목소리도 좋으면서 묘사도 잘하지? 조근조근한 음성을 듣노라니 보라보라가 달리 필요치 않았다. 시아준수식의 묘사가 시아준수의 목소리를 만나니 내 귀에는 이곳이 바로 보라보라인 것을.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조금 달랐다. 여느 때와는 다른 까끌한 입자감으로 소리 전체가 서걱서걱한 게 아닌가. 절로 미간이 모아지던 차에 오늘의 목 상태가 화두에 올랐다. 컨디션을 핑계 대지 않는 성정상 이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드문 그이기에 적지 않게 놀랐으나. 아, 세상에. “여러분들 만나기 전에 가벼운 모습으로 보여드리겠다고” 미세먼지 틈바구니에서 조깅을 했다는 이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결국 목이 약간 갔다며 하하하 터트리는 까슬한 웃음소리가 더없이 달았다.
그래서 노래 대신 미니 토크 콘서트를 준비해온 사람. 노래는 어렵게 되었지만 이번 기회에 팬들이 그간 염원해온 토크 콘서트를 결행해 보이겠노라 한 그, 두 시간 아주 알차게 대화하고 갔다. 자신의 근황부터 팬들의 고민 상담, 소소한 궁금증 해결까지 남김없이. 스포일러를 좋아하지 않는 그가 ‘올해 두 작품’의 일정까지 얘기해주었으니 말 다 했지.
얼마나 달게 굴었는지 노래가 아쉽지 않았다. 사실 노래 빼고는 전부 있는 밤이었다.
완벽하게 건강하게 나왔다는 특급중요정보 건강검진 결과(밑줄별표) 부터 셋을 훌쩍 넘긴 지니타임: 미스트롯2에서의 범 내려온다가 본격적으로 강림하였을 때에도 몹시 기뻤지만 개인적 정점은 사쿠란보였다. 정확히는 사쿠란보 춤추기에 앞서 그가 출사표처럼 던진 말.
“여러분들의 소원이라니까 해야겠죠. 노래도 안 부르는데 이거 왜 못하겠습니까.”
오늘 못 할 게 없고, 못 말할 게 없다던 그는 이 밤의 기억 중에서도 역사로 남아 마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지. 세상에 수억의 미사여구가 있다 한들 당신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내 마음에 이렇게 진한 파동을 남길까.
내리 심장이 간지러웠다. 봄바람이 일어 마음 안쪽이 건드려지는 것처럼. 대화가 사소해질수록 바람결은 말랑말랑해졌다. 배달음식은 무엇을 먹는지, 육류파인지 해물파인지, 심지어 건강검진은 수면이었는지 비수면이었는지와 같은 얘깃거리들을 시시콜콜 풀어놓는 그는 물론 의도한 바 없었겠으나 꼭 나의 마음 한쪽을 녹여버리려는 사람 같았다.
같이 노래를 듣자는 사람이 쉴 틈도 없이 계속 말을 걸어오는 탓에 함께 듣기로 한 노래는 배경음악에 그치고, 사방이 온통 도란도란 잔잔한 말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을 때는 심장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닐 법한 주제에 이런저런 살을 붙여 도란도란 대화꽃을 피우는 밤.
노을 지는 해변가에 파도처럼 바람처럼 드리운 잔잔한 음성.
평화로운 우리만의 밤.
두 해 전 그가 디즈니 메들리를 흥얼거렸던 인스타 라이브의 밤이 떠올랐다. 그때 그랬지. “별 볼 일 없지만, 그래서 더 특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또 방송하겠다”고. 그날이 또 언제 올까 하였더니 오늘이었다.
인생 네 컷을 혼신을 다하여 인생 사진 네 장으로 만들어버린 사람.
1분 남짓의 범 내려온다를 꼭 타란탈레그라와 같이 완주한 나머지 끝나고 연신 가쁘게 숨을 들이켜던 사람.
라이브 방송의 클로징 멘트로 콘서트에 찾아온 관객에게나 건넬 법한 인사ㅡ“조심히 들어가세요~” 를 본능적으로 건네는 사람.
내내 그 자신이 팬들의 지니였으면서, 이벤트(준수의 모든 순간을 사랑해)를 보고는 또 빚을 졌다고 말하는 사람.
그런 당신과 함께였기에 더없이 특별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