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12월 12일 재연 엑스칼리버 총막공. 

 

도리안의 고향 땅. 5년 전 도리안 그레이 막공을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접점이 없어 이제껏 도리안이 마지막 기억으로 남은 곳. 성남아트센터에서 도리안이 아닌 시아준수라니, 기분이 이상하겠다 싶으면서도 웃어넘겼다. 공연장이 원래 추억을 쌓고 또 쌓는 장소임을 고려하면 도리안은 이곳을 충분히 독식한 셈이다. 5년, 거창하게는 반 십 년이다. 

 

간과한 게 있다는 걸 입장하며 알았다. 객석에 들어서자마자 훅 끼쳐오는 나무 냄새에 아차 싶었다. 농도 짙은 향기가 잘 여며둔 그리움의 빗장을 건드렸다. 덜컹대는 마음이 회장 안의 모든 것을 도리안의 부속품으로 인지하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한 손으로 내리기에는 다소 묵직한 의자도, 진한 나무 향도 모두 5년 전 그대로. 먹먹해졌다. 후각에서 되살아나는 기억이 선명할수록 더. 모든 것이 도리안을 품은 장소에서 나는 도리안이 아닌 존재를 보기 위해 앉아있었다. 

 

애쉬가 사라진 머리칼은 헤이즐넛을 부드럽게 두른 것 같았다. 나는 헤이즐넛의 향기를 잘 견디지 못하지만, 나무 향이 선사하는 기억 속에서 두 눈으로 색상을 음미하는 기분은 좋았다. 밝은색이 잘 어울리는 사람. 얼굴이 반짝거렸다. 왕관의 노란 빛과 거의 흡사한 밝기가 아더로서는 낯설었으나 시아준수 얼굴과의 어울림은 빼어났다. 도리안의 백금발도 이처럼 그를 위한 색이었다.

 

볼살이 다 사라진 얼굴은 어느 각도에서나 날카로웠다. 깎아내린 뺨에 그림자가 그림처럼 드리워졌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며 잔뜩 찌푸린 미간에 베일 것 같았다. 아더에게서 보는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신선했다. 마른 얼굴에서 예민함이 수시로 도드라졌다. 그 마름조차도 도리안 같았다.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까끌했다. 퍼석한 언제일까와 조심스럽게 공들이는 찬란한 햇살을 들으며 종일반의 무도함에 대해 생각했다. 자연한 일이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에서 기어이 목소리를 뚫어내는 그가 기이한 것이다. 절묘하기도 했다. 제 정체성을 모르고 살아온 아더가 처음으로 운명에 몸을 맡기고 결심을 세우는 순간도 이 넘버니까.

 

운명 앞에서 번뇌하는 아더의 사정과는 다르게 얼굴에는 번뇌가 없었다. 얼굴은 운명의 언질 없이도 처음부터 ‘귀하게만 자란 왕자’였다. 노을을 녹여 두른 듯한 머리칼은 그를 정말 그 시대 영국인처럼 보이게 했다. 고풍스러웠다. 정말로 아더가, 도리안과 형제 같았다. 같은 땅에서 같은 피를 나누었음을 증명하는 듯한 예쁨이 형형했다. 평복하고서도 귀한 태가 감추어지지 않았다. 조용하고 한적한 장원으로 옮겨 편부 슬하에 숨겨 키운 게 무색하게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왕이 될 재목의 얼굴이었다. 

 

나무 향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암전될 때면 번번이 코끝을 간질이며 그 존재를 인지시켰다. 너와 나눈 순간 모두 소, 중, 해.. 어둠 속 가녀린 음성에 나무 냄새가 감돌았다. 도리안이 저렇게 운 적이 있던가. 적어도 당장의 기억에는 없다. 그 아이는 죽는 순간까지 그저 필사적으로 예뻤다. 아름다움이 제 존재의 이유라서 절박하리만치 예뻤다. 장식 없는 하얀 옷만 입고도 빛이 났다. 

 

엑터의 환영이 몰고 온 빛 속에서 아더 역시 빛보다 빛이 났다. 새하얀 조명 아래 황금빛 넘실이는 머리칼의 그가 연한 갈색 눈을 글썽거렸다. 금발에 가까운 얼굴에 또렷하게 박힌 브라운 아이즈. 연갈색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투명했다. 순도 높은 선의로 빚은 얼굴이 아름다웠다.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두른 도리안이 갖지 못한 단 하나. 심혈을 기울여 왼블을 사수한 보람이 있었다.

 

예뻤다. 밝은 머리를 한 예쁜 얼굴이 도리안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빛으로 곧잘 웃었다. 맑게 웃고, 개구지게 웃고, 선하게 웃었다. 나무 뒤에 숨어 기네비어를 훔쳐보는 눈동자가 총기 있게 반짝댔다. 맹세하는 친구들을 향한 얼굴에 감동이 햇살처럼 어렸다. 얼굴만으로 모든 사랑에의 이유가 종결되었다. 그 하나가 도리안과 닮았다.

 

예쁜 얼굴로 선하게 갈등할 때, 그때가 가장 도리안과 멀었다. 결국 왜 여깄어였다. 툭 찌르면 바르르 떠는 도리안과 달리 폭언에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전부 내버리는 도리안과 다르게 그는 끌어당겨 품었다. 예민미가 도드라지는 마른 얼굴을 하고도 도리안과 대척점에 있었다. 자기파괴적이지 않았고, 선했다. 찡그린 얼굴마저 결국 단정했다.

 

그러나 끝내 왕이 된다는 것에서 도리안을 목도했다. 이전까지는 딱히 의식도 하지 않았던 공통점이 하필 이 무대라서 보였다. 한때 도리안이 무대 깊은 안쪽에서부터 녹턴과 함께 걸어 나왔던 이곳이라서. 전주가 마치 녹턴처럼 흘렀다. 안쪽에서부터 걸어 나오며 그가 밟는 저 땅을 도리안도 밟았었다. 녹턴에 왕이 된다는 것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재연이 요원하여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처럼 새하얗기만 하던 도리안의 마지막 기억 위에 다른 이의 발자국이 겹쳐졌다.

 

먼 곳에서는 그림자 져서 어둑했던 머리칼이 점차로 연한 색을 입어가다, 완전한 노을빛으로 되돌아왔을 때에서야 도리안의 환시를 놓았다. 점등하는 바닥 조명처럼 마음의 각오를 일으켜 세우는 그가 도리안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예뻐도, 저 곧은 심지는 오직 왕이 된다는 것만의 것이었다.

 

돌아나오는 길에 다시 한 번 도리안을 묻었다. 총막임이 무색하게도 아더와의 안녕은 이별이 되지 않았다. 

 

아더로서 ‘세종에서 또 보자’ 그가 말했다.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세종에서는 도리안의 환영을 걷어낼 수 있을 테니. 도리안에게 성남이 고향 땅이라면, 세종은 시아준수의 시작의 땅이다. 그곳에서의 해후에 도리안이 둘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세종에서는 ‘아더’와 재회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오늘의 안녕은 도리안의 몫이었다. 성남에서의 총막이 실은 ‘잠시만 안녕’인 것도, 세종에서 곧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도. 전부 도리안의 몫이 아니다. 기약 없는 도리안과는 다른, 아더만의 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