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열두 번째 공연
예의 죽든 살든 타이밍. 오, 오늘 토니 녹록지 않았어요.
“뱃속부터!”
시동 거는 리프를 바로 받아주지 않았거든요.
“넌 그게 그렇게 좋냐.”
받아주는 대신 핀잔을 한 번 건네는 거 있죠. 여기서 토니가 먼저 애드립을 하다니! 토니발 애드립이 온 것도 기쁜데, 이 애드립이 또 얼마나 찰떡이었는지 몰라요.
이 구호, 토니가 한참 제트에 열중하던 시절의 유산이잖아요. 쉬이 응해주지 않고 한 발 빼는 태도에서 제트파 샤크파 놀이 자체를 그만하고 싶은 토니 마음이 확연하게 들여다보이더라고요. 우리 토니, 갱생 의지가 진짜 진짜구나 싶어서 찡해졌지 뭐예요. 애드립 하나로 첫 등장에서 토니의 포지셔닝을 확고하게 하면서, 지켜보는 마음까지 애틋하게 만들어버리는 천재가 오늘 무대 위에 있었어요.
Something’s coming, 16일에 이어 고공행진을 이어간 토니의 첫 넘버.
음을 던지면 곧바로 노래가 돼요. 척하면 착이에요. 던지면 백발백중인 다트를 하는 것 같아요. 모차르트가 악보 위에서 음표로 장난을 치고 놀았다면, 샤토니의 놀잇감은 박자예요. 보일 듯 말 듯 잡아서 걷으면, 특히 여기요. 어떻게 시작해도 어떤 컨디션 하에서도 오케스트라와 기가 막히게 맞물려요. 신기할 정도로요.
댄스파티
순항하는 듯한 댄스파티였으나 그만 베르나르도에게 시비가 걸려버린 토니. 중립지대인 체육관에서 불편한 소요가 이는데 그 중심에 토니가 있자, 저 멀리에 있던 리프가 금세 토니 곁으로 바싹 다가와요. 이때 정택운 리프는 유독 토니를 엄마 오리처럼 챙기는 편이에요. 오늘도 그래요. 괜찮냐고 한 번, 두 번 재차 확인하는 것도 모자라서 두 손으로 어깨 잡고 눈동자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상태를 투시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온통 마리아만 눈에 담던 토니도 리프를 마주하고 제대로 웃어주었어요. 괜찮다고, 웃으면서.
토니가 웃으니까 리프도 그제야 안심하고 표정을 풀어요.
여기, 체육관의 소란한 틈바구니에서 둘이 별말 없이 서로를 챙기는 이 장면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Tonight
이 극의 음악은 참으로 놀라워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사람의 음성 등 극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일제히 숨 죽이며 사그라들었다가 다 함께 포르티시모를 향하여 나아가는 전개를 어쩌면 이토록 아름답고 장중하게 그려낼까요.
투나잇도, 썸웨어도요.
거듭 듣노라니 서서히 번스타인의 다른 음악도 궁금해지고 있어요. 더불어 이룰 수 없는 바람이지만, 작곡가가 살아서 시아준수를 만났다면 어떤 음악을 써주었을지..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을 때의 작업물을 상상하게 되는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닌 걸 알아요.
“기다려”
대체 기다리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좋아요? 고개 픽 숙이더니 마이크에 담기도록 힛 웃을 정도로 좋았어요? 이렇게 선명한 웃음소리는 처음이라 새로웠어요.
헤어질 때 이마키스를 받고 좋아서 아랫입술 지그시 깨어 물 때도 소리 나게 헷 웃었죠, 토니?
오늘 달나라 여행하고 온 사람이 어떤 건지 정말 제대로 보여주었어요.
닥 아저씨네 가게
어제는(12/16) 계단으로 자리를 이동하는 토니가 제트와 샤크의 말썽에서 발을 빼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오늘은 또 느낌이 달랐어요.
오늘은요, 오히려 자신을 단속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층에서 인내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자신을 현장으로부터 격리하지 않으면 사고를 칠 것 같아서 아예 같은 층에서 벗어나 버린 거지요. 실제로 오늘은 다른 어느 날보다도 슈랭크 경위 쪽으로 시선 자체를 두지 않았어요. 쳐다도 보기 싫다는 듯이요. 슈랭크 경위가 기어이 토니의 시선을 끌어낸 순간은 깡패 타령이 나왔을 때예요. 내 친구들에게 깡패라니! 말없이 얼굴로 발끈하는 토니가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웨딩숍
붕 뜬 대자점프가 공중에서의 360도 턴으로 진화했어요! 어머나, 몸을 공중에 높이 붕 띄워서 마치 발레의 턴을 하듯 각 잡고 호로록 도는데 얼마나 근사하던지!
Ond Hand, One Heart
오늘 마리아와 얽히는 화음 중,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지수 마리아의 소리는 간헐천에서 솟구치는 물줄기처럼 굴절 없이 또렷하고 때때로 맹렬한데요, 그 물기둥의 둘레를 타고 타고 빈틈없이 감싸 오르는 소리가 바로 우리 토니의 소리예요.
‘사-랑’의 합창은 두 소리가 엮이는 절정부를 이루었어요.
두 마리아와 토니의 극 중 듀엣이 이 넘버에서 가장 다른 양상의 합일을 보여주는데, 각기 다른 조화로움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몰라요.
The Rumble
아니 임정모 베르나르도… 저 멀리 밀쳐진 토니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니까, 무슨 어린애와 눈높이 맞추는 것처럼 허리 반으로 접어 토니와 눈 맞추고 약을 올리는 것부터 어 오늘 좀 못 됐다 싶었거든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아예 토니 등 뒤로 돌아가서 양손으로 귓바퀴를 잡고 농락하는데 허. 너무.. 양아치 같았다.. 너무 못 됐다!
이 농락들은 대체 뭐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드라큘라에게 당한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요? 한참 발끈해있는데 마치 제 마음의 소리처럼 터져 나온 리프의 목소리.
“토니, 뭐 하는 거야!”
속 터지는 리프 마음이 딱 제 마음이었어요.
보다보다 결국 참지 못한 리프가 울화를 터트리면서 토니를 한 번 똑똑히 노려보고 대신 나서는데, 얼마나 전력으로 열받았는지 냉장고만 한 덩치를 향해 앞뒤 잴 것 없이 무작정 달려들더라고요. 오늘의 리프를 온 마음으로 응원했답니다.
1막의 엔딩. 오늘은 얼굴을 꽤 빨리 들었어요. 그래서 선명한 이목구비가 볼륨을 따라 음영지는 모습이 단계별로 고스란히 보였어요. 코, 광대, 입술… 차례로 어두워지는 모습이 마치 서서히 절망의 수렁에 삼켜지는 토니의 심정 그 자체인 듯하여.. 모든 종소리가 멎은 후에도 눈앞에 어른어른했어요. 어둠 속으로 페이드아웃 되던 그 아름다운 얼굴이요.
Somewhere
썸웨어에 막 도달했을 때 토니와 마리아를 맞이하는 처음 다섯 명의 요정이요. 다섯 명이 모두 키도 똑같고, 자그마하게 소중한 느낌이 마치 매일 아침에 가장 처음 맺히는 이슬을 먹고 사는 은방울꽃의 요정들 같아요. 토니와 마리아의 가장 순수하고 여린 영혼들인 거죠.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밝은 곳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근원적인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참 좋은 거 같아요. 토니와 마리아는 물론 무대 바깥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위안이 되거든요. 썸웨어의 다섯 요정은, 그런 존재인 거 같아요.
닥 아저씨네, 오늘은 지퍼 닫다 무려 후진을 했어요. 손가락 하나 길이 정도 쭉 밀어 넣었다가 막히니까, 반 마디 정도 뒤로 물린 일보후퇴가 얼마나 귀엽던지.
Finale
치노를 찾아 헤매는 토니. 오랜만에 오른 어깨가 훤히 젖혀졌어요. 피로 얼룩진 차림새를 하고 잔뜩 흐트러졌을 때 그 처연함이 얼마나 폭발하던지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예쁘다, 이 모습이 영원히 유형의 기록물로 남았으면 좋겠다.. 하고요.
이왕이면 움직이는 영상이면 좋겠어요. 어둠 속의 숨 막히는 고요를 깨는 단 하나의 소리가 토니의 울부짖음인 여기 이 장면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으니까요.
내내 비통한 애원이었다가 마리아를 발견하고 삽시간에 환희로 탈바꿈하는, 그러나 온전히 기쁨의 색으로 물들기 전에 꺾여버리고 마는 생명을.. 얼마나 생생하게 전달하는지 몰라요.
그리고요. 토니가 총격당하는 그 순간, 공연마다 꼭 근처에서 몸을 떠는 관객을 만나요.
토니의 비통한 애원을, 그러다 마리아를 발견한 기쁨을 마음으로부터 따라가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반응이지요.
오늘도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랑의 기쁨과 절망을 가장 빛나는 청춘으로 표현해준 토니에게, 깊은 박수를 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