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주의 첫 공연이자 애드립의 하루였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열세 번째 공연

 

“지금 당장 우리 집에서 방 빼도 돼.”

오늘 유독 여기 ‘지금 당장’이 웨딩숍 느낌이 나서 남다르다 싶었거든요. 근데 이게 애드립 파티의 예고장이었을 줄이야. 

 

오늘 정말 엄청난 신규 애드립의 향연이었어요. 포문은 예의 구호가 열어주었어요. 

“뱃속부터!”

오늘도 호락호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토니가 주문하기를,

“야, 그거 말고 좀 신박한 거 없냐?”

리프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어요.

“그럼 니가 만들어봐!”

이제 여기서 대체 뭐가 나올까 싶었거든요. 뭘 준비해온 걸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싶은 순간 토니가 나지막하지만 야심 차게 손바닥 내밀며 자기 카드를 꺼내는 게 아니겠어요. 

“캐딜락 타든”

토니가 정말 준비해왔을 줄 몰랐던 거겠죠? 정택운 리프의 도르륵 도르륵 눈동자 구르는 소리가 대략 5초간의 침묵 속에서 얼마나 크게 들렸는지 몰라요. 선공해놓고 응답을 기다리는 토니의 어깨는 또 얼마나 솟아있었는지. ㅋㅋㅋ 하지만 그 토니에 그 리프라고 역시 죽이 제법 잘 맞는 친구인 거예요. 

“…깡통 차든”

죽든 살든 얍!

얼결이었지만 훌륭하게 완성된 오늘의 새 구호.

토니도 꽤 만족스러웠나 봐요. 감탄한 듯이 덧붙였어요. 

“어우 제법이다 너?”

그리고 이게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공연 애드립의 신호탄이었어요!

 

 

웨딩숍으로 바로 넘어가 볼게요. 

오늘 과연 공중턴을 할까, 했는데요. 아니 세상에. 붕 뜬 기분에서 마리아와 만났을 때의 꿈결 같은 무릎 돌리기를 하지 뭐예요? 붕 뜬 기분을 외치지 않고 나긋하게 말하는 것도 새로운 충격인데 무릎 공격이라니. 허. 예상치 못한 불시의 애드립에 객석이 수런대는 느낌, 오랜만이라 무척 즐거웠어요. 

 

“아버님, 따님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아버지 역 마네킹 옆에 선 마리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원래라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상기된 표정으로 허락하신대! 소리 높여야 하는데,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라고요. 그러더니 글쎄. 

“너 하는 거 봐서래”

라는 게 아니겠어요?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심장이 맹렬하게 뛰는데 토니가 기어이 제 귀에 대고 종을 치지 뭐예요. 

“제발요. 포르 파보르.”

허허. 시아준수의 ‘제발요’를 현실로 듣게 되다니요. 대체 오늘 무슨 작정을 한 거예요? 왜 이렇게 모두들 신이 났지요? 웨사스팀이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주의 첫 공연이라 모두 이렇게까지 즐거운 건가요? 크리스마스의 뉴욕에서는 모두가 행복해야 하니까요? 그런 거라면 정말 고마워요. 

 

 

 

그러면 이제 오늘의 장면장면에 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오늘의 애틋함은 제트송에서부터 왔어요. 리프가 노래를 시작하자 제트 아이들이 대번에 눈을 반짝이며 웃더라고요. 샤크와 치고받고 싸우던 말썽꾸러기들이 자기들끼리 뭉쳐있을 때는 뾰족한 마음 무장해제하고 해맑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울컥하더라고요. 토니와 함께했던 시절엔 더욱이나 웃음이 끊이질 않았겠죠. 그도 그럴 것이 토니가 있는 제트야말로 완전체의 대문자 J인 거잖아요. 

 

 

Something’s coming

오늘의 구간은 난간 위에서의 두 음절. ‘혹-시~’ 여기 얼마나 부드럽고 은근하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채근하는 음성이었는지 몰라요.

 

 

Tonight

마리아를 부르는 토니. 쉿! 하는 꾸지람에 분명 공연 초반에는 손바닥으로 입을 텁! 틀어막았었는데요. 요즘은 계속 검지로 쉿! 손동작을 하네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는 동작 언제 다시 보여주실까요? 저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요, 토니. 

 

 

그리고 쿨부터 원핸드까지는 오늘 시야에서 허락된 미장센을 꼭 기억하고 싶어요. 

 

사이드 앞열은 처음이었거든요. 충무아트센터는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굉장히 좁고 극장도 작기 때문에 좌우 구역 앞 열은 극사이드가 아니어도 한껏 치우친 시야로 무대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 덕분이었어요. 

사선으로 치우친 시야로 담는 무대가 너무너무 예뻤어요. 오블에서 반대편인 무대 왼쪽을 바라볼 때, 양 사이드의 조명이 무대를 향하여 비스듬하게 쏘아지는 광경이 굉장히, 굉장히 아득해요. 공기 중에 부서지는 조명만도 충분히 아스라한데 배우들이 무대 끝으로 가서 그 조명을 만나면.. 그냥 서 있는 그 모습 자체로 천상계 효과가 완성돼요. 

쿨에서 춤추며 조명 속에서 흐려지던 인영들, 썸웨어에서 역광에 부서지던 토니의 말간 얼굴…

무엇보다도 원핸드의 토니요. 사선으로 쏘아지며 공간을 희뿌옇게 장식하는 순백의 조명 속에서 아스라해지는 그 얼굴이 진정 그림이었어요. 간직하고 싶었다…

쇼노트, 옆에서도 찍어주세요. 같은 장면이어도 각도를 달리하여 샅샅이 남겨줘요. 이 얼굴, 이 계절, 이 순간의 시아준수를 영원히 남겨야 한다고요. 사명감을 가져요, 제발요. 

 

 

닥 아저씨네 가게

층계참의 토니. 오늘은요, 계속 친구들을 살피는 토니를 보았어요. 깡패 타령에 굳은 기색으로 흠칫하더니 곧장 친구들의 기색부터 살피더라고요. 제트 아이들이 슈랭크 경위의 도발에 넘어갈까 봐, 그래서 허무하게 인생 꼬일까 염려하는 리더의 얼굴을 보았어요. 친구들아, 우리 토니 마음이 이런 거양. 

 

 

웨딩숍

애드립은 아니지만 귀에 유독 남았던 대화. 

“토니, 너도 그 싸움 갈 거야?”

“아니?”

“그래?”

이지수 마리아, 토니가 부정하자 오늘따라 굉장히 의외라는 뉘앙스의 ‘그래?’는 뭐였어요? 우리 토니 갱생했다니까요!

 

 

The Rumble

아니 임정모 베르나르도, 오늘은 토니 엉덩이를 톡 친 게 맞나요? (닥 아저씨가 어쩐 일로 샤크 아이 엉덩이가 아니라 테이블을 툭 치고 가시나 했더니.. 베르나르도가.. 토니를..) 샤크는 그걸 보고 저들끼리 낄낄댄 거 맞죠? 무슨 좋은 구경났다는 듯이?! 깐족대며 울겠다 울겠어 약 올리는 건 또 뭐람..? 이 친구들 참 날이 갈수록 못되지네.. 

오늘도 속 터지는 리프가 곧 저였습니다. 저런 애랑 대체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토니는 자꾸만 말을 거는 거예요. 

“하지 말라고.”

나직한 경고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어요. 

토니, 포기해. 이 친구는 반헬싱 같은 친구예요. 불통이야. 대화의 의지가 없다고요!

제 속이 얼마나 답답하던지.

언제쯤이면 리프가 나타나서 베르나르도를 응징해줄지 손꼽아 기다리는 스스로를 느끼며 저도 얼추 제트가 다 된 건가 싶었어요.

미안해요 토니. 저는 여기서 1215퍼센트 리프의 편이에요. 

 

 

2막, 마리아의 방. 호다닥 옷 챙겨입고 발동동. 안절부절못하며 방안을 왔다갔다 하며 종종걸음 하는 게 너무 안쓰러워요. 그럼요. 두렵겠지요. 썸웨어가 허락한 찰나의 안식이 끝난 지금, 다른 누구 아닌 베르나르도의 연인이었던 아니타에게 발각되면 벌어진 일에 대한 결괏값을 제대로 마주해야만 하는걸요.  

 

 

닥 아저씨네서 멀리 떠날 준비를 하는 토니. 그런데 저 오늘은 지퍼의 비명 소리를 들은 거 같아요. 두둑 두둑 고통을 호소하다 못해 이만하면 되었으니 제발 죽여달라던데요..?

 

 

Finale

뒤늦게 달려온 슈랭크 경위, 널브러진 토니를 발견하고 허탈하게 멈추어 서더니 제트와 샤크를 번갈아 보는데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봐버렸어요. 그리고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감정과 조우했어요. 

슈랭크 경위에 시선 속에 담긴 ‘이 녀석들이 기어이..’ 하는 그 빤한 기색에서 대체 왜 제가 울컥해버린 걸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시선에 맞서서 이 아이들을 위해 항변하는 제가 있었어요. 

누구도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닌데 모든 일이 벌어져 버린 것을 어쩌나요. 이 아이들이 어찌하기도 전에 세상은 이미 엉망진창이었잖아요, 하고요. 

 

참 신기한 일이에요. 

매회 거듭할수록 이 극이 저를 사로잡아가는 힘을 생생하게 느껴요.

주연 배우를 사랑하기에 작품에도 애정을 갖게 되는 것 말고, 극 자체가 자꾸만 살아서 저에게 다가와요. 기쁘면서도 어리둥절해요.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지만 실제로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어요. 

기적처럼요. 

저의 영원한 주연, 그러니까 시아준수를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 결로 그가 참여하는 작품을 사랑할 수 있다는 축복이 허락된 거예요.

그러니 이 극의 계절, 오직 사랑으로 채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