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열여섯 번째 공연

 

오늘의 갈망은 제트송에서. 

 

“에이, 세상에 제트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확신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 베이비존이 귀엽다는 듯 웃는 리프를 보는데 또 불현듯 상상되는 거예요. 우리 토니는 베이비존을 얼마나 귀여워 했을까요. 리프도 동생처럼 아껴주는 우리 토니가 막내들은 또 얼마나 귀히 여겨주었겠어요. 어디 쿠키 영상으로라도 토니의 제트 시절을 볼 방법은 정녕 없을까요? 대문자 제이 그리는 토니.. 너무 보고 싶어요..

 

 

배나라 리프와의 오프닝. 

산만 해졌다는 베르나르도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품는 두 사람. 토니가 먼저 규명해보기를,

“닭가슴살 먹은 거 아냐?”

거기다 대고 소고기도 먹었을 거라며 거드는 리프. 역시 두 사람 장단이 잘 맞는다니까요. 

 

쿵짝뿐일까요. 오늘따라 치대기는 왜 그리 치대던지. ㅎㅎ

너 없으면 절대 안 된다며 유독 질척이지 않겠어요? 양팔로 토니를 한가득, 힘주어 끌어안자 비죽 솟던 토니 미간. 

“왜 이래 이거.”

뭐 잘못 먹었나, 하는 토니의 눈빛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리프. 티격태격하는 게 가히 창과 방패의 대치였어요. 

 

“뱃속부터!”

여기, 토니는 구호보다도 제스처가 낯부끄러운가 봐요. 

“나 그거 진짜 제스처 바꿀 때까진..”

피력하는데 무작정 밀어붙이던 리프. 그리고 그 기세에 밀려 그만 죽든 살든 얍! 구호에 동작까지 합 맞춰버린 토니. 일은 저질러졌고 부끄러움은 찾아오고.. 낭패감 서린 얼굴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어요. 

“아무도 안 봤겠지 이거..?”

하면서요. 

 

몇 시? 열시! 의 확인까지 야무지게 받아내고 소기의 목적 모두 달성한 리프가 폭풍처럼 왔다 갔습니다. 한여름의 호우처럼 몰아치던 리프가 퇴장하고 나니 토니, 그제야 당한 느낌이었을까요. 떠나고 없는 등에 대고,

“아 근데..!”

뭐라 더 말하고자 덧붙였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어요. 

 

 

댄스파티에서요. 푸에르토리코 군단의 맘보에 맞서서 제트들이 자켓도 벗어던지고 본때를 보여줄 때가 토니의 등장 시점이라서 그런지, 우리 토니만 자켓 갖춰 입고 타이 제대로 맨 반듯한 차림새인 게 오늘따라 돋보이지 뭐예요. 살펴보면 분명 다른 아이들도 몇몇은 타이 단정하게 매고 조끼도 잘 갖추어 입은 게 보이는데 왜 우리 토니만 각 잡고 반듯한 차림새인 것처럼 보일까요? 우리 아이 마음가짐이 다른 게 겉으로 표가 나서인가?

 

 

토니와 마리아, 첫 댄스 이후 마주할 때.

“아니면 우리가 원래 알던 사이라고 생각했나?”

서로 이름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한 마디씩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에서요. 

토니 마리아와 뒤편의 세 커플을 함께 보면 재밌어요. 두 사람이 한 마디씩 나눌 때마다 커플들의 팔이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반시계 방향으로 한 번씩 배배 꼬이며 얽혀가는데 그게 꼭  두 사람의 심박이 얽히며 합체되어 가는 과정처럼 보이거든요. 대화를 섞을 때마다 저 둘, 지금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게 해요. 

 

 

Tonight

“갈게, 잘자.”

여느 날의 대사는 이러했는데요. 오늘은 갈게, 를 남겼던 시점에서 마리아를 그윽하게 보는 거 있죠. 말 한마디 더 하는 시간도 방해된다는 것처럼 마리아만 눈에 한가득 담다가, 아쉬움 가득 담아 나직하게 ‘잘자’만 하더라고요. 발길 떨어지지 않는 아쉬움이 토니 얼굴에서, 목소리에서 선명하게 전해졌어요. 

(정정할게요. 공연 초반에는 갈게, 잘자를 전부 다 하는 날이 있었으나 보통은 ‘잘자’만 남기는 편이었어요. 오늘은 잘자를 남기기까지의 침묵이 좀 길어서, 매우 그윽한 느낌을 주었고요.)

 

그리고요. 샤토니가 브라운 헤어가 되어 마리아와 토니의 머리색이 꼭 같은 거, 어째서 봐도봐도 마음을 간지럽게 할까요? 엑스칼리버 당시 아더와 기네비어가 꼭 같은 금발일 때도 마음을 일렁이게 하더니 이번에도 그래요. 머리색이 같다고 사람 고유의 색까지 같아지는 건 아닐 텐데, 토니와 마리아.. 둘이 너무나 닮은 느낌.. 갈색 머리 둘이 머리 맞대고 꽁냥대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애틋해요. 

 

 

닥 아저씨네 가게

“정정당당히 해.”

주먹 불끈 쥐고 엄포 놓으며 제안하는 토니를 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픽 웃는 임정모 베르나르도. 토니 주먹 옆에 자기 주먹 가져다 대는 게 아니겠어요? 빈정거림 곁들여 토니 대사를 따라 하면서요. 

“그래, 정정당당히.”

나란한 주먹의 크기 차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네, 니 주먹 크네요 정말.

(임정모 베르나르도의 깐족 레파토리가 매일 참 다양한데, 토니랑 죽든 살든 구호를 하면 엄청 다채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어요.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그나저나 오늘 토니, 에이랩 귀를 만져주는 것 같던데 상냥해라.. 라고 감탄도 잠시. 반대쪽이라고 해서 머쓱해졌네요. ㅎㅎ

 

 

웨딩숍

토니와 마리아, 꽁냥거림 스킬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요. 새로웠던 건 1차 꼬집기 시도가 마리아의 블로킹에 무위로 돌아가자 2차로는 오른손 검지로 마리아의 콧등에 대고 코코코를 시도했다는 거예요. 이 시도도 물론 막혔지만, 공중에 붕 떠 있는 검지가 웃고 있는 걸 제가 분명 봤어요. 

그렇게 좋은지 원. 

 

 

Tonight (Quintet and Chorus)

굉장히 ‘마티네스러웠던’ 퀸텟이에요. 시아준수의 마티네라 하면 안정적인 조화로움이 돋보이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오후의 공연을 의미하는데 딱 그 표본이 될 법한 합창이었어요. 제트도 샤크도, 오케도, 토니도!

모두가 같은 타이밍에 강세를 주었다가 물러나고, 각기 다른 바람이 저마다의 염원의 크기로 합창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어요. 

샤토니의 마지막 마티네를 장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The Rumble

디젤을 뒤로 물리며 ‘제발’ 하는 토니의 육성을 들었어요. 마이크를 타지 않아 속삭임에 가깝게 들렸는데 그 작은 음성을 듣는 순간.. 어떻게든 이 싸움을 막으러 온 토니 마음이 절절히 이해되지 뭐예요. 

어제만 해도 리프가 이 불편한 대치를 끝내주기만을 기다렸는데, 오늘은 애쓰는 토니 마음 몰라주는 양측이 야속했어요. 

게다가 임정모 베르나르도가 갈수록 못되게 굴어요. 

골반은 왜 자꾸 건드리며, 건드려놓고 샤크 저들끼리 낄낄대지 않나, 심지어 오늘은 토니 보고 눈 똑바로 뜨래요!

“너 눈 똑바로 떠.”

우리 토니처럼 눈 반짝이는 아이가 어딨다고. 말이면 단 줄 아나. 

 

그래서 오늘은 리프가 나설 때, 리프를 응원하는 마음보다도 저 모든 행패를 견뎌낸 토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싸움으로 번진 상황이 몹시도 안타까웠어요. 

조금만 귀 기울여주지. 

하지마, 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토니에게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물어봐 주지.. 하면서요. 

 

 

싸움 후, 베르나르도의 주검 앞에서. 

가까스로 베르나르도 앞까지 다가갔다가 털썩.. 무너지며 토니, 왼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했어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절로 손이 그리로 향한 것 같은 동작이었는데, 그조차도 얼마 하지 못하고 ‘마리아’를 찾으며 절망해요.

 

간신히 내뱉는 ‘마리아’는 나날이 고통스러운 울음이 되어가요. 가여운 흐느낌이 아니라, 왈칵 솟구치는 울음덩어리처럼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 절망이 뭉텅이로 쏟아져요. 

 

 

2막, 마리아의 침실 안까지 잘 들어와 놓고 정작 ‘마리아’를 부르지는 못하고 가만 서서 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우리 토니..

살인자, 살인자!

말마다 처참해지는 얼굴.. 마리아의 처분에 자신을 내맡긴 채로 토니가 덩그러니 서있어요. 

이렇게 정직한 아이에게 운명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원망은 제 몫이에요.  

 

 

Somewhere

썸웨어에서 이지수 마리아가 ‘치노’ 를 부르는 입 모양을 보았어요. 하얀 옷의 치노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벙긋하더라고요. 

단 한 마디였는데, 작지 않은 충격이었어요.

마리아가 ‘치노’라 인지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저 존재는 치노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무엇이 아니라 치노인 동시에 썸웨어의 염원이라는 의미잖아요.

실제로는 토니 잡겠다며 혈안인 치노가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파랑새로 분하는 게, 진정으로 극이 의도한 역설이 맞다는 거고요.

이 사실을 깨우치고 보니.. 

치노 뿐만 아니라 썸웨어의 모든 요정들이 곧 샤크이자 제트인 동시에 썸웨어에서 자신들이 소망하는 형상 그 자체인 것이라..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가 없더라고요. 

토니와 마리아만이 아니라 제트와 샤크 모두 썸웨어라는 염원을 간직한 채로 1950년대의 뉴욕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모두의 염원이 담긴 합창의 다음 장이 악몽이에요.

그것도 현실 그대로의 악몽이요.

리프가 베르나르도의 칼에 맞는 것도, 토니가 베르나르도를 응징하는 것도, 토니와 마리아가 서로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마는 것도 전부 현실 그 자체인데 이것이 곧 악몽이고 또한 썸웨어의 맺음말이에요. 

 

어쩌면 이토록 장중한 비극인지. 

이 극이 당대의 사건이자 역사였더라는 걸, 이제는 온마음으로 이해해요.

 

웨스트사이드스토리라는 극이 오빠를 찾아왔다는 것에, 오빠가 이 극을 선택하였음에 감사하게 되는 또 하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