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스물두 번째 공연

 

이런 일이 다 있네요. 스피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피트로부터 가냘프게만 올라오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이어지는 리프의 오프닝 안무. 연주보다 사람의 발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공간에서 도르륵 굴러가는 제트 아이들의 눈동자. 액션, 베이비존, 에이렙.. 제트 모두가 합류하여 군무가 될 때도 소리는 없었어요. 지상 아래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너무나 미약했고, 공간은 적막으로 가득했어요.

 

그곳에서 제 발소리를 연주 삼아 비행하는 아이들을 봤어요. 

마이크 타지 않아도 객석에 전달될 수 있도록 평소보다 훨씬 더 크게 소리 내 베르나르도를 비웃던 액션,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무대감독이 선행 조치로 조명부터 내렸는데 그 불빛이 다 꺼져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춤을 추던 샤크.

 

소리도 불빛도 없는 깜깜한 무대로부터 들려오는 발소리에서,

소리 없이 결연히 비행하던 제트에게서,

객석 모두가 단 하나의 마음을 전해 받았어요. 

 

소리가 없다면 춤으로라도 이 무대를 다 채우겠다는 진실함이요. 

‘노래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에는 춤을 춘다’는 말의 참뜻을 실제로 목격한 거예요.

 

공연 재개를 기다리는 30분이 억겁 같았어요. 무대가 파할까 염려해서가 아니라, 소리 없는 무대에서도 춤이라는 언어 하나만으로 공연을 채워갔던 이들이 돌아와서는 대체 어떤 공연을 보여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요. 

기합, 각오, 절실함. 

제가 객석에서 그 모든 것을 곱씹는 30분 동안 무대 건너편의 이들도 그러하리라는 걸, 그냥 믿게 되더라고요. 

 

30분 후 재개된 공연. 제트의 휘파람 신호가 여느 날처럼 유려한 음으로 공연의 첫머리를 알려왔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객석이 전하는 격려의 박수가 그 휘파람을 한가득 감싸 안고 있었다는 거예요. 

격려의 박수를 환호 대신 전하는 객석을 앞에 두고, 비로소 진짜 무대가 시작되었어요.

 

배우는 물론 관객까지ㅡ무대를 채우는 이들 모두가 공연을 사랑하여 소명을 다하였던,

그렇기에 사랑받아 마땅한, 웨스트사이드스토리요. 

 

*

 

토니의 등장은 장면과 장면을 지나야 이루어지기에 평소보다 오빠를 만나기까지의 시간이 길었어요. 그건 오빠도 그랬나 봐요. 오늘의 토니, 완벽함에 정석을 더한 버전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리프와의 애드립부터요. 애드립은 극에 감칠맛을 더해주지만 가미되는 요소인 만큼 때에 따라서는 흐름을 깰 수도 있잖아요. 그걸 최대한 걷어낸 대사들로 원형 그대로의 리프와의 오프닝 장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어요? 애드립에 들어가는 공수를 최대한 줄이고 원래의 대사들로만 빽빽하게 장면을 채우며 객석의 집중도를 쥐락펴락했어요.

 

하지만 참 와중에도 상황이 돕는 사람, 무대가 사랑하는 사람. 

의외의 이벤트를 무대가 만들어 주었어요.

“가서 제트애들이랑 놀아.”

투덜대는 리프를 지나쳐 페인트통에서 붓 꺼내어 들고 사다리에 올라야 하는데, 그만 통 손잡이에 붓이 걸려버렸지 뭐예요. 페인트통은 그대로 덜커덩 나동그라졌고, 혼자서는 붓 하나도 제대로 빼 들지 못하는 아이가 된 토니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어요.

“이거 왜 이래?”

페인트통 훅 들어 다시 세워두며 비죽이는 입술까지, 일련의 상황들이 지극히 시아준수스러워 그냥 마구마구 애틋해졌어요. 시아준수가 선 공연에서는 그 소품까지도 무대를 사랑하여 이렇게 기꺼이 투신을 한다니까요...

 

 

게다가 음향이요. 점검 후 막 돌아온 음향이라, 있는 힘껏 음량을 살려놓은 덕분에 엄청나게 우렁찼어요. 토니 목소리가 너무나도 풍부하고 또렷하게 전달되는 게 아니겠어요? 평소 충무아트센터 특유의 생목소리만 강조되는 듯한 음향이 아니었어요. 

근데 심지어 그 음향 속에서 노래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Something’s coming 을요, Maria 를요..

 

특히나 Maria, 오늘 1막의 수훈갑이라 말하고 싶어요. 마리아의 경지를 본 것만 같아요. 오케스트라 곧 토니이며 토니 곧 악보 그 자체였던 오늘의 마리아. 토니가 음계의 이름을 명명하면, 그 길을 따라 오케스트라가 멜로디라인을 연주하는 광경을 보았어요. 가창자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아요. 최소 통솔자, 혹은 창시자에 가까운 마법을 토니가 부려요.

 

 

음향이 쩌렁쩌렁하면요, 같은 대사도 음향을 타서 째지거나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댄스파티에서 “넌 빠져 치노!”처럼 강세를 세게 주는 대사들이 특히요.

근데 참 신기하죠. 분명 버럭하는데 왜 귀를 찌른다는 느낌이 없을까요. 오늘 같은 음향에서도 귀가 따가운 느낌이 일절 없었어요. 그건 이조차도 조절하기 때문이겠죠? 연기의 귀재들이 이렇게 호통조차 섬세하게 한다던데 우리 토니가 딱 그래요. 

 

 

닥 아저씨네 가게

“너 오늘따라 애가 왜 이렇게 붕 떠 있어?”

“달나라 여행하고 왔거든요.”

다른 좋은 꿈 꾸는 곳도 많은데 왜 콕 집어 달나라 여행인가 했어요. 프롤로그 춤의 의미를 알고 나니 비로소 알겠더라고요.

하늘을 열망하며 제트를 시작했던 토니잖아요. 그래서 제트는 비행기를 나타내는 춤을 추고요. 토니가 꿈꾸는 바람은 이처럼 늘 하늘에 있고, 그렇기에 마리아를 만나서도 하루 종일 붕 뜬 기분이 된 건데.. 붕 떠서 하늘을 날다 못해 달나라에까지 도달해버렸다는 거였어요! 그토록 바라는 하늘을 거쳐 달나라에 도달한 토니의 행복감이 어떨지, 이제야 오롯이 이해되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극에 대한 감탄. 이 극은 어떻게 대사 하나조차도 철저한 인과를 준수할까요? 극 안의 모든 구성 요소가 필연의 법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어요. 극 안에 불필요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어요.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웨딩숍

보글보글 거품 목욕을 한다더니, 토니를 보고는 부글부글 끓어오른 김소향 아니타를 시작으로 오늘의 (거의) 유일한 애드립 구간. 

 

“그냥 두통약 배달 온 거야!”

“어어, 두통약, 두통약!”

두통약 배달 온 거라 해명하는 마리아의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 하는 토니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하지만 아니타 눈에는 아니었나 봐요.

“그냥 미친 거겠지.”

시니컬한 기색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꾸, 그렇다고 거기에 기죽는다면 우리 토니가 아니지요.

“이그젝틀리.”

평소와는 다르게 아니타 코앞으로까지 급진적으로 뻗은 검지! 마음먹으면 검지로 콕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기세에 살짝 놀란 아니타가 뒷걸음치고, 객석은 웃었어요. 아니타가 놀라거나 말거나 토니는 붕 뜬 기분의 무릎 돌리기에 이어 오마이갓까지 또 혼자 훌쩍 달나라로 비행해요. 그 뒷모습을 아니타가 흘겨봐요.

“골반은 왜 흔드는 거야?”

타박과 함께요. 달나라에서 별안간 찬물에 닿은 토니는 마리아에게 꿍얼거리고요.

“괜찮지 않았어?”

응, 괜찮았어.

저들끼리 좋아서 마주 보고 웃는데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아니타의 경고.

“딱 15분 준다. 춤추지 마.”

엄포에 객석이 또 한 번 웃고 토니는 강아지가 꼬리를 말듯 시무룩해졌어요.

“야박..하네.”

와중에도 입은 살아서 비죽이는 게 얼마나 귀엽던지요.

 

(그리고 짠. 교회는 다니냐~ 하는 마리아 말에 교회 키워드 정확하게 머릿속에 입력해두고, 성호 긋는 토니가 돌아왔어요. 우리 아이가 성호를 그어요. ♡)

 

 

Ond Hand, One Heart

도입부의 성결함을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돼요. 반 세기 전의 뉴욕에서 오늘의 시아준수를 위해 이 노래를 쓰신 걸까, 하는.. 그 정도로 샤토니의 원핸드는 불가사의하게 성스러워요. 어떻게 여기서 이처럼 이 노래를 위해 마련되었음이 틀림없는 단 하나의 소리를 낸단 말이에요.

도리안 그레이의 작곡가인 김문정 감독님이 자신의 창작곡을 부르는 오빠를 보며 과녁에 명중한 화살을 목격하는 전율을 느끼셨다 했지요. 저 하늘에서 그 전율을 공유하고 계시리라, 확신해요.

 

 

The Rumble

(싸움 끝나고) 이따 저녁에 들를게!

싸움 끝나면 베르나르도랑 (저녁) 먹어야지.

토니도, 아니타도. 제트와 샤크 모두 지극히 당연하게도 싸움 이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싸움 후가 없어져 버린 게.. 오늘 유독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아이들에게 패싸움이 일상의 하나인 것도, 그렇기에 너무나 당연하게 그 다음의 일상을 계획하는 것도, 하지만 결코 그리할 수는 없게 된 것도.. 전부요.

 

 

Somewhere

“내 손을 잡아, 놓지 마.”

악몽 후의 소절에서 울컥한 토니를 봤어요.

프로그램북의 표현 그대로였어요. ‘맹목적’인 얼굴. 무조건적으로 썸웨어를 그리는 동시에 저 스스로가 지금 이 순간 필사적으로 썸웨어에 매달리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닥 아저씨네 가게에서도요. 옷가지 모두 가방 안에 넣고 나서 아저씨를 기다리는 찰나에, 토니의 얼굴 위로 드리우던 불안과 두려움. 

아저씨 앞에서는 많이 팔았느냐며 스스로를 밝게 일으켜 세우는 토니가 남모르게 혼자서 삭이는 그늘이 있었어요.

 

양단을 오가는 토니의 얼굴을 보며 또렷하게 알 수 있었어요. 발끝을 달나라에 둔 이상주의자라 하여 자신이 선 진창을 모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오히려 동떨어진 현실을 아는 만큼 벗어나기 위해 고통스러우리만치 갈망하게 돼요. 토니처럼요.

맹목적인 자기 자신을 알지만, 이 선택이 틀렸다 해도 가야만 하는 거예요. 유일한 희망이니까요. 맹목적 갈망이 지닌 슬픔이 무엇인지 다 알게 해주는 토니가 오늘 무대 위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갈망의 끝은..

“여기선 사랑하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대.”

우리의 이상주의자가 제 달이자 하늘인 마리아의 품에서 하는 마지막 말이 이제까지의 자기 자신을 전부 부정하고 있다는 게 원통했어요. 현실에서도 썸웨어를 바라보며 달나라를 꿈꾸어왔던 우리 토니에게서 기어이 ‘여기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는 게.. 이 시대가 꺾어버린 꿈을 보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런 토니의 손 꼭 붙들고, 마음으로부터 끌어안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마리아.

“그럼 우리 떠나면 되지.”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썸웨어의 마지막 소절을 매듭짓지 못하고 떨구어진 토니의 고개는, 이미 ‘함께 떠나’로 먼저 훌쩍 가버렸기에 그런 것이리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