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스물세 번째 공연

 

“이 리프가 부탁한다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중한 건 아저씨께 선물로 드릴 간판. 요 며칠 전부터 토니, 간판을 리프에게 떠안기며 가볍게 투닥대는데요. 

“아, 들어 봐 좀.”

현실 느낌 살짝 첨가하여 틈새 애드립처럼 건네는 여기 이 말투가 좋아요. 토니인 동시에 시아준수 느낌도 나고, 또 토니와 리프가 진짜 친한 친구 사이라는 느낌도 물씬 내주고요. 꿩 먹고 알 먹는 대사 처리예요.

 

“너네 엄마가 그러시는데 말이다, 사실은 내가 친아들이래.”

감히 세상 푸근한 어머니를 가로채는 리프에게 정당한 응징을 하는 토니. 여기서 정택운 리프와 배나라 리프가 상체를 무너뜨리는 높이가 살짝 달라서 생기는 거대한 차이가 있어요. 토니에게 팔 꺾일 때 정택운 리프는 항상 몸을 충분히 꺼트리는 편이라서 얼굴이 토니 가슴 높이에 머무르거든요. 그래서 토니가 자기 손에 붙들려 쩔쩔매는 리프를 한껏 내려다보게 돼요. 이때 내리까는 시선과 턱의 각도가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요. 제가 토니가 잘생겨서 좋아한다고 말했던가요. 좋아합니다.

 

 

댄스파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댄스에 열중하던 리프, 토니 근처까지 왔다가 그만 손으로 토니 얼굴을 습격해 버렸어요. 이미 마리아를 발견하고 제 주의를 모두 빼앗긴 토니는 리프와의 충돌을 미처 피하지 못했고요. 

예정에 없던 충돌 사고에 리프가 제풀에 놀라서 토니 괜찮은지 한 번 살피기까지 하고 갔는데.. (멋쩍게 웃더군요, 리프 친구) 글쎄 토니는 자기가 맞았는지도 모르는 거 있죠. 물리적인 마찰이 남긴 순간의 충격만 빼면 그냥 그대로 마리아만 보며 서 있는 거예요. 누구도 무엇도 토니의 주의를 앗아갈 수는 없었어요. 

 

그런 사랑이 시작되었어요. 주위의 모든 빛이 퇴색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의미를 갖는, 세상 무엇보다 놀라운 사랑.

그 마음을 담아 토니가 불러요. Maria 를요.

 

요즘 Maria의 토니는.. 시아준수는.. 매번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같아요. 가사의 절반은 마리아를 연호하는데 할애하는 이 넘버에서 마리아마다 고유의 의미를 입혀줘요. 노래가 되는 마리아, 속삭여서 기도가 되는 마리아, 바다로 흐르는 강처럼 끝없이 마음으로 흘러드는 마리아, 세상 무엇보다 놀라운 빛깔의 마리아..

토니가 마리아라는 세계를 접하고 겪는 갖가지 경이가 이 모든 마리아들 안에 있어요.

단 하나의 이름에서 이토록 여러 의미를 펼쳐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대 위에서 현실로 표현되어 객석까지 전달된다는 것. 토니에게 마리아가 세상 무엇보다 놀라운 이름이라면, 저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아준수가 그 어떤 무엇보다도 경이로워요.

 

 

닥 아저씨네 가게에서는 의외의 웃음보가 둘이나 있었어요. 토니가 등장하는 순간은 아닌데, 웃음 참기에 각별한 공을 들여야 했을 정도로 큰 웃음을 선사해서 적어볼게요. 

 

“영화관에서 몰래 나왔어!”

“영화관에서 왜 몰래 나왔는데!”

“몰래 나와서!”

몰래 들어가서! 라고 해야 했는데 똑같은 말을 반복해버린 빅딜. 자기가 말하면서 이미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물음표 가득 띄운 얼굴로 어리둥절해하는 게 너무 웃겼지 뭐예요. 

 

게다가 닥 아저씨는 아이들 말리다가 손 털고 퇴장하실 적에 왜 자기 뺨을 툭 치시는 거예요? 원래는 샤크 아이 골반을 수건으로 톡 건드리셨고, 그 이후에는 카운터를 툭 치며 나가셨는데 저번부터 자꾸 본인 뺨을 턱 치세요. 그걸 보고 빅딜이 어안 벙벙해져서 따라 해보는 것까지 아주 웃음 버튼이었어요. 토니가 병! 칼! 로 저를 진정시켜줄 때까지 웃음을 참아내느라 힘들었어요. 

 

 

웨딩숍

“얼굴은 귀여운데, 춤 연습은 좀 해야겠다.”

아니타의 품평에 얼떨떨해진 토니. 마리아를 빤히 보며 입술 내밀어 묻는데,

“잘 추지 않았어?”

여기서 문득 여러분들 사쿠란보 연습해야겠다며,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냐는 콘서트의 시아준수가 생각나서 애틋한 웃음이 멈추질 않는 거예요. 오빠, 이제 그 타박 듣던 우리의 기분을 알겠어요? 하고 혼자 내적 대화를 시도하던 중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요.

“춤추지 마.”

여느 날과 같은 아니타의 경고에 생각지도 못한 토니의 대꾸,

“저도 춤추고 싶어요!”

토니인지 시아준수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순도 1215퍼센트의 진심을 들었어요.

세상에, 춤을 추고 싶대요. 토니가요, 시아준수가요.

무대에선 객석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 싶더라고요. 저도 그래요. 저도 보고 싶다고 전하고 싶었어요.

무대 위에서 제트와 함께 비행하는 토니도 보고 싶고, 대문자 제이 그리는 모습도, 맘보를 호령하는 토니도 보고 싶어요. 시아준수가 댄스 뮤지컬을 하는데 무릎 돌리기가 본인 움직임의 전부라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인 거예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무대 위에서 ‘춤추고 싶다’를 천명해준 토니 덕에 마음이 얼마나 산란해졌는지 몰라요.

 

 

여러 곳에 산재해있던 웃음포인트와 춤추고 싶다는 애드립으로 잔뜩 들떠버린 마음을 진정시켜준 건 Somewhere예요.

 

다섯 요정의 평화로운 한때를 지나 제트와 샤크 한 쌍의 독무가 시작될 때, 일렁이는 표정으로 미간을 모으던 토니 얼굴을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한재아 마리아요.

한재아 마리아는 투나잇에서 토니가 손등에 입을 맞춰줄 때, 이지수 마리아와는 달리 올곧게 토니 얼굴만을 보는 마리아거든요. 이지수 마리아가 입맞춤이 내려앉았던 자신의 손등으로 시선을 떨구고 감격해한다면, 한재아 마리아는 토니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감동에 빠져요. (손을 내려다보는 것도 토니 얼굴 따라 내려가는 정도로 짧고요.)

그러나 단 한 번, 썸웨어의 평원에서 토니의 손을 꼭 잡을 때는 달라요. 토니의 얼굴만 보던 사람이 썸웨어에서는 시선은 물론이고 상체까지 숙여서 토니의 손을 찾아서는 두 손으로 부둥켜 잡아요. 지금 잡는 이 손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요. 소신 있게 얼굴로 직진이었던 마리아의 이런 변화에 글썽이는 건 제 몫이에요.

 

 

“내 손을 잡아 놓지 마.”

악몽 후의 소절이 계속 젖어 있어요. 마음 아프게도. 노래의 시작부터 끝까지 울먹이는 토니를 오늘 보았어요.

자신이 지금 붙들고 있는 마리아의 온기와 썸웨어라는 희망, 그 희망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어요. 토니도 다 알아요.

물기 가득한 목소리에서 썸웨어의 시작부에서 목격했던 장면이 떠올랐어요.

 

토니가 떠나자며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 때, 어느 틈엔가 나타난 치노가 2층의 두 사람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는 걸 오늘 처음 봤거든요. 

떠나겠노라 손 맞잡고 일어나는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치노의 뒷모습이 두 사람이 따돌리고자 했던, 그러나 모든 곳에 도사리고 있기에 언제든 엄습할 수 있는 현실 그 자체처럼 느껴졌어요. 도망쳐봤자, 라고 치노의 뒷모습이 이미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도망쳐봤자’라는 걸 토니 또한 알아요. 하지만 알면서도 염원하기를 멈출 수는 없어요. 

 

그렇기에 Finale에서 여기에선 사랑하면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을 일정 부분 놓아버리면서도, 함께 멀리 떠나자는 마리아를 향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요.

죽음조차도 토니가 다시 꿈꾸는 것을 막지는 못해요.

 

이같은 청춘을, 토니를, 단 하나의 관용구로 말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