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스물네 번째 공연

 

그런 날이 있지요. 같은 대사도 아주 사소한 차이로 생소하게 다가오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반짝이는 날. 오늘이 그랬어요. 월화를 푹 쉬고, 사흘 만에 만나는 공연이라 오랜만인 느낌이 들어서였을까요?

“뭔데 말해 봐.”

“알았엉”

본디는 어미를 사뿐하게 내려놓는 ‘알았어,’ 인데요. 오늘은 아주 분명한 동그라미 받침이 있었어요. 덕분에 당혹스러울 정도로 귀여웠던 거 있죠. 동글동글 말리는 발음이 앳되기 그지없었어요. 역시 토니도 시아준수를 닮아 모태 귀요미인 걸까.. 하는 고민이 시작되던 찰나에.

 

“너 소속 없으면 그냥 고아야.”

욱해서 주먹 들어 올리는 리프와, 마침 그런 리프를 돌아보다 놀란 토니. 살짝 움찔하며 손바닥만큼만 뒷걸음질하는 게 또 너무 귀여웠던 거예요.

 

토니의 일거일동이 그냥 다 ‘반짝반짝’하고 ‘귀엽다’ 느껴지는 걸 저 스스로 인지하며 약간 긴장했어요. 설레는 초조함이 손끝에 뭉쳐있는 것 같더라고요. 대체 오늘 공연, 제 심장의 어디까지 흘러 들어오려고 이러는 건지.. 싶어서요.

 

이어서 온 애드립의 꽃. 

“베르나르도 요즘 어떤 지 알아? 말만 샤크야, 몸은 코끼리야.”

코끼리라는 새로운 단서에 토니가 잠시 고요해졌어요. 누가 봐도 마음에 둔 단어가 있는 얼굴로 골몰하는 거예요. 이걸 진짜 해, 말아 하고요.

“...그럼 샤크파가 아니라.. 엘레펀트파?”

칼을 뽑았으니 던진다는 심정으로, 하지만 작고 소중한 목소리로 토니가 말했어요.

“재밌니?”

돌아온 건 리프의 싸늘한 눈빛.

“미안..”

바로 꼬리를 사리고 사과하는 풀죽은 목소리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뱃속부터!”

“야, 그거 제스처 바꿀 때까지 나 안 할 거야. ”

토니의 안 한다는 늘 물러줄 여지가 있는 거절이에요. 단 한 번을 끝까지 고집부린 적이 없거든요. 무대포로 대기 중인 배나라 리프에게 오늘도 결국에는 응해주었어요. 죽든 살든, 호잇쨔! 합이 완벽해서 더 부끄러운 토니를 리프만 몰라요. 태연한 데다 신나 보이기까지 하는 리프를 보며, “어떻게 저렇게 자신있게 하지..” 신기한 토니예요. 

 

 

댄스파티, 꿈만 같은 첫 입맞춤은 베르나르도의 손에서 끝이 나요. 견우와 직녀처럼 멀찍이 떨어져서도 다시 서로를 찾아 시선 맞추는 토니와 마리아. 오늘 두 사람, 오직 시선만이 이어진 상태에서 입꼬리 수줍게 올린 웃음을 주고받았어요. 토니 입술에 걸쳐진 미소가 마리아의 벅찬 웃음이 되고, 마리아의 쑥스러운 찡긋이 토니 얼굴 안의 사랑이 되었어요.

 

투나잇에서도요.

어딜 봐도 너뿐야 마리아,

토니, 토니. 

부르면 노래가 되는 이름, 사랑의 이름. 토니와 마리아, 서로의 이름을 번갈아 속삭이다가 벅차올랐는지 푸스스 웃지 뭐예요. 가사와 가사 사이에서요. 비눗방울처럼 퐁퐁 피어나는 웃음에서 사랑이 한 바구니를 이루었어요. 이토록 평온하고 아름다운 한때에 눈물이 나는 건, 이 순간의 유한함을 알기 때문이겠지요.

 

 

Maria

마리아의 시아준수에게 고합니다. 저 마리아에서 손뼉을 치고 싶어요. 이 가창 이 음악의 끝에서 박수를 전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 같아요. 장면의 흐름도 물론 중요하지만, 샤토니의 Maria를 향한 감동을 표현할 수 없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닥 아저씨네 가게

슈랭크 경위도 참 열연을 하세요. 에이랩, 액션의 상처를 차례로 후벼파며 아이들을 자극하는 세상 가장 못난 어른이 되거든요. 오늘도 막판에 가게에 난입하여 분위기를 파탄 내시는데, 오.. 세상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어요.

슈랭크 경위가 막 들이닥쳤을 때 아이들끼리 대형을 정렬하다가 리프의 자켓이 바닥으로 떨어졌거든요. 그걸 토니가 주워서 탁자 위에 고이 올려두었고요. 경위의 막말을 피해 제트 아이들이 가게에서 우르르 빠져나갈 때, 리프가 아이들을 곧장 따라 나가지 않고 자기 자켓을 챙기러 탁자로 잠시 돌아왔어요. 그러다 층계에서 내려온 토니와 딱 마주쳤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자마자 토니가 신호했어요. 딱딱하게 굳은 눈썹과 염려 어린 눈동자로, 아이들 쪽을 가리키는 손짓을 리프도 곧장 이해했어요. 얼른, 가서 애들 챙기라는,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걱정을요.

여기 이 장면에서 토니가 오늘처럼 관여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속으로는 염려해도 크게 나서는 법은 없었는데, 정말 특별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어요. 

 

그리고, 닥 아저씨네서 웨딩숍으로 장면 전환이 될 때요. 일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요. 신나게 달려가는 뉴욕의 배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촉촉해져요. 토니와 함께 마리아에게로 달려가는 듯한 이 느낌이 왜 이리도 벅찬지 모르겠어요. 내 마리아도 아닌데 말이에요.

 

 

The Rumble

아니야, 아니야. 

제 손으로 무너뜨린 생명 앞에서 토니가 두 손으로 시선을 떨구어요. 덜덜 떨리는 두 팔, 자기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보는 고개의 혼란함. 그 모습이 단박에 도리안을 불러와서 제 마음이 곱절로 수런대고 말았어요. 토니 위에 도리안을 겹쳐 보는 감각이란 건 너무나 엄청나더라고요. 애틋 더하기 애틋은.. 그냥 김준수렁텅이 그 자체였어요. 

 

응징 직후에 울컥했던 게 또 있어요. 샤크들 모두 토니에게 떼로 달려들잖아요. 등이랑 어깨랑 어디든 마구 두드려대는데, 그럼 제트도 가만있지 않아요. 토니에게 달려든 샤크를 한 명씩 도맡아서 상대해요. 제일 키가 커서 제일 요란하게 달라붙는 샤크는 디젤이 번쩍 들어 토니에게서 떼어놓아요. 그렇게 제트가 한 명씩 전담하고 나면 그 덕에 혼자 남은 토니가 숨 돌릴 틈을 얻고요. 그러다 뒤늦게 합류한 치노의 주먹은 또 그대로 맞고만 있어요.

리프는 잃었지만 토니만큼은 지키겠노라 달려드는 아이들과, 샤크의 그 누구에게도 손 올리지 않는 토니를..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었어요.

 

 

마리아의 침실에 나타난 토니.

여기서 토니의 행색을 훑는 마리아의 시선에 늘 숨이 막혀요. 사건 직후 정신없이 마리아를 향해 왔는데, 마리아가 보고 있는 자신은 온통 피를 덮어쓰고 있을 거란 걸.. 토니도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서 가타부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옷깃만 쥐어뜯고요. 살인자라는 원망의 선고가 떨어질 때까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 해요. 우리, 달나라 청년이요. 

 

 

Somewhere

두려움 없는 그날이 올 거라고, 썸웨어의 평원에서 그렇게 노래했는데.. 꿈에서 깨고 나니 아니타가 등 뒤에 있어요. 방의 구석진 곳에서 토니가 겉옷을 챙겨요. 소리 죽여 허둥대는 모습은 오직 이 순간에만 볼 수 있어요. 극 안에서 토니가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유일한 이 순간에 눈 시리게 안타까운 동시에 천만다행인 건,

“너도 이제 두렵구나.”

그 마음 알아보고 끌어안아 주는 마리아가 곁에 있다는 거예요.

닥 아저씨가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

내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해볼게, 

빨리 와.

토니의 손 꼭 잡고, 토니와 시선 단단히 맞추고, 어떤 말이든 토니의 것이라면 다 품어줄 것 같은 얼굴로 토니의 말마다 고개 끄덕여주는 마리아가 곁에 있어요. 그 사실이 토니에게는 물론이고 저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어요. 

 

Finale

그런 이의 품 안이었기에 토니도 끝까지, 울다가도 웃었던 거겠지요.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웃는 얼굴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던 토니를 잊을 수 없어요.

어느 순간부터 마리아들은 눈물을 주체 못 하여 오열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런 마리아의 몫까지 다 하여 웃어보려고 노력해요. 토니가요.

 

죽음 이후의 시간을 일컬어, 그 사람의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었다고들 하잖아요.

홀로 먼 여행길을 떠난 토니를 위해 바랐어요. 부디 그의 마지막 여행지는 온몸을 하루 종일 공중에 붕 띄워둘 수 있는 달의 어딘가이기를.

그러니까, 썸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