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스물여섯 번째 공연

계묘년 새해 첫 공연

 

 

아니 오빠, 오늘 성량 무엇이지요. 오프닝의 something’s coming부터 심상치 않았는데요. 마리아, 투나잇, 퀸텟 모두 귀가 황홀할 정도로 단단한 소리의 현단을 들려주었어요. 시아준수라는 거대한 너울 안에 휘감겨 있는 감각이 선명했어요. 

 

와중에 더더욱 놀라운 것. 이 성량을 가지고도 퀸텟과 같은 대합창의 노래에서 지극히 섬세해요. 강약을 놓는 법이 없어요. 대합창의 중심부에서 토니, 성량으로 중추를 틀어쥐어야 하는 역할이잖아요. 탄탄하고 폭발적인 가창으로 제트와 샤크의 균형을 훌륭하게 이룩해내는 동시에 어미의 끝을 말아쥐는 섬세한 조절을 보여줘요. 에너지를 폭발시키면서 그 폭발의 끝맺음까지 완벽해요. 이런 토니가 이끄는 퀸텟, 실로 다 가진 넘버가 아닐 수 없었어요. 

 

*

 

닥 아저씨에게 선물로 드릴 간판에 공들이는 토니가 좋아요. 리프에게는 대강 대답하며 손 카메라 만들기에 여념 없는 모습이나, 자기가 고쳐 둔 간판 보고 감탄하는 추임새 같은 것들이요. 

“와아~”

20일부터는 이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나와서 또렷하게 들을 수도 있었어요. 숨결처럼 나직하게 끌어낸 감탄사가 순수하고 솔직하고 또 귀여워서, 매번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Maria

마리아에서는 너무 예뻤던 것. 마리아를 연호하며 일직선으로 걸어 나올 때 오늘 유난히 조명이 토니를 물들이더라고요. 볼록한 앞 광대 위로 드리워지는 자줏빛 조명이 꼭 얼굴에 피어난 홍조 같았어요.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사랑의 열기가 피어나는, 소년의 얼굴이 얼마나 싱그럽던지. 첫 사랑의 기쁨을 깨우친 발그레한 볼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

 

그리고 잠시 감탄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댄스파티의 시아준수 얼굴보다 잘생긴 무엇이 있을까. 마리아의 시아준수 얼굴보다 예쁜 존재가 있을까. 

투나잇의 시아준수 얼굴보다 사랑스러운 게 있을까. 원핸드의 시아준수 얼굴보다 성스러울 수 있을까. 

시아준수, 당신은 어째서 이름도 시아준수인가요.

 

 

Tonight

“뭐가 무서워.”

겁이 나야되나~ 할 때처럼 양팔을 들어 으쓱하던 우리 토니. 패기 어린 순수함, 영락없는 낙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어요. 세상 두려운 것이 없는 우리 토니.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염려 같은 건 없어요. 토니는 달나라에 와 있는걸요.

 

달나라에서는 염려할 것이 하나 없어요. 오직 사랑을 할 뿐이지요. 세파의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음성이 밤 인사를 전해요.

“떼아도로, 마리아.”

세상 그 무엇보다 상냥하게, 온 마음으로 공들여 발음한 ‘마리아’였어요. 

 

 

닥 아저씨네 가게

쿨의 핑거 스냅을 하는 토니를 드디어 보았어요. 20일 공연에서도 아이들을 말리고자 팔을 뻗는 모습은 보았지만 각도상 손이 가려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요. 팔로 반동을 주는 느낌만 전해 받고 애가 동동 탔는데, 오늘은 기쁘게도 스냅하는 모습을 온전히 목격했어요. 

슈랭크 경위의 도발이 극에 달하는 그 순간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던 두 번의 핑거 스냅. 치졸한 저의를 담은 모멸을 차단하는 손짓이자 아이들을 위한 도닥임이었어요.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아이들을 위하여 발하여진 스냅이었고요. 그 가벼운 손짓 안에 얼마나 묵묵한 마음이 있었는지 몰라요.

 

 

웨딩숍

“온몸이 하루 종일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에요. 오마이갓.”

맹렬하게 무릎 부웅 돌리는 토니를 지그시 보던 김소향 아니타. 볼일 다 보고 마리아에게로 등 돌린 토니를 계속 빤히 보더라고요. 그러더니 등 톡톡 치고 주문하지 뭐예요.

“다른 거 해 봐.”

졸지에 멍석이 깔린 판. 

막공도 아닌데 다른 춤을 추게 되는 토니를 보게 될 줄이야! 매번 춤추지 말라 엄격하게 경고하던 아니타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토니, 주춤하다가도 금세 마음의 준비를 끝내요. 목 한 번 가다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오징어춤~ 

흐물거리는 뒤태에 놀란 마리아가 도도도 달려와 양팔을 붙잡아 멈출 때까지 진심을 다해 흐늘거렸어요. 흐물대는 전신 안에 꼭꼭 뭉쳐둔 진심이 통했는지 아니타에게는 대통을 받았고요.

“괜찮았어.”

아니타가 춤 연습해야겠다며 핀잔을 줄 때마다 마리아에게 보채곤 했잖아요. ‘괜찮지 않았어?’ 오늘은 괜찮았다고, 아니타로부터 인정을 받은 거예요.

“그라시아스!”

기쁜 마음 역력히 담은 감사 인사가 아주 청청했어요.

 

다른 춤 춰보고~ 역할놀이 마치고~ (feat. 아니타) 이제는 신부 들러리를 세울 시간. 엄마 마네킹의 레이스를 아니타 역의 마네킹에게 둘러주려다 그만 베일까지 같이 씌워버린 토니. ㅎㅎ 줄줄 딸려 온 베일에 멈칫하며,

“이게 왜 같이 딸려왔냐..”

시아준수 본연의 말투로 꿍얼대는 음성이 큰 웃음을 주었어요.

아, 토니 안에서 가끔씩 고개 드는 시아준수 역력한 애드립이 얼마나 사랑인지 몰라요. 뮤지컬 공연을 할 때면 항상 무대 위에 그 캐릭터만을 오롯하게 남겨두는 사람이라, 토니를 만났어도 시아준수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잖아요. 무대 위의 저 인물은 토니이지 시아준수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따금 이렇게 애드립 가능한 구간에서 ‘시아준수 본인의 반응’을 애드립 삼아 끼워 넣는 순간이 귀중한 것이고요. 오늘처럼요.

토니인 동시에 시아준수였던 귀하디귀한 찰나,

새해 첫 공연부터 세상 무엇보다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The Rumble

리프를 끌어안고 울다가 퍼뜩 고개 든 토니, 베르나르도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와요. 시선이 미동도 없는 이에게서 쫓기듯 자기 손으로 떨어져요. 그리고는 화들짝 경기를 일으키듯 뒷방아를 찍었어요. 자기 두 손에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아니야, 아니야..”

제 손에 묻힌 피가 그토록 선명했을까요. 죽음의 그림자라도 역력했을까요. 두 손을 내려다보는 얼굴에서 혼탁하게 일어나는 절망을 어떤 말로도 다 할 수 없어요. 

 

“마리아..”

그저 마리아. 사랑의 이름을 한 번, 담고 나니 새삼 절망의 무게가 실감이 났을까요.

“마리아..!”

두 번째 마리아가 세상 무엇보다 거대한 비명이 되어 쏟아졌어요. 이름을 부르면 비로소 꽃이 되는 건, 절망 또한 마찬가지인지.. 애석하게도.. 자각하고 나니 더 선명해지는 절망이 토니의 얼굴에 가득했어요.

 

 

Somewhere

“내 손을 잡아 놓지 마.”

한동안 울먹이던 악몽 후의 소절이 오늘은 단단했어요. 깊고, 신중하고, 견뎌내야만 하는 것을 감당하는 묵묵한 눈을 하고 있었어요.

 

 

닥 아저씨네서 마리아를 기다리는 토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거짓 비보는 꿈에도 모르고 미래를 그리는 우리 토니. 어느 순간부터 여기서, 반작이는 눈동자 아래에서 부산스러운 손을 보게 돼요. 

“마리아와 어떻게 할 건지 아세요?”

희망을 나열하면서 바쁜 손. 연신 난간을 쥐었다 폈다 하며 경황없이 급급하던 두 손. 토니가 포부를 이어갈수록 두 손이 바빠져요. 

그건 토니가 채 안으로 삭이지 못한 불안함의 발로이자, 수면 아래에서 바쁜 백조의 발처럼 미래를 꿈꾸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소진해내고 있다는 노력의 증거이기도 했어요. 

토니의 현실과 바람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있고, 그 간극을 떨쳐내기 위해 두 손이 정처없이 바빠지는 거예요.

그런데,

“마리아랑 저랑 사랑할 시간이 단 하룻밤이라 해도 세상 무엇보다 의미 있어요.”

이 선언의 순간에는 손이 멎어요. 난간을 꼭 쥐고, 미동조차 않아요. 닻줄을 풀어 정박한 배처럼 단단하게 멎은 두 손을 보며 알 수밖에 없어요.

이 순간에는 꿈꿀 필요도 없고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요.

이 하나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진실이니까요.

 

 

Finale

두 사람의 마지막 순간. 마지막 잎새를 놓아버리듯, 눈을 감을 적에야 눈물을 흘려보내는 토니나.. 커튼콜에서 토니가 ‘울지마’라며 도닥여주어야 할 정도로 목 놓아 우는 한재아 마리아나.. 세상 가장 슬픈 이별을 감당하는 두 사람인데요.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순간만큼은 이 둘.. 항상 필사적으로 웃어 보여요.

여기서 사랑하면 안 된다고 얼굴을 고통 속에 일그러트리면서도 애써 웃는 토니는 물론이고, 안톤에게 마지막 입맞춤 전하기 전에 울음으로 호흡이 가쁠 지경이면서도 온 힘 다하여 미소를 만들어내는 마리아도 그래요.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눈물을 드리우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에요.

세상 무엇보다 의미있는 이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ㅡ사랑을 마지막 기억으로 선사하기 위해서요.

 

웨스트사이드스토리라는 이 극이 세상 위대한 작품인 건 자명하지만요.

이 위대함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여러 운명이 알맞게 자리해야만 하고, 그 하나하나 역시 위대해야만 해요.

 

그리고 저는 이 극의 가장 위대한 운명은, 이 두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