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스물여덟 번째 공연

 

악몽 후, 가사가 여느 날과 달랐어요. 

너와 나의 어딘가가 아니라,

“너와 나의 그곳으로 함께.”

존재 여부부터 불확실한 ‘어딘가’가 아니었어요. 더욱 또렷한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지칭, ‘그곳’이 된 거예요.

단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서글픈 소름에 전신이 휘감기고 말았어요.

썸웨어 넘버 내내 어딘가를 찾아 헤매던 토니가 마음속의 열망을 ‘그곳’으로 기어이 실체화해낸 것처럼 보였거든요.

왈칵 눈물이 났어요. 맹목적인 갈망 끝에 얻은 눈먼 확신을 너무나도 덤덤하게 노래하는 토니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요. 그곳으로 함께 떠날 수 있기를, 같이 열망하는 것 이외에는요. 

 

*

 

예상치 못한 썸웨어의 개사가 아니라도 오늘은 꽤 특별한 하루였어요. 리프와의 첫 장면부터 오밀조밀한 애드립으로 꽉 찬 공연이었거든요. ‘뱃속부터’ 첫 구호에서부터 하아, 한숨 쉬는 토니가 그 시작이었어요.

 

“너희 엄마가 그러시는데 내가 친아들이래.”

어허, 어딜 감히. 대번에 팔 꺾어버리는 토니의 응징에 리프가 험한 말을 주워 담아요. 개 새 끼. 리프의 욕설이 처음은 아닌데, 오늘따라 정직하고 또렷했던 발음에 객석이 꺄르르 웃었어요. 재미있었던 건 토니가 그에 반응했다는 거예요. 

“왜 욕을 하고 그래.”

리프의 말이 평소보다 무대 위에서 또렷하게 자리했고, 그에 관객도 유달리 빵 터졌으니 다른 날에는 별다른 반응 없이 흘려보내 주었던 토니도 오늘은 대사로 받아치며 살을 붙여 준 거죠. 

덕분에 장면 하나가 새 생명을 얻듯 피어났어요. 객석이 또 한 번 파르르 웃었거든요. 그날그날 무대 위의 호흡과 객석을 기민하게 살피며 매일을 특별한 하루로 만들어내는 시아준수가 선사한 즐거움이었어요. 

 

하나 더 있어요. 

“난 손 털었잖아. (운동) 너나 좀 해라.”

토니의 육성으로 듣는 손 뗐으니까, 손 털었잖아 발음이 얼마나 특별한지 모르겠어요. 발음의 모체는 시아준수인데 입혀진 색상은 토니의 것이에요. 그게 몸 둘 바를 모르게 좋아요. 

 

 

댄스파티

리프와 약속한 대로 밤 열 시의 댄스파티에 나타난 토니. 댄스 삼매경인 리프를 보고 반갑게 웃어요. 토니를 발견한 리프도 발끝에 날개를 달고 날아오고요. 그런데 두 팔 가득 펼쳐 리프를 반길 준비 만만이던 토니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는 거예요.

뭐지? 리프가 날아오며 뭘 했길래 평소와 다른 반응이지? 갸웃하는데 어느새 토니 앞으로 날아온 리프가 읏-챠-를..!

얼굴로는 질색하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같이 읏챠 해주던 토니, 문자 그대로 아연한 머리와 그렇지 못한 신체를 보았어요. 꿈에서도 보고 싶을 정도로 특별했어요.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네 집 앞에서 마리아를 속닥이는 토니. 오른쪽 끝에서 속닥, 왼쪽 끝에서 또 속닥.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듯 날아다니며 마리아를 부를 때 시아준수의 비거리를 체감해요. 무대 끝에서 끝까지 대체 몇 걸음 만에 날아가는 건지 볼 때마다 놀라워요. 

 

 

닥 아저씨네 가게

“정정당당히 해.”

양쪽에서 한 사람씩 나와서 맨손으로. 제트끼리도 사전 합의되지 않은 원칙을 제안하며 토니가 리프를 똑바로 봐요. 잠시 잠깐의 시선 교환. 가타부타의 부연 없이, 오직 눈빛만으로 리프에게 모든 사정을 전하는 토니예요.

곧이어 리프가 눈 질끈 감고 결단해요. 

“정정당당히 하자.”

그 결단에 토니가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고요.

토니와 리프의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아는 관계가 참, 볼 때마다 애틋해요. 누가 널 건들면 부숴주겠다는 제트송의 가사가 진실이라는 것도 이 장면에서 또 한 번 깨우치게 되고요. 말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걸요. 

 

여기서 배나라 리프일 때 볼 수 있는 장면 하나. 배나라 리프는 늘 자켓을 가게로 가지고 와서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나 던져두거든요. 구겨진 자켓을 대강이나마 탁탁 개어 탁자 위에 고이 올려두는 건 우리 토니의 몫이에요. 

 

슈랭크 경위의 난장판 후에는 배나라 리프가 탁자로 이 자켓을 찾으러 오거든요. 자연히 토니와 눈이 딱 마주치고, 토니가 손짓해요. 

어서 애들 챙겨 가라고. 

지난 공연부터, 자켓 챙기기에서부터 연결되는 일련의 흐름이 너무 좋더라고요. 배나라 리프와의 공연날에는 이 장면을 특별히 기다리게 될 만큼이요. 

 

 

The Rumble

싸움, 그리고 죽음. 베르나르도의 앞에서 토니가 자기 두 손을 내려다봐요. 손안 가득 묻은 죽음에 놀라 넘어지고는, 주체 못 할 절망과 두려움 속에 떨어요. 

 

오늘은 특히나 유난한 절망의 하루였어요. 마리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계속계속 들렸거든요. 꺼져가는 마이크 틈으로 끝없이 들려왔어요. 

세 번째 마리아, 네 번째 마리아, 다섯 번째 마리아..

마치 토니의 머리 위로 무겁게 떨어지는 아홉 번의 종소리처럼.

끝없이 널 부르는,

그러나 더는 노래도 기도도 될 수 없어진..

마리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