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서른한 번째,

그리고 막공까지 열 번째 공연

 

베르나르도의 덩치가 얼마나 쩍쩍 갈라지는지에 대하여 논할 타이밍이었는데요. 레파토리가 바뀌었어요.

“너도 한 번 예전처럼 물어뜯어 줘야지!”

네에? 뭘 물어뜯어요..? 바뀐 애드립의 급진적인 부추김에 놀람도 잠시,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토니의 대꾸가 이어졌어요.

“내가 무슨 드라큘라냐? 물어뜯게?”

뜻밖의 드라큘라 소환과,

“너 예전에 별명이 그거였잖아. 토라큘라.”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애드립의 향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검지로 자기 턱을 슬쩍 감싸 쥐고는 입맛을 다셔 보이는 토니까지.

정말 한 번 물어 뜯어볼지 말지 가늠해보는 듯한 수 초가 지나고 토니가 마저 대답했어요.

“지금은 안 돼.”

안 된다는 말투의 은근함에 웃음을 멈출 수 없었어요. 진짜 물어뜯었던 전력이 있구나, 토니. 우리 토라큘라, 에메랄드 놈들을 다 물어뜯어서 박살 낸 거였군요.

 

제스처를 제발 좀 바꿨으면 좋겠는 ‘뱃속부터’는 리프가 요지부동이에요.

“그래, 그러면 내가 제스처는 그대로 하고, 우쨔쨔로 가자.”

제스처를 바꾸랬더니 아주 뻔뻔하게 구호만 바꿔서 밀어붙였거든요. 정신없이 몰아치는 걸로 눈속임이 될 줄 알았던 모양인데 토니, 속지 않아요.

“아니 제스처를 바꾸라니까..”

정신은 사납고, 얼척은 없고. 입술이 댓발 나온 얼굴로 토니가 따박따박 짚어줬는데도 막무가내. 결국 오늘도 리프의 소망을 다 이루어주는 토니였어요. 밤 열 시의 댄스파티도, 우쨔쨔도요.

 

“몇 시?”

“열시.”

애드립의 홍수였던 오늘, 오프닝의 마지막에서는 열두 시라고 어깃장 놓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주었어요. 애드립에 애드립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장면 전체가 자칫 수다스러워질 수 있잖아요. 간결한 마무리가 균형을 딱 맞추어 주었어요. 과연, 숲과 나무를 동시에 조망하는 배우. 시아준수라니까요.

 

 

댄스파티

분명 밤 열 시 약속이었는데요. 토니의 등장이 다른 날에 비하면 굉장히 빨랐어요. 샤크의 맘보에 맞서 제트들이 와르르 달려가는 중에 뿅 나타났거든요. 제트들은 리벤지 하겠다고 달리기 시동을 거는데 혼자 평화의 섬처럼 동동 떠 있는 태평한 갈색 머리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하나 더 있어요. 원래 토니를 반겨주는 역할의 친구들이 토니의 이른 등장에 어리둥절해했거든요. 열 시에 나타나기로 한 토니가 대략 아홉 시쯤에 벌써 보이니까, 이게 맞나? 물음표를 띄우고 있으니 토니가 먼저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나 왔노라고 인사를 하지 뭐예요. 코끝에서부터 번진 이모티콘 웃음이 정말 귀여웠어요.

 

또 제트들이요. 때마침 자켓을 다 벗어 던진 차림이잖아요. 리벤지하겠다고요. 토니 혼자만 반듯하게 정장 딱 갖추어 입은 모습이 참 돋보이더라고요. 어느 댁 아들이 저렇게 반듯한지. ㅎㅎ

 

 

Tonight

토니의 순순하고 소년스러운 말씨 중에서도 유난히 간지럽고 사랑스러운 문장.

“걘 아직 파티에 있잖아.”

설득인지 응석인지 모르겠는 이 말투 하나로 토니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충분해요. 어떻게 이렇게 때 묻지 않고 순수할 수가 있을까요. 이 말투의 사랑스러움에 주먹을 꽉 쥐다 보면 시아준수를 만나게 된 토니라는 캐릭터의 운명 또한 축복하게 돼요. 토니, 네가 반세기를 기다려 시아준수를 만났구나.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랑의 말씨를 얻었구나, 하고요.

 

노래하면서는 두 사람, 오늘 또 왜 이렇게 웃음 폴폴 했지요. 소절을 번갈아 부르면서 쉬는 구간마다 웃지 뭐예요. 

토니, 토니. 

불러놓고 마리아가 웃으면, 마리아가 웃는 얼굴을 보며 토니가 마주 웃고,

웃음에서 노래가 피어나고..

사랑이 시작하는 이 밤의 경이가 노래 안에도 있었지만, 새록새록 피어나는 웃음꽃 안에도 있는 오늘이었어요.

 

 

닥 아저씨네

슈랭크 경위의 등장과 동시에 팔짱 끼고 테이블에 기대어 서는 토니. 듣기 싫은 소리가 이어질 걸 이미 각오한 얼굴인데요. 

“비켜 이 후진국 꼴통 새끼야.”

시동거는 슈랭크 경위의 막말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픽 웃으면서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수그러트려요. 그 자세로 잠시 눈 감기를 수 초, 고개는 그대로 푹 꺼트린 상태에서 시선만 들어 슈랭크 경위의 뒷모습을 빤히 보는데.. 여기서 팔짱 낀 채로 시선만 올린 얼굴의 카리스마를 말로는 다 못 할 거예요. 잘생김은 또 어떻고요.

 

 

Ond Hand, One Heart

오늘 굉장히 영화적으로 아름다웠던 장면. 

노래의 끝에서 마리아가 코끝만 살짝 스칠 정도로 살포시 입 맞춰주고 물러났거든요. 평소대로라면 짧은 버드키스에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음미하듯 천천히 눈을 떴을 토니가, 오늘은 예쁜 눈을 곧장 동그랗게 뜨고는 짧게만 스쳐 간 코끝에 아쉬운 듯이 두 눈을 깜빡였어요. 멀어지는 마리아의 뒷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나서야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리며 미소를 만드는데..

제가 영화를 보았나요? 아마 5초 남짓했을 짧은 잠시간 사이에 세상 모든 사랑 영화에서 한 번씩은 담아내고자 하는 안온한 사랑을 목격했어요. 이토록 순도 높은 행복과 사랑을 무대에서 연기로 그려내는 오빠는.. 정말 사랑의 다른 이름이 맞나봐요.

 

 

Finale 에서는 한재아 마리아의 열연이 대단했어요. 커튼콜에서 종종 오빠가 울지 말라고 다독여주어야 할 정도로 마음으로부터 울음을 쏟아내는 ‘마리아’예요. 오늘은 심지어 토니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 ‘떼아도로’가 울음으로 뚝뚝 끊겨서 ‘떼... 떼아도로’로 간신히 기워내야 했고요.

 

문득 궁금해졌어요. 누워있는 오빠가요. 열연의 대상이 되는 오빠 본인은 어떤 기분일까요? 셔츠 위로 얼룩지는 마리아의 눈물은, 토니의 마지막 매무새를 정돈하는 마리아의 손길은 오빠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다줄까요? 데스노트랑은 달리 무대 바닥이 따뜻하지는 않을 테니, 분명 깨어있을 텐데...

오빠가 먼저 눈을 감고 동료 배우에게 극의 마무리를 맡기는 입장에서, 눈을 감고 오직 소리와 감촉으로만 느끼는 엔딩 속 오빠의 마음이 궁금해졌어요.

커튼콜에서 마리아에게 울지 말라고 수고했다고 전해주는 상냥한 다독임도, 끝까지 토니의 얼굴로 마리아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도 이 마음의 어딘가에서 나왔겠지요?

기회가 된다면 들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