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서른두 번째,

그리고 막공까지 아홉 번째 공연

 

진부한 걸 싫어하는 점. 토니가 시아준수 영혼의 한쪽을 받아 태어난 아이라는 증빙이 아닐까요. 똑같은 건 거부하는 성미가 시아준수를 똑 닮았어요.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에 다른 버전의 구호가 왔습니다. 캐딜락 타든, 깡통 차든!

백미는 마무리였어요. 오래 묵은 구호를 대신한 새 구호가 마음에 썩 흡족했는지 토니가 제창 후에 자화자찬했거든요. 

“어우 신박해.”

구호 외치며 만족해하는 토니는 매우 귀해서, 함께 웃었어요.

 

 

댄스파티

제트도 샤크도 각자 잘 놀던 댄스파티에서 본의 아니게 소란의 중심이 되어버린 토니. 베르나르도에게 일방적으로 포화의 대상이 되었는데, 토니의 대거리는 짧게 끝나요. 마리아를 보느라 여념이 없거든요. 마리아라는 과녁에 명중해버린 토니 시선의 잘생김은 말로는 다 못 하는 것이기에 저는 그런 토니를 보느라 여념이 없고요.

여기서 토니를 보느라 정신없는 사람이 또 있어요. 리프와 제트. 제트 중에서는 액션이요.

액션의 시선은 어느 날에는 리프보다도 집요해요. 오늘이 그랬어요. 이상징후를 포착하고부터 토니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마리아에 콕 박힌 토니의 상태를 면밀히 보고 또 봐요. 그러다 입술이 헤 벌어지더니,

“이 새끼 돌아왔다 야.”

리프의 진단에 헤벌쭉 흐른 입매로 액션이 ‘에헤헤’ 웃었어요. 고개도 같이 주억거리면서, 무엇보다 반갑다는 듯이.

기쁨 역력한 짓궂은 웃음에서 알 수 있었어요. 제트송에서 ‘토니 온 지 한 달도 더 됐다’면서 성토하던 마음의 발로가 섭섭함이었다는 것을요. 토니도 리프도 항상 제트 곁에 있어 주는 바람 같고 나무 같은 존재인데, 그런 토니의 빈자리가 너무도 서운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기쁜 거고요. 토니가 돌아왔다는 게. 토니가 그렇게나 좋은 거예요. 우리 대문자 제이, 제트들은요.

 

하지만,

“저기.. 마리아? 마리아!”

토니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어요. 오늘 마리아의 이름을 읊으며 뒤따라갈 때는 진짜로 달나라 간다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줬어요. 

한발로 부웅 도약하여 몸을 날리는 높이가 유독 어마어마했거든요. 순간적으로 날아오르는 줄 알았을 정도로요. 진짜 피터 팬이야 뭐양.

 

 

Maria

오늘의 탑오브탑이라 말할래요. 박자가 가창을 어떻게 수놓을 수 있는지를 오늘 다 본 것만 같아요. 엄청났어요. 

도입부의 노래부터요. 첫음절 마로 시작점을 콕 찍고, 가운데 음절을 그윽하게 밀어 넣었다가, 마지막 음절은 사근하게 놓아주는 걸로 마무리해요. 그윽함을 살린 박자감으로 토니가 마리아의 이름을 곱씹으며 음미하고 있음을 절로 알게 했어요. 

음미 끝에 마리아라는 이름이 토니 입에 착 감기면, 그때부터는 노래에 채색이 시작돼요. 그 정점에서는 너울대는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의 향연이란..

샤토니 노래에 마음이 다 녹아 있는 상태에서 토니가 제 마음을 가사로 끄집어냈어요. 

“어쩜 이토록 아름다~울까.”

포물선으로 미끄러지며 심장으로 흘러 들어오던 여기 이 문장, 오늘의 개인적인 정점으로 꼽고 싶어요. 

 

 

Tonight

“마루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운 토니가 불쑥 창안을 넘봐요. 내실까지 다 들어갈 기세에 화들짝 놀란 마리아가 토니를 뒤로 미는데, 이지수 마리아. 오늘따라 무슨 파리 쫓듯이 두 손을 너무나도 맹렬하게 팔랑대지 뭐예요. 엉겁결에 어어, 하면서 주춤주춤 밀려나는 토니가 정말이지 귀여웠어요.

 

토니는 어떤 이름의 줄임말이야?

“안-톤?”

처음 물음표로 들려주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자주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다소 미약해졌지만 여전히 물음표인 어미가 오늘도 와주었어요. 

저는 이 물음표가 왜 이렇게 좋을까요. 산뜻하게 올라간 어미가 발끝을 달나라에 둔 토니 그 자체 같아서일까. 그냥 좋아요. 

 

 

Cool

쿨처럼 조명으로 무대의 한 부분을 완성하는 넘버에서는 조명지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는 재미가 있어요. 같은 동작을 해도 그림자가 사람의 형상보다 더 필사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때도 있고요. 쿨도 그렇더라고요. 벽면에 비추어지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던지..

우리 토니도 제트 현역이던 시절에는 그랬겠지 싶어서 잠시 울컥했어요. 토니의 쿨과 그 그림자를 볼 날이 와줄까요..?

 

 

닥 아저씨네 가게

“그래, 정정당당히.”

임정모 베르나르도, 정정당당하게 맨주먹으로 하자는 토니의 제안을 말로는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행동은 글쎄요. 토니 머리 위로 바짝 다가서며 제 체격을 과시하는 모습이 절대 순순하지 않아요. 모로 봐도 체격 차이로 위협하는 꼴이잖아요? 

제 뒤에 대고 떡하니 서는 베르나르도의 의도를 토니도 다 알아요. 말로 표현은 않지만 ‘할말하않’ 그 자체인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몰라요.

 

슈랭크 경위의 침입. 오늘 토니, 슈랭크 경위 보란 듯이 의자 읏챠 들어서 가게 문 닫는 척할 때 의자 들고 들어가다 말고 리프 쪽을 돌아보며 뭐라고 말한 걸까요? 두 눈은 동그랗게 키우고, 입술이 종알종알 잠시 바빴는데 입 모양을 읽지 못했어요.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으려나요. 왜 돌아본 건지 맥락만이라도 알고 싶어요.

 

 

Tonight (Quintet and Chorus)

드물게 중블에서도 음향이 컸어요. 덕분에 대합창의 기세가 다른 날보다 드높았어요(제가 받아들이기에요). 폭포수의 중심에서 마치 홍해를 가르는 듯하던 토니의 목소리도요. 

여타와 쉽게 섞이지 않는 시아준수 특유의 음색은 음량이 치솟을수록 빛을 발해요. 사방에서 합창이 쏟아져도 절대 휩쓸리는 법이나 묻히는 기색이 없거든요.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렇게 때로는 인도자가 되고 때로는 후원자가 되어가며 중심을 뒷받침해내요. 

 

 

The Rumble

싸움은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아. 싸우러 간 아이들도, 말리러 간 이도 모두 얻은 것 하나 없는 밤. 

다 망가진 밤. 

리프와 베르나르도의 시신을 번갈아 보다 토니가 털썩 주저앉아요. 오늘은 무릎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이미 마음이 나락에 있었어요. 주저앉으면서 크게 휘청했거든요. 비틀거림은 찰나였지만, 그 동작이 남긴 여운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달나라를 유영하던 몸이 균형을 잃고 천길 높이 아래의 지면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Somewhere 에서는 ‘그곳으로’가 다시 왔어요. 너와 나의 어딘가가 아닌, 너와 나의 그곳이요. 

다시 한번 듣는 그곳으로는 이전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개사된 게 아니라 부러 개사를 한 것만 같았거든요. 그곳으로 안에 담긴 눈먼 확신이 보다 단단했어요.

그래서 계속 곱씹는 중이에요.

시아준수의 토니가 ‘어딘가’를 ‘그곳으로’ 실체화해내기로 선택한 게 맞는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음 공연에서 분명 들려주겠지요. 항상 무대로 다 말해주는 사람이니까요. 다만 이제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여덟 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뿐이에요. 토니가 실체화해낸 그곳에서 우리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어느새 목전에 와있는 이별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눈 깜빡할 사이에 훌쩍 가버린 이 겨울만큼이나요. 

오빠의 뮤지컬 데뷔 이래 12년을 기다려 만난 ‘이 시대의 고전’과 안녕할 날이 머지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