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연표

혁명 전야

프랑스 대혁명

부르주아 공화국

나폴레옹 제국

복고왕정

7월 왕정

제2공화국
제2제국

파리 코뮌

1786년
1787년
1788년
1789년

1789년
1790년
1791년
1792년
1793년

1794년
1795년
1796년
1797년
1798년

1799년
1800년
1801년
1802년
1803년
1804년
1805년
1806년
1807년
1808년
1809년
1810년
1812년
1813년
1814년

1815년

 

 

 

 

 

1786년

8월 20일

재무총감 칼론, 왕가의 재정 파탄 선언, 개혁안 건의

12월 29일

명사회 소집

 

 

1787년

2월 22일

144인의 명사회 개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귀족에 대한 과세에 반대, 네케르 추방

5월

칼론의 방안과 귀족이 대립하며 회의는 교착 상태에 빠지고, 결국 칼론 실각. 마리 앙투아네트의 추천에 의한 브리엔 주교 등용

7월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 소집을 요구(1792)

11월 19일

오를레앙 공의 추방, 고등법원의 항의

 

 

1788년

4월

루이 16세가 국왕전권 재판소 신설, 파리 고등법원과 대립

6월 7일

지붕의 기와일: 그르노블 시 고등법원의 선언 "만일 브리엔의 명령이 집행되면 도피네는 왕에 대한 충성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르노블의 민중들이 국왕의 군대에 기와나 돌을 던지는 사건 발생

7월 21일

도피네 지방에서 삼부회 임의 소집, 다수결 표결의 방식 결의

8월

재무총감 브리엔의 지불정지선언

8월 8일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삼부회 소집(1789.5.1 예정)이 선포

8월 25일

브리엔 파면, 민중의 요구에 의해 네케르 재무 총감에 재취임. 이듬해 5월 삼부회 소집 결의. 방식은 도피네 지방과 달리 기존의 신분별 투표제로 확정

 

 

1789년

1월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출판. 베스트셀러로 등극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 개회

6월 12일

제3신분에 의한 대의원 위임장 단독 심사

6월 17일

제3신분에 의한 국민의회 설립 선언

6월 19일

제1신분 회의의 국민의회 합류 결의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 제3신분 의원을 중심으로 헌법 제정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 동시에 삼부회 폐회

6월 22일

제1신분 대의원 149명 국민의회 합류

6월 23일

루이 16세의 합동 회의장 등장. 국민의회 의원들에 대한 협박 및 명령

6월 24일

성직자 의원 추가 합류

6월 25일

오를레앙 공을 추종하는 귀족 의원 47명 합류

6월 27일

국왕이 제1신분, 제2신분(성직자, 귀족)으로 국민의회에 합류를 권고

7월 6일

헌법제정위원회의 설치

7월 9일

국민의회, 제헌국민의회로 개칭

7월 11일

네케르 장관 파면

7월 12일

앵발리드 병원 습격: 네케르가 파면되자 팔레 루아얄에서 데뮬랭이 이 시민에게 “무기를 들어라!”고 연설. 파리 민중이 앵발리드(보훈병원)를 습격하여 무장

 

 

혁명의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프랑스 혁명 발발)

7월 15일

파리 시장에 바이이, 파리 국민위병대에 사령관 라파예트가 선정

7월 16일

네케르 복직

7월 17일

루이 16세의 파리 방문, 혁명이 지방에 파급되며 대공포(그랑 풀: La grande peur) 시작

 

바스티유 점령 이후, 왕은 파리의 폭도가 임명한 새 시장 바이이와 국민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을 그대로 승인하고 시장 바이이가 건네주는 삼색 휘장을 받아 모자에 꽂았다. 왕의 파리 방문과 일체의 행동은 혁명의 승인이며 재가였다.

8월 4일

국민의회의 봉건제도 전면 폐기 선언. 그러나 실상으로는 봉건적 특권의 유상 폐지에 불과

 

8월 4일 밤 의회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일체의 탄압적, 이기주의적 주장을 봉쇄하고 의원들을 혁명과 열광과 감격의 도가니 속에 들끓게 했다. 프랑스 최대의 영주인 에기용 공작을 비롯한 많은 의원들이 잇달아 자기들의 봉건권과 특권의 포기를 의회 앞에서 선언하였다. 메티비에의 표현을 빌리면 "과거의 폐기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8월 11일

1789년 8월 법령 발표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 선언> 즉 프랑스 인권 선언 채택

9월 12일

마라 <인민의 벗>을 창간

10월 1일

폴랑드르 용병 연대를 위한 환영 파티

10월 5일

파리 민중의 베르사유 행진. 동일 오전, 국민의회의 국왕권에 대한 헌법권의 우위 결의. 이로써 국왕의 거부권에 대한 제한이 가결

10월 6일

국왕 일가가 베르사유에서 파리 튈르리 궁으로 강제 이전.

10월 12일

국왕과 함께 의회도 파리로 이동하기로 결정

11월 2일

국민의회, 교회 재산 몰수 및 국유화 법령 선언 (탈레랑 제안, 시에예스, 미라보의 지지)

12월 19일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담보로 정보 보증 지폐, 아시냐 발행

 

 

1790년

6월

파리 시 행정구역 개편

7월 14일

바스티유 사건 1주년 기념 전국민 연합제, 파리 샹 드 마르스 전국 연맹 축제. 탈레랑의 미사, 라파예트의 "프랑스인 동포를 하나로 묶고 자유와 헌법과 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모든 프랑스인을 국왕에게 연결시킨다"고 선언

7월 20일

국민의회, 교회 조직 개혁을 위한 성직자 민사 기본법 가결

 

이 종교 헌장은 교구를 개편하고, 주교와 사제를 일반 공무원처럼 선거 위원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성직자에게 헌장 준수 서약의 의무를 규정하였다. 그런데 많은 성직자가 이 서약을 거부하였다. 의회는 11월 27일령으로 선서거부자에게 공공 의식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령으로 선서 거부 성직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주민의 세례, 결혼, 장례가 일체 거행될 수 없었다. 이것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혼란을 의미하였다. 이 종교 혼란은 반혁명 진영에게 다시없이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이후 프랑스 혁명의 진전과정과 함께 골의 깊이를 더해간다.

8월 11일

십일조의 무상 폐지 결정

월 17일

프랑스 남부 잘레스에서 2만의 왕당파 방위의 무력 항쟁

8월

낭시 부대 사건의 무리한 진압으로 라파예트의 인기 하락

9월 6일

고등법원 폐지

10월 21일

삼색기를 프랑스 국기로 제정

11월 27일

국민의회, 11월 27일령에 의하여 모든 사제에게 성직자 민사기본법 충성 서약 의무화

12월 14일

봉건제 특권 폐지 선언에 대해여 오스트리아 황제가 비난 성명 발표

 

 

1791년

1월

자코뱅 클럽, 코르들리에 클럽에서 왕의 도망 계획 폭로. 국민의회의 국경 경비 강화 결의

2월 21일

의회에서 망명 금지법 논의 시작

3월 2일

동업자조합(길드)가 금지됨

3월 10일

교황 피우스 6세가 회칙을 통하여 종교 헌장 비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격 개시

4월 2일

미라보 사망. 국왕과 의회의 연락역이 없어짐

 

이러한 시기에 왕과 의회의 교량 역할을 해왔던 미라보가 4월 16일 급사하였다. 좌익의 입장에서는 왕의 앞잡이가 사라졌고 왕의 입장에서는 의회의 앞잡이가 사라진 셈이지만, 객관적 입장에서는 중도 세력의 중심인물이 사라진 것이었다. 국민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의 일반적 인기가 급속히 떨어지고 있고, 우익의 반혁명 공세가 왕의 도망 계획을 중심으로 국제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미라보의 급사는 좌우 양익의 간격을 메울 수 없게 만들었다.

6월 20일

국왕일가 국외 탈출 시도

6월 25

국왕일가, 바렌느에서 사로잡혀 25일 파리로 귀환(바렌느 사건). 이후 국왕에 대한 지지가 급속히 감소

 

왕과 일행은 민중의 포로가 되어 25일 저녁 수십만 파리 시민의 분노 속에 총을 거꾸로 메고 두 줄로 도열한 군인들 사이를 지나 튈르리 궁으로 되돌아왔다. 총을 거꾸로 메는 것은 초상의 표시로서 왕정의 장례를 의미하였다. 당시에 뿌려졌던 한 전단지에는 "누구든 루이를 모욕하는 자는 매를 맞을 것이고 그를 갈채하는 자는 목을 달아매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바렌느 사건 당시 프랑스 의회 밖에서 의회에 영향을 미쳤던 가장 유력한 정치집단

  • 헌법의 벗: 일명 좌익. 별칭 자코뱅 클럽. 가장 혁명적이며 이론적인 분자들의 집단
  • 1789년 헙회: 라파예트 중심의 중도적 사교 살롱
  • 입헌 왕정 클럽: 일명 우익. 입헌군주국가의 실현을 방해하고 절대왕권과 귀족의 봉건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

7월 15일

바르나브의 의회 연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불행한 죄악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자유의 선을 한 걸음 더 넘어서면 왕정의 파괴가 될 것이고, 평등의 선을 한 걸음 더 넘어서면 재산의 파괴가 될 것이다.

7월 16일

푀양 클럽 창설

 

자코뱅 클럽의 첫 번째 분리:

  • 자코뱅 클럽: 로베스피에르와 페티옹 같은 과격파만의 자코뱅 클럽
  • 푀양 클럽: 바르나브와 행동을 같이한 라메트 일파와 라파예트 일파와 함께 새로 만든 것. 다시 삼두파와 라파예트파로 분리.

7월 17일

샹 드 마르스의 학살, 푀양 클럽, 이른바 삼두파가 권력의 전면에 대두

8월 27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공동 필니츠 선언

 

(필니츠) 성명을 발표한 당사자들로서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하나의 협박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프랑스 국민에게는 심리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프랑스 국민과 파리 시민이 어떤 기분으로 필니츠의 성명을 받아들였겠는가를 이해하기는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9월 3일

1791년 헌법 제정. 입헌군주제로 전환

 

91년 헌법은 인민주권의 원리를 지나칠 정도로 널리 적용하여 입법부는 물론 사법부와 지방자치제에 이르기까지 선거제를 채택했으나, 국민을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양분하여 능동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문벌 중심의 귀족 제도를 타도하는 혁명에 앞장섰던 가난한 민중은 이제 부라는 새로운 귀족 제도의 출현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9월 14일

국왕이 새 헌법을 비준, 선서

9월 30일

헌법제정국민의회 해산

10월 1일

입법의회 소집 (~1792.09.05)

 

자코뱅 클럽의 두 번째 분리:

  • 지롱드당: 브리스, 콩도르세가 이끄는 온건파
  • 자코뱅당: 로베스피에르, 쿠통의 철저한 민주파

 

입법의회에는 이미 성취한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고 구제도를 회복하려는 반혁명 세력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당이라고 볼 수 있는 푀양파에는 일찍부터 두 갈래의 대립이 나타났고 그 분열에 힘입어 좌익이 현저히 진출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 입법의회 앞에는 헌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1791년 헌법에 의하여 구성된 입헌군주정과 당시 프랑스의 핵심 권력 기관이었던 입법의회가 당면한 문제들:

1. 봉건제의 유상 폐지로 인한 농민의 실망과 그에 따른 폭동

2. 선거를 반대한 선서 거부 성직자들의 소요

3. 혁명정부에 대한 망명 귀족들의 노골적인 군사 위협

 

 

1792년

3월 10일

지롱드파 내각 출범

4월 4일

입법의회, 뮬라토와 흑인을 포함한 모든 자유인의 평등을 결의

4월 20일

입법의회, 대 오스트리아 선전 포고 결의. 프랑스 혁명 전쟁 개전

 

전쟁을 반대한 것은 자코뱅의 좌파 로베스피에르뿐이었고 지로드파도 푀양파도, 왕비와 왕도 모두 전쟁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주전론자가 전쟁을 주장하는 이유는 모두 달랐다.

4월 25일

<라 마르세예즈> 작곡

6월 13일

루이 16세가 지롱드파의 장관을 파면. 푀양파 내각 성립

 

왕과 푀양파는 지롱드파 대신들을 몰아내고 푀양파 일색의 개각으로 대항하였다. 일선에서는 패전의 보도만 들려오고 있었다.

6월 20일

테니스코트의 서약 3주년 기념식 및 지롱드당의 조종 하에 파리 민중의 튈르리 궁 난입 사건 발생, 이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여 자코뱅파의 파리 시장 페티옹 파면

7월 10일

라파예트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면서 푀양파 내각 총사퇴

7월 11일

입법의회, "조국은 위기에 놓여 있다"고 선언, 비상사태 결의. 의용병에의 호소

 

자코뱅당은 위기가 절박함을 눈앞에 보고 잠시 당내의 분열을 잊었다. 브리소와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 클럽의 단결을 호소하여 라파예트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의회는 푀양 내각에 패전의 책임을 묻고, 프랑스의 모든 행정기관의 공개를 명령하였다. 7월 10일 푀양 내각이 총사퇴하고 11일 의회는 "조국은 위기에 놓여 있다"고 선언하여, 프랑스 국민 방위대 전원에게 무장을 명령하였다.

7월 13일

페티옹의 파리 시장 복직

7월 25일

로베스피에르가 입법의회의 즉시 해산과 헌법 개정 및 국민공회의 소집 요구

8월 3일

브라운 선언/브룬스비크 성명: 프로이센 군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국왕 일가를 위해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고 성명

8월 5일

생탕투안 구의 의회와 왕에 대한 최후통첩

8월 9일

연맹병과 국민 방위대와 수동 시민의 봉기, 파리 시의회 장악

8월 10일

8월 10일 사건: 민중이 튈르리 궁전을 습격, 파리 시의회(즉 파리 코뮌)가 프랑스의 실권자로 등장

 

왕정을 수호하여 입헌군주 체제의 테두리에서 혁명을 성취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라파예트와 함께 몰락하였다.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주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sans-culotte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

8월 11일

국왕 일가를 탕플 탑에 유폐하고 왕권을 정지

 

지롱드파 내각 부활. 여섯 명의 장관 취임

 

왕권이 정지되었으니 집행권자가 필요했다. 여섯 명의 대신들로 임시정부가 짜여졌다. 내무에 롤랑Jean-Marie Roland de La Platiere, 외무에 르브룅Albeart Lebrun, 재무에 클라비에르Etienne Claviere, 법무에 당통, 육군에 세르방Joseph Servan, 해군에 몽주Gaspard Monge였다. 이들은 이제 대신이라고 칭하기보다 장관이라고 칭해야 했다. 왜냐하면 왕정은 없어지고 이들을 임명한 것은 왕이 아니라 의회였기 때문이다.

8월 26일

2만 5,000명의 선서 거부 성직자가 8월 26일령에 따라 26일로부터 2주일 내에 외국으로 추방

9월 2-7일

9월 학살: 몇 군데의 감옥에서 반혁명 용의자를 민중이 학살

 

9월 2일 밤부터 연맹병은 감옥들을 차례로 찾아 선서 거부 성직자를 비롯한 수감자들을 약식 재판에 의하여 처형하였다. 처형 대상자는 마라의 감시 위원회가 이미 골라놓고 있었다. 피살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으나 1,100 내지 1,400으로 추계되고 있다. 국민 방위대와 파리 코뮌, 의회와 임시정부는 학살을 방관하거나 방조하였다. 사람들은 이 끔찍한 학살을 태연히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티에에 의하면 숭고한 정신과 악마의 잔인함이 나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자코뱅파 분리의 심화:

  • 브리소의 지롱드파: 지롱드파의 혁명 이념은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의 절대를 비롯한 시민적 자유에 있었다.
    9월 학살 후부터 지롱드당이 보수화하여 자코뱅당 좌파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의회는 6월 20일 이후 두 번에 걸쳐, 왕당 지지 청원서에 서명한 6,000명과 2만 명의 명단을 발표하여 그들의 피선거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는데, 이제 지롱드당은 의회에서 2만 6,000명의 명단의 원본을 파기하기로 결의하였다.
     
  •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사유권을 자유로이 행사하려고 하여도 소유한 것이 없는 민중에게도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유와 함께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정치적 평등의 실현에 있었다.

9월 20일

보통 선거에 의한 국민공회 소집 (~1795.10.26)

 

새 헌법의 원리는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의회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리 코뮌의 지도자는 코뮌을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입각한 법무장관 당통이었다. 당시 당통은 자코뱅 클럽의 좌파로서 로베스피에르와 단짝이었다. 그리고 코뮌에 신설된 감시 위원회의 실력자 마라도 한패였다.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승리 (발미 승리)

 

프로이센군의 전진을 발미에서 막았을 때, 이는 왕정 이외의 질서는 무질서와 무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낡은 관념을 불식시키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발미의 승리는 전술적 승리가 아니라 정신적, 정치적 승리였다. 발미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은 온 전선에서 반격하여 적군을 프랑스의 영토에서 몰아낼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제국가들을 무너뜨렸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프로이센 군영에서 발미의 전투를 지켜보고 "이날 이곳에서 세계사에 새 시대가 시작한다"고 기록하였다. 도그마와 권위에 안주하고 있던 낡은 질서가 자유에 바탕을 둔 새 질서 앞에 물러가고, 피동적으로 훈련받은 직업군인의 자리에 인간적인 자부심과 국민적인 독립심에 고무된 새 시민군이 출현하였다. 저쪽에는 왕과 신권이 있었고 이쪽에는 인민과 인권이 있었다.

9월 21일

국민공회의 공화정 수립 선포: 프랑스 제1공화국 수립, 프랑스 혁명 정부 ~1804.5.18, 왕정 폐지, 1791년 헌법 폐지

 

국민공회는 개원 다음 날 왕정의 폐지와 공화국의 선포를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관한 몇 가지 결의에 보조를 맞춘 후, 혁명을 왕당파로부터 지키려는 9월의 목표가 완전히 성취되자 곧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로 분열하였다. 10월 10일 자코뱅 클럽은 지롱드파를 제명하였다. 자코뱅 클럽은 지롱드파를 제외한 좌파 일색의 클럽이 되었다. 자코뱅 클럽은 낮에 공개 회의를 열었고, 지롱드파는 밤에 비싼 비밀 살롱에서 모였다. 자코뱅은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었으나, 지롱드는 돈의 특권을 지키려고 하였다.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개원 후 두 번의 선거에서 모두 이기며 우세를 이어갔다.

10월 2일

국민공회, 보안위원회 설치

11월 7일

왕실비 지불 내역과 관련한 문제로 왕의 재판 회부 여부에 대하여 자코뱅과 지롱드가 충돌

11월 13일

생 쥐스트의 의회 연설

 

생쥐스트Louis Antoine Leon de Saint-Just는 의회에서 법적 입장에서는 왕의 재판이 불가할지 모르나 우리는 재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왕은 프랑스 국민의 피고가 아니라 적이라고 규정하였다.

11월 19일

벨기에 합병

11월 20일

튈르리 궁에서 비밀문서 상자가 발각

 

왕의 재판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제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파리 코뮌은 지롱드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코뮌은 점점 더 산악파로 기울어져 갔다. 원내에서도 많은 의원이 이탈하기 시작하여 국민공회 안에는 자코뱅과 지롱드의 중간 세력이 제3당으로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지롱드는 공회를 더는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12월 20일

루이 16세의 ‘범죄’가 의회에 보고

 

지롱드파는 루이의 사형은 유럽 전체를 봉기하게 만들 것이므로 혁명의 방위를 위해서라도 사형만은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그 후의 역사가 증명하듯 정확한 판단이기는 했으나 설득력이 없었다. 설득력이 없었던 이유는 지난 4월 전쟁을 시작할 때 지롱드파는 전쟁이 유럽 여러 나라로 번지기만 하면 그곳 국민이 혁명 사상에 자극을 받아서 전제주의 타도의 봉기를 일으킨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롱드파의 주장은 일관성이 없었던 것이다.

 

 

1793년

1월 1일

국민공회, 국방위원회 (공안위원회의 전신) 설치

1월 14일

국민공회, 국왕의 유죄 확정

 

왕의 재판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제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파리 코뮌은 지롱드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코뮌은 점점 더 산악파로 기울어져 갔다. 원내에서도 많은 의원이 이탈하기 시작하여 국민공회 안에는 자코뱅과 지롱드의 중간 세력이 제3당으로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지롱드는 공회를 더는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1월 21일

국왕 루이 16세 처형

2월 1일

국민공회,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

2월 13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등의 제1차 대 프랑스 동맹 결성

3월 3일

리옹의 반란: 리옹에서 반혁명 폭동 발생

3월 7일

국민공회, 스페인에 선전 포고

3월 10일

국민공회, 혁명재판소 설치

 

파리 국민 방위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설치된 혁명재판소는 판사와 배심원 모두를 공회가 입명하고, 일체의 반혁명적 기도나 공화국의 안전을 침범하는 모든 음모를 재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혁명재판소의 재판은 단심으로서 상소가 허락되지 않았다.

 

혁명재판소의 설치와 같이 이미 일련의 혁명적 장치를 마련해 놓은 기반 위에서 이후 공안위원회를 또 설치하게 되었으니, 방데의 반란은 혁명의 과격화와 산악파에 의한 공포정치에의 길을 열어주는 결과가 된다.

 

방데 반란 발생

 

군사적으로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1792년 9월 하순 이래의 승리의 기세가 1793년 봄부터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국내적으로는 서부의 방데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이었으며, 군사적인 이유로는 병력의 격감과 뒤무리에 장군의 배신을 들 수 있다.

 

반란의 직접 원인은 2월 24일 30만의 모병을 결의한 의회의 모병령이었다. 명색은 모병이었으나 실은 강제 동원이었다. 3월 10일 방데 지방에서 무장 농민이 모병 반대 폭동을 일으켰다. 국민 방위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선서 성직자와 공무원을 살해하고 공문서를 불사르는 등 반혁명 폭동이 그 지방 일대로 번졌다. 서부 일대는 가히 혁명파와 반혁명파의 내란을 방불케 하였다.

4월 5일

국방위원회 폐지, 공안위원회 신설. 자코뱅의 실권 장악

 

방데의 반란, 뒤무리에의 배신, 벨기에와 라인 지방의 패전으로 공화파 국민은 미온적인 지롱드에서 이탈하여 산악파로 기울게 되었다. 산악파도 한결 더 좌경화하여 앙라제파의 과격한 요구를 들어주었다. 의회 안에서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이 한결 더 날카로워졌다. 의회는 뒤무리에가 적국으로 도망한 이튿날 4월 5일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강력한 집권 기구로 공안위원회를 신설하였다. 공안위원회는 토의가 비밀이고, 긴급한 때는 국방 장관의 권한을 행사했다. 공안위원회가 결정을 내리면 행정위원회는 이를 지체 없이 집행해야 했다. 지롱드파는 공안위원회의 설치를 독재라고 외쳤으나, 마라는 "과격한 방법밖에는 자유를 수립할 길이 없지 않은가. 여러 나라 왕들의 전제를 타도하기 위해선 일시 자유의 전제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왔다"고 응수했다.

4월 13일

지롱드파가 마라를 고발, 혁명재판소에 회부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권력투쟁 점화

5월 20일

부유층의 재산을 강제모집, 분배

6월 2일

지롱드파 숙청, 망명자의 재산 강제 매각

 

지롱드파의 연방제의 반란은 결국 방데의 반란에 이어 혁명을 결정적으로 공포 정치로 돌진하게 만들었다. 종래에는 반혁명 혐의자는 왕당파뿐이었는데, 이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롱드파도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제는 누가 진짜 애국자이며 누가 가짜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여기 반혁명의 혐의와 피의 숙청이 확대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었다.

6월 24일

공화국력 1년 헌법 (1793년 헌법) 제정

7월 10일

공안위원회를 보좌할 치안위원회 설립

7월 12일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 발생

7월 14일

장 폴 마라 암살

 

방데의 반란이 혁명정부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공포정치로 제1보를 내디디게 했다면, 지롱드파의 연방제 반란은 결정적으로 공포정치로 제2보를 내디디게 했던 것인데, 이제 그 제3보를 불가피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마라의 암살이었다. 7월 14일에 벌어진 마라의 암살은 산악파에게 자파의 간부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7월 17일

봉건적 특권의 무상 폐지 결의. 이를 통하여 봉건영주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 공안위원회에 참가

8월 23일

국가총동원령 선포

9월 5일

공포 정치 (~1794 07.27). 반혁명 분자들의 재판을 촉구하는 상퀼로트의 시위

9월 17일

혐의자법 반포 : 반혁명분자의 범위를 넓히고, 반자코뱅 움직임 탄압

 

공안위원회는 지체 없이 혁명재판을 4부로 분담시켜서 신속시 진행시키는 한편 에베르가 영도하는 극좌파의 추진에 따라 협의자법을 제정하고 공안위원회의 절대 우월권을 확립하였다. 혐의자법은 지금까지 반혁명 혐의자에 관한 정의가 없었던 결함을 법적으로 보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의가 매우 추상적이고 광범위했으므로 무고한 국민까지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혐의자법은 공안위원회의 무서운 독재 수단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9월 25일

공안위원회가 군 통수권 장악

9월 29일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여 곡물의 최고가격제 실시

10월 3일

국민공회 의원 136명 제명, 41명 혁명재판에 회부

10월 10일

혁명 정부 선언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하여 왕당파와 지롱드파의 잔당 처형

10월 22일

최고가격제를 둘러싼 내부의 분열

11월 24일

프랑스 혁명력의 채용 결정

 

혁명정부는 혁명력(공화력)을 제정하여 전해인 1792년 9월 22일을 새 역법의 설날로 정하였다.  1년을 열두 달, 한 달을 30일, 한 주일을 10일로 나누고 그 끝날을 휴일로 하고, 연말의 5일을 상퀼로트의 날로 정하여 공휴일로 하였다. 달의 명칭도 전통적인 이름을 버리고 계절의 특징을 따라 붙였다. 1월 포도의 달(방데미에르Vendemiaire), 2월 안개의 달(브뤼메르Brumaire), 3월 서리의 달(프리메르Frimaire), 4월 눈의 달(니보즈Nivose), 5월 비의 달(플뤼비오즈Pluviose), 6월 바람의 달(방토즈Ventose), 7월 파종의 달(제르미날Germinal), 8월 꽃의 달(플로레알Floreal), 9월 목초의 달(프레리알Prairial), 10월 수확의 달(메시도르Messidor), 11월 더위의 달(테르미도르Thermidor), 12월 결실의 달(프뤽티도르Fructidor)이었다.

 

프리메르 14일 법률 통과

12월 4일

리옹 대학살

12월 18일

툴롱 탈환, 24세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첫 등장

 

 

1794년

1월 19일

영국군, 코르시카에 상륙

2월 4일

프뤼비오즈 16일 법률 통과: 전 프랑스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도 폐지가 결정

2월 26일

생 쥐스트의 의회 연설

 

생 쥐스트의 주장에 의하면, 공포정치는 전쟁이 끝나면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건설에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시민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빈곤한 애국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그는 "공화국의 적으로 간주된 자들의 재산은 몰수한다"고 결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방대한 수의 반혁명 혐의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것을 돈 없는 애국자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거대한 사회혁명 프로그램이 구상되었다. 이 혁명 프로그램에 의하여 시민 제도가 확립되고 그 시민 제도에 의하여 시민정신이 뿌리를 박을 것이었다. 거기서 비로소 이기주의와 지배욕과 탐욕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허위의 자유는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것이었다. 이 위대한 사업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포정치이기 때문에 상쥐스트에게 공포정치는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이었다.

 

당시 혁명파 안에는 내분이 점차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익의 당통파는 공안위원회를 개편하여 로베스피에르파를 누르고 정권을 쥔 다음 전쟁을 그만두고 혁명을 청산할 계획을 세워놓고 이에 매진하고 있었다. 당시 좌파는 에베르가 대표하고 있었다. 당통파와 에베르파의 싸움은 파리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으로 번졌다.

2월 26일

방토즈 법 통과: 반혁명 용의자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빈곤한 시민에게 무상 분배

3월 24일

에베르 일파 (자코뱅 좌파) 처형

 

에베르 일파는 당통파와 대립하며, 당파적 야심과 개인적 원한을 푸는데만 열중했다. 공안위원회가 좌익의 에베르파와 우익의 당통파의 중간에서 갈 길을 찾아 헤매다 결국 우익을 탄압하고 좌익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후에도 에베르 일파는 생쥐스트의 사회 프로그램의 실현에 협력하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에베르파의 코르들리에 클럽은 로베스피에르파에 반기를 들고 민중봉기를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제2의 9월 학살, 군부의 장악, 공안위원회와 치안위원회의 소각, 독재관의 임명 등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에베르 일파는 21일 재판에 회부되고 24일에 처형되었다.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을 단두대에서 찾던 그들은 스스로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다.

4월 2일

당통의 재판 시작

4월 5일

당통, 데뮬랭 등 자코뱅 우파 처형

5월 8일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 처형

6월 4일

샹 드 마라스에서 최고 존재 축제 개최

6월 10일

프레리알 22일 법률 제정

 

프레리알 22일법은 혁명재판에서 피고의 변호와 예비 신문을 폐지하고, 배심원의 결정은 심증만으로도 충분하게 하고, 혁명의 적에 대한 범위를 한결 더 확대하였다. 이는 공포정치에 날개를 달아주는 법령이었으며 공안위원회에 대한 치안위원회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반동: 국민공회가 로베스피에르 일파 비난 결의를 채택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쿠통, 르 바 등 22명 처형. 방토즈법과 프레리알 22일의 법률 사실상 소멸

 

산악파는 에베르와 당통을 제거하고 이제 로베스피에르마저 제거했으니 세 번이나 내부의 분열을 경험한 셈이었다. 산악파는 출혈이 너무 심하여 이제는 그 힘이 극도로 약해졌다.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협력한 평원파가 어김없이 간파한 사실도 그것이었다. 평원파는 이제 자체의 힘만으로도 국민공회의 다수당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산악파는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순간 그 힘이 동맹자인 평원파를 누를 수 없을 만큼 약화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발견한 평원파는 로베스피에르의 제거와 함께 산악파를 포로로 하여 공포정치를 후퇴시키기 시작하였다. 테르미도르 산악파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을 때는 이미 늦었다. 혁명은 벌써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 고삐는 자기들의 수중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평원파 득세

 

이제는 평원파의 탈리앵, 프레롱, 바라스, 시에예스, 티보도, 부아시 당글라 등이 권력의 중심부에 등장하였다. 이들 평원파는 부르주아 출신들로서 혁명과 공화국을 왕당파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려는 의사는 강했으나, 방토즈법이 보여준 바와 같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왕정의 회복 못지 않게 두려워하였다. 서민 계급과의 협력 없이 혁명과 공화국을 왕당파의 반동에서 지킬 수 있느냐 하는 현실적 문제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여 서민 계끕의 정치적 진출을 극력 저지하였다.

11월 11일

뮈스카댕의 반자코뱅 테러

 

뮈스카댕은 부잣집 청년 건달패로서 내심으로 왕당적인 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국민공회의 보수적인 조치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우익 과격파였다. 그들은 지방에서 폭력으로 자코뱅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11월 12일

국민공회, 자코뱅 클럽 폐쇄 명령

11월 13일

혐의자법, 최고가격법 폐지

 

 

1795년

4월 1일

제르미날 12일의 폭동: 파리 상퀼로트의 봉기. 1793년 헌법의 실시와 식량을 요구하는 민중이 공회에 난입, 군대에 의해 진압된다.

5월 20일

프레리알 1일의 폭동1793년 헌법의 폐기가 공식 확정되자 상퀼로트와 자코뱅파 잔당들이 앞서보다 조직적으로 일으킨 봉기. 공회가 소집한 방위대에 의해 강제 진압.

5월 31일

명재판소 폐지

 

혁명재판소의 재판은 완화를 거듭하다가 결국 폐지되었다. 파리의 행정구역은 48 섹시옹에서 12아롱디스망으로 재정비되어 파리 코뮌을 무력화하였다. 이런 자코뱅파의 몰락은 상퀼로트의 퇴각을 의미하였다. 자코뱅의 평등주의적 이념도 함께 사라졌다.

6월 24일

왕당파, 루이 18세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성명서 발표

 

왕당파는 혁명의 보수화를 자신들이 재기할 기회로 잘못 판단하여 갖가지 음모에 열중하였다. 이 음모가 이겅가고 있을 때 독일에 망명 중이던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 95년 6월 8일에 죽었다. 왕당파는 그를 프랑스의 왕 루이 17세라고 부른 터였다. 이제 그의 왕위를 상속할 자는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었다. 백작은 이제 루이 18세라 일컬으며 서부 프랑스에서 슈앙Chouans이란 왕당파를 조직하여 6월 24일에는 시해파의 처형과 삼부회의 재건 및 앙시앵레짐의 회복을 약속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9월 23일

공화국력 3년 헌법 (1795년 헌법) 제정보통선거에서 후퇴한 능동적 시민에 의한 참정권 제도 부활. 직접 세금을 내는 21세 이상의 남자에게 선거권이 인정

 

테르미도르파의 공화국은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었으나 민주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내세운 정책은 상퀼로트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물리치는 동시에 왕당파의 왕정복고도 거부하면서 부르주아적 규범 안에서 혁명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오른편에서는 왕당파의 공격을 받고 왼편에서는 서민계급의 압력을 받았다. 이 공격과 압력을 적절히 배제하면서 부르주아적 정치체제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테르미도르파의 정책은 시종 안정성이 없고 늘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다. 이런 정치체제가 쿠데타를 반복하다가 혁명의 본질적 획득물인 1789~1791년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하여 드디어 나폴레옹에게 인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말을 바꾸면, 테르미도르파의 이상은 국왕 없는 입헌군주주의였따. 이 모순을 해결할 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보나파르티즘이었다. 186-7p.

 

공화 3년 헌법의 원리는 민주주의로의 길을 막고 독재의 수립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 헌법은 1789년의 인권 선언에 기록된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기본 조항을 버리고, "평등은 법이 만인에게 동일하다는 데에 존재한다"고 하여, 평등을 사법적인 것으로 후퇴시켰다.

10월 5일

방데미에르 13일의 반란: 왕당파의 봉기. 나폴레옹 등이 진압

 

국민투표제는 왕정 반대라는 공화주의 정신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국민투표제만으로는 철저히 유산계급에게 유리한 보수적인 선거제도를 통한 왕당파의 복귀를 막을 수 없었다. 따라서 왕당파의 복귀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3분의 2법'이었다. 이것은 새 입법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의석은 반드시 현재의 국민공회 의원에 의하야 재선되어야 한다는 법이었다. 만일 선거에서 이 3분의 2가 재선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임명으로 채워지도록 규정했다. 왕당파는 이 법에 반대하였다.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3분의 2법' 반대의 큰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파리 시민의 생활고와 불만을 충분히 이용한 왕당파는 '3분의 2법'의 불법성을 들어 대대적인 반란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6일

총재정부 성립 (~1799 11.09), 국민공회 해산

 

 

1796년

3월 11일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 시작

5월 10일

바뵈프의 음모 발각, 바뵈프를 비롯하여 음모에 관련된 인물 체포

 

이러한 일련의 탄압 정책으로 총재정부는 좌익의 지지를 잃고 그 반동으로 왕당파에 활동의 기회를 주었다. 총재정부는 왕당파의 움직임을 과히 위험시하지 않았다. 왕당파가 폭력에 의한 반란 대신에 선거에 의한 탈권 정책으로 전략을 전환한 사실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797년

4월

총재정부 성립 후 첫 선거 실시, 왕당파의 대거 등장

7월

의회, 선서 거부 성직자 단속령 취소

9월 4일

나폴레옹의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 군과 정부의 유착관계 형성

 

방데미에르 반란에서 본 바와 같이, 군부가 중요한 정치적 요소로 대두하고 있었다. 반혁명 반란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혁명 이념을 외국으로 퍼뜨린 것이 모두 군대였다. 개선장군들은 국민적 영웅으로 숭앙되었고, 정치가들은 장군들의 요구와 의사를 점차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개선 장군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구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방데미에르 반란 진압에서 군사적 역량과 공화적 태도를 파리 시민에게 과시하여 일약 명성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어 그 세가 더욱 커져 있었다. 총재정부 3인조는 나폴레옹에게 요청하여 왕당파의 숙청을 감행하였다. 총재정부는 왕당파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공화국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오로지 군부의 힘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들은 혁명적 독재를 재건했으나 그 권력은 군부의 지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제2차 총재정부는 야심적인 장군들을 제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9월 5일

제 2차 총재정부 성립

10월 17일

캄포 포르미오 조약 체결. 오스트리아와 강화

 

 

1798년

5월 11일

플로레알 22일의 쿠데타, 나폴레옹의 좌경세력 제거

 

1798년의 선거 결과 자코뱅파가 다수를 얻었다. 총재정부는 새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채 선거 조사령을 제정하여 새로 선출된 의원 106명을 과격파라는 명목을 붙여 제거하였다. 이 불법적인 조치를 플로레알 22일 쿠데타라고 하는데, 이 쿠데타로써 총재정부는 간신히 그 중도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의회의 좌경화는 막을 수 있었으나 진지한 공화파의 지지를 잃었다.

 

정치적 안정을 확보한 총재정부는 재정의 균형을 꾀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교육의 향상과 산업의 발전에 진력하여 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프뤽티도르 쿠데타와 플로레알 쿠데타에 각각 피해를 입은 왕당파와 자코뱅은 총재정부에 대한 무장을 풀지 않고 총재정부의 진지한 노력에 결코 만족을 보이지 않았다.

5월 19일

나폴레옹의 이집트-시리아 원정 (~1801)

12월 24일

제2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1801 02.09)

 

 

1799년

1월

제2차 이탈리아 전쟁 (~1801 02.09)

제르미날 선거 실시

6월 18일

프리레알 30일의 쿠데타: 플로레알 22일의 우경화 조치에 반대하는 움직임.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실권을 쟁취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이 비상 조처는 지난번의 플로레알 쿠데타의 우경화에 대한 의회의 복수로서 쿠데타라기보다는 의회 혁명이었다. 바라스 이외의 새 총재정부가 모두 새 의회에 의하여 선출되었으니, 의회의 다수당이 행정부를 구성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레리알 쿠데타는 말하자면 의회주의적 성격의 쿠데타였다.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총재정부 전복, 제1통령 등극. 통령정부 성립 (~1804 05.18)

 

공화국 3년 헌법의 한계:

안으로는 정치적 사회적 혁명의 와중에 있고 밖으로는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에서 공화 3년 헌법과 같은 중도적 공화주의 헌법이 과연 순조롭게 실시될 것인가는 당초부터 어려운 숙제였다. 공화국 3년 헌법은 상퀼로트에 기반을 둔 1789년 헌법의 민주주의 정신을 짓밟고 거꾸로 1789년 혁명의 부르주아적 전통, 즉 공화주의가 아닌 입헌군주주의의 혁명 이념에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공화국 3년에는 군주가 목이 잘려 없어진지 오래였으므로 부득이 군주 없는 입헌군주주의 헌법의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왕당파와 자코뱅파가 선거 때마다 진출하여 그 헌법을 위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동시에 헌법을 지키기 위하여 쿠데타가 연발한 이유도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었다. 결국 공화국은 나폴레옹이라는 군사적 영웅의 독재에 의하여 말살되고 말았다.

 

공화국 3년 헌법의 소멸:

혁명의 지지 기반인 부르주아지와 농민은 이제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더 과격하지 않고 더 강력한 정부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 마음을 배경으로 하여 5인 총재의 한 사람인 시에예스가 계획한 것은 헌법의 개정이었다. 이것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이다. 이로 인하여 불과 다섯 달 전에 프레리알 쿠데타로 간신히 확보되었던 공화국 3년 헌법이 깨지고 만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프레리알 쿠데타로 인하여 자코뱅 클럽이 재건되고, 산악파의 공초정치와 1793년 헌법이 두둔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왕당파 뿐만 아니라 혁명의 수혜자인 신흥 부르주아지에게도 불만을 주었다. 또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과 연합국의 반격 앞에 프랑스는 대외적으로도 매우 불리해졌다. 이렇게 내외의 정세가 불리하게 움직이는 틈을 타서 우익의 쿠데타 음모가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이 선두에 선 자가 5인 총재의 한 사람인 시에예스였다.

12월 18일

공화국 8년 헌법 공포

 

12월 12일 나폴레옹은 제헌 위원회와 시에예스를 공관으로 소집하여 미완성인 초안을 낭독시킨 후 거기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헌법의 제정도 쿠데타의 방식이었다. 그는 국민을 명령에 따라 재빨리 움직이는 병사들로 여기고 자신을 그 부대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한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구성되는 국가에 체계적이고 정교한 헌법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공화국 8년 헌법:

공화국 8년 헌법은 제95조에 국민투표의 인준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전에 이미 발포되었다. 국민투표는 기정사실의 추인 절차에 불과했고, 독재를 국민주권에 임각한 것처럼 위장하는 선전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위장은 헌법 자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헌법은 얼핏 보기에 국민주권의 원칙에 따른 보통선거제의 의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통령정부의 모든 기구와 관직은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이 임명한 통령들이 임명하였다. 이런 입법부를 어떻게 국민주권의 원칙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800년

2월 17일

지방자치제도 전면 폐지

 

도지사, 군수, 면장은 물론 각급 지방의회 의원도 선거에 의하지 않고 제1통령이 직접 임명하였다. 이 새 행정제도는 중앙집권과 국가적 통일을 급속히 촉진시켜 앙시앵레짐의 지방성은 물론이고 혁명 과정에서 일어났던 연장베 같은 분권주의를 말끔히 씻어버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도로, 교량, 운하, 항만 등의 눈부신 건설로 문물의 교류를 신속하게 한 물질적 경제적 개혁에 병행하여 프랑스의 자본주의와 국민주의를 크게 자극하였다.

5월 8일

제2차 이탈리아 전쟁

6월 14일

마렝고 전투 승리

 

나폴레옹의 이름과 영광은 본래 이탈리아 정복에서 유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탈리아가 지금은 다시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탈리아를 재탈환하는 것은 나폴레옹의 구미에 맞는 일일 뿐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기에 꼭 알맞은 일이었다.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밀라노에 입성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두 군대의 결전이 벌어진 것은 6월 14일 마렝고 평원에서였다.

 

마렝고의 승리는 군사적 승리에 머물지 않았다. 파리는 한때 나폴레옹이 패했다는 소문과 함께 왕당파의 쿠데타 설에 공포에 휘감겼다.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패했더라면 권좌에서 쫓겨났을 것이 분명하다. 파리가 마렝고의 승전보를 접한 것은 6월 20일이었다. 파리는 전승의 기쁨과 함께 왕당파의 쿠데타의 공포에서 해방된 환희에 넘쳤다. 나폴레옹 타도의 음모에 가담한 왕당파 쪽 사람의 말을 빌리면 마렝고는 나폴레옹 개인의 권력을 성별해주었다. 마렝고의 승리자는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거인이었다.

 

 

1801년

2월 9일

프랑스-오스트리아 뤼네빌 조약 체결

 

이 조약은 벨기에, 이탈리아 및 라인 지방의 영토 할양에 관한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확인하는 것으로서, 일찍이 나폴레옹이 정복했다가 총재정부가 잃었던 것을 이제 다시 회복하였다. 이탈리아의 지배자는 다시 프랑스가 되었다.

7월 16일

로마-파리 종교협약 체결

 

협약은 실시하기까지 세부적인 갈등과 문제가 적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1817년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을 뿐 1905년까지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의 관계를 유지시킨 중요한 협정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노린 정치적 목적들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교황은 프랑스를 세속화하려는 보나파르트의 위협을 막았고 보나파르트는 가톨릭교를 프랑스의 국교로 선언하려는 교황의 욕구를 좌절시킨 동시에 교황으로 하여금 프랑스 공화국을 승인하게 하였다. 이 협약이 발표되어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들과 신도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하게 됨으로써 왕당파는 나폴레옹 체제를 반대할 구실을 잃게 되었다. 왕당파가 대체로 열렬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종교 협약이 왕당파에 미친 정치적 영향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223-4p.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영국, 아미앵 조약 체결: 왕정제 국가들의 대 프랑스 동맹 결렬

 

이 조약은 프랑스에 유리하였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왕자가 되었다. 외무 장관 탈레랑은"아미앵의 평화 시기에 프랑스는 그 군사적 우월권에 의하여 어떤 야심가라도 그 이상 더 바랄 수 없는 권력과 영광과 세력을 해외에 떨쳤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매우 신속히 이뤄진 사실이다. 2년 반 미만에... 프랑스는 총재정부 시대에 추락했던 밑바닥에서 이제 유럽 최고의 자리로 상승했던 것이다."

4월 8일

종교법 공포

4월 18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부활주일 예배 거행

4월 26일

골수분자 1,000명을 제외한 망명자 정부 전원 사면

8월 2일

나폴레옹, 종신 통령에 임명

 

5월 6일 호민원이 공화국 제1통령에게 평화와 국가 재건의 위대한 사업에 대한 '국민의 감사'를 결정하고, 이틀 뒤에는 이 결정 보고를 받은 원로원이 제1통령의 임기를 10년 더 연장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문제에 관하여 협의를 받은 참의원은 국민투표의 의제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종신 통령으로 함이 어떤가"로 고쳤다. 호민원도 원로원도 아무 이의가 없었다. 8월 초 국민투표의 결과는 찬성 356만 8,885표에 반대 8,374표였다. 이틀 뒤 8월 4일, 보나파르트가 직접 기초한 새 헌법이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공화 10년 테르미도르 16일 헌법에 관한 원로원령"으로 공포되었다. 이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특이한 새 정치제도가 국민의 동의 위에 수립되었다.

 

공화 10년 헌법이 수립한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공화제이나 사실상으로는 군주제였다. 그러므로 2년 뒤 제정이 선포되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종신 통령제는 제정에 이르는 2년간의 구멍 마개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기간을 제정 준비에 집중하였다. 극소수의 자코뱅 과격파와 왕당파 골수분자 외에는 모든 계층의 국민이 국내 지서의 회복과 대외 평화의 실현을 쌍수로 환영하였다.

 

나폴레옹의 아첨꾼들은 나폴레옹 암살 계획 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가 암살로 급사할 경우 무서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과대 선전을 하면서 보나파르트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은 보나파르트만이 혁명의 혼란을 막고 프랑스의 안정과 번역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나폴레옹의 수법과 야심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혼란과 방파제로서의 보나파르트의 존재를 긍정하지 안을 수 없었다.

 

 

1803년

4월 28일

보호무역을 기반으로 한 새 관세법 제정

5월

영국, 아미앵 조약 파기 선언

7월

제르미날 7일, 제르미날 프랑 발행

 

나폴레옹의 화폐는 19세기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큰 인플레이션 시기까지 꾸준히 그 가치를 유지하였다. 그 덕택에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경제는 안정된 재정 하에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1804년

3월 20일

양갱 공작 처형

 

바덴에서 망명하고 있는 양갱 공작을 몰래 납치해다가 3월 20일 하룻밤 사이에 약식재판을 거쳐 총살한 후 그 시체를 미리 파놓은 무덤에 묻어버렸다!

 

양갱의 처형 후 일주일도 안 되어 원로원은 나폴레옹에게 "그의 영광처럼 그의 사업도 불후의 것"이 되도록 진정하였다. 이 진정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일반 여론이 알아차릴 만한 시간이 지난 후, 이번에는 호민원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세습 황제로 추대하자는 동의가 제안되었다. 입법원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그 안을 선포하였다.

3월 21일

나폴레옹 민법전 Code civil 선포

 

프랑스에는 본래 통일적인 법전이 없었다. 혁명 기간에 여러 가지 법률과 법령이 아무 원리도 없이, 종래의 관례도 고려하지 않고 남발되었다. 혁명정부는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하등의 실적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나폴레옹이 완성하였다.

 

민법전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유지했으나 혁명적 입법의 철학적 원리를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혁명의 집약인 동시에 혁명의 수정이었으며, 시민혁명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혁명 입법에 비하면 반동적이고 앙시앵레짐의 법률에 비하면 혁명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 민법보다도 가장 진보적이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가는 곳마다 민법이 미친 혁명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비단 유럽만이 아니라 민법전은 근대 세계의 몯느 나라에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였다.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의 완성은 제도 면에서는 나폴레옹 법전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완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르주아의 경제적 번영과 그 안정을 의미하였다. (이건 나폴레옹의 경제정책으로) 234-8p.

5월 18일

공화국 12년 플로레알 28일 원로원령 공포

 

새 헌법은 나폴레옹을 세습황제로 만든 것 이외에는 2년 전 것과 별 변화가 없었다. 이 헌법도 이전의 헌법과 마찬가지로 국민투표의 인준을 규정하고 있었다. 10년 임기 제1통령도, 종신 제1통령도, 세습 황제도 국민 동의의 형식을 빌리는 것에 보나파르티즘의 특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실은 기정사실에 대한 국민의 체념의 표현이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될 수는 없었다.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을 터였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토릭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12월 2일

나폴레옹 황제 등극

동일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제3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1805년

10월 21일

프랑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에게 패배

 

나폴레옹이 트라팔가르의 패보를 들은 것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입성한 후였다. 이제 그에게 대륙 작전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영국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하여 프랑스의 정치적 우위를 홥립해야 하는 더 긴급한 사안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대륙은 지배해도 바다는 지배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다를 지배할 수 없는 한 영국을 누를 수 없고, 영국을 누를 수 없는 한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의 운명은 이 트라팔가르에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 프랑스,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대파. 제3차 대프랑스 동맹 해체, 신성로마제국 해체

12월 25일

프레스부르크 평화조약 체결: 오스트리아, 베네치아를 이탈리아 왕국에 할양

 

 

1806년

1월 1일

혁명력 폐지, 그레고리력 재채용. 혁명 종결의 상징

3월

나폴레옹, 나폴리 왕국 점령

 

3월에는 나폴레옹이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여 형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왕에 봉하였다. 이제 이탈리아 반도는 교황령 이외에는 완전히 나폴레옹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는 홀란트도 왕국으로 개조하여 아우 루이 보나파르트를 그 왕에 봉하였다. 그리고 남부 독일에는 바바리아와 뷔르템베르크 등 16개국을 연합하여 라인 연방을 창설하여 나폴레옹 스스로 그 보호자가 되었다.

10월 6일

프로이센이 영국, 러시아와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10월 14일

나폴레옹군, 프로이센군 격파

10월 27일

나폴레옹, 베를린 입성

11월 21일

베를린 칙령 반포 (=대륙봉쇄령)

 

그는 유럽 대륙을 영국에 봉쇄하는 이른바 베를린 칙령을 내리고, 계속하여 프로이센과 러시아 연합군을 추격하여 폴란드를 점령한 후, 거기 바르샤바 대공국을 만들어서 러시아에 대한 전초지로 삼았다. 일찍이 폴란드 왕국은 18세기 말엽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및 프로이센 사이에 분할되어 망국의 비운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제 나폴레옹을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바르샤바 대공국의 헌법 제1조는 "농노제는 폐지된다. 모든 시민은 법앞에 평등하다"고 규정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정통이 이식된 것이다.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이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에서 대륙 국가들과 영국의 무역을 일체 금지시킨 칙령을 대륙봉쇄령이라고 한다. 그것은 새로운 대륙 체제였다. 이 대륙 지배는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유럽 지배는 영국을 항복시키기 전에는 완성될 수 없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영국을 군사적으로는 항복시킬 수 없음이 실증되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부득이 경제적 작전을 쓰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비추어볼 때 다른 대륙 국가들과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받아들이는 의미가 달랐다.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나폴레옹군의 진격은 나폴레옹 법전의 진군을 의미하겨, 나폴레옹은 전제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일찍이 시민혁명을 실현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의 선구자로서 세계시장을 장악한 영국으로서는 나폴레옹은 정복욕에 눈이 어두운 야심가에 지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영국과 벌인 전쟁이 대륙전과는 달리 경제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이 대륙의 시장을 상실함으로써 받는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은 영구고가 같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공업과 정치 및 전쟁의 구조적인 관련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 타격이 정치와 군사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

 

 

1807년

7월 7-9일

프랑스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국, 틸지트 조약 조인. 제4차 대프랑스 동맹 해체

 

나폴레옹군은 이제 네만 강 건너편의 러시아 영토 안으로 진격할 기세를 보였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여 틸지트 조약에 조인하였다. 나폴레옹은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에 베스트팔렌 왕국을 신설하여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왕에 봉하였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바르샤바 대공국, 나폴리 왕 조세프, 네덜란드 왕 루이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이제 새로 단치히 시의 독립과 베스트팔렌 왕국도 승인하였다.

10월 27일

나폴레옹, 스페인과 퐁텐블로 비밀조약 체결: 포르투갈 분할 약정

 

틸지트 조약을 맺은 후 귀국한 것은 1807년 7월이었다. 이때의 나폴레옹은 산꼭대기에서 유럽 대륙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날개를 접고 있는 독수리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막 정복한 유럽 대륙을 번쩍이는 눈으로 두루 살폈다. 자기 뜻에 어긋나는 자가 있다면 당장 날아가서 덮쳐버릴 태세였다. 대륙봉쇄의 해안선을 살펴볼 때 아직 미진한 데가 있었다. 그것은 이베리아 반도였다. 그는 날개를 펴서 이베리아 반도로 향하였다.

11월 27일

프랑스군, 피레네 산맥을 넘어 리스본 점령

 

 

1808년

5월

나폴레옹, 형 조세프 보나타르트를 스페인 국왕에 임명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시민과 농민, 군인 봉기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스페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지배 하에 있던 여러 민족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발화점이 되었다. 반불 봉기는 스페인 전역으로 번졌다. 스페인 민중의 게릴라식 독립 전쟁은 1814년 나폴레옹에게서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줄기차게 계속된다.

6월

나폴레옹, 부장 뮈라를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임명

6월

로마 교황령 점령, 병합

 

교황령의 점령과 병합은 나폴레옹의 큰 실책이었다. 각국의 카톨릭 교도들이 상상 외의 큰 충격을 받았다.

9월 27일

프랑스-러시아, 에르푸르트 회견 (~10월 14일까지): 친선 도모

11월

나폴레옹, 마드리드 포위. 스페인 반란 진압에 착수

 

사라고사의 항전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완전 정복을 보지 못하고 부장들에게 뒤를 맡기고 총총히 파리로 돌아가야 했다. 스페인 해방전쟁이 나폴레옹 권력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파리에서 나폴레옹 폐위의 음모를 꾸미고 있엇는데, 이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동시에 오스트리아에서도 주전파가 득세하여 반나폴레옹 전쟁 준비에 나섰다는 전갈이 전해졌다.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영국, 제5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1809 10.14)

7월 5-6일

나폴레옹, 오스트리아에 바그람 전투 승리

10월 14일

프랑스-오스트리아, 쇤부른 조약 체결

 

상승일로의 나폴레옹에게 1809년은 어려운 고비의 해였다. 스페인에서의 예기치 않았던 역경과 포르투갈에서의 좌절, 그리고 제위를 무너뜨리려는 측근의 음모, 오스트리아의 반항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독일 민족주의의 양양 등 1809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나폴레옹 제국에는 금이 생기고 있었다.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대륙봉쇄의 기본적 모순들이 서서히 현실화되고, 나폴레옹 군대는 해방군에서 정복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기의 권력과 제국이 혁명에 뿌리 박고 있음을 망각하고 제왕 사상의 망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12월 12일

나폴레옹, 조제핀과 이혼 정식 선언

 

 

1810년

4월 2일

.나폴레옹, 마리 루이즈와 혼인

 

그가 18세의 오스트리아 황녀를 새 황비로 고른 것은 반혁명 왕가와의 결합을 뜻하였다. 보나파르티즘의 반동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삼색기를 앞세우고 유럽 곳곳에 씨 뿌린 나폴레옹 법전의 씨가 자라서 이제 바야흐로 유럽의 민중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각성하기 시작한 대에, 보나파르티즘이 그 반혁명성의 속살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은 실로 역사의 역설이었다.

12월 31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대륙 봉쇄령에 반하는 칙령 반포

 

 

1812년

5월 9일

나폴레옹, 러시아로 출병

*

영국-러시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9월 7일

보로디노 전투: 프랑스의 전술적 승리, 러시아의 전략적 승리

9월 16일

나폴레옹, 모스크바 입성

 

나폴레옹은 9월 16일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는 그 전날부터 붙기 시작한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한 부관은 "우리는 불의 대지 위, 불의 하늘 아래, 불의 두 벽 사이를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은 사흘간 계속 붙었다. 모스크바는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 잿더미의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인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러시아 황제에게 평화 교섭을 제의하였으나 황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북국의 겨울은 코르시카 출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이 다가왔다. 군대는 겨울옷이 없었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군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모스크바 교외에 나타나면 잠복하고 있던 러시아군이 습격하였다.

10월 18일

나폴레옹, 전군에 퇴각 명령

10월 1일

프랑스군, 전군 퇴각 시작

 

다음 날부터 시작된 후퇴는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가장 유명한 퇴각이 되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쿠투조프는 맹렬한 추격전을 벌였다. 코자크 기병의 유격전과 러시아 농민군 게릴라는 패주하는 나폴레옹군을 도처에서 무찔렀다. 러시아의 동장군은 나폴레옹군의 도망 속도보다 더 빨랐다. 추위와 굶주림과 절망이 전군을 엄습하였다. 그의 처참한 후퇴 작전의 클라이맥스는 11월 말 베레지나 강 도하작전이었다. 그의 군대 절반이 이 강에 빠져 죽었다. 이제 남아 있는 나폴레옹 대군은 기껏해야 전부 10만에 불과했다. 60만 중 25만이 전사하고 10만이 포로가 되고 15만 명이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

 

 

1813년

2월 27일

프로이센,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가입

6월 21일

영국, 비토리아 전투 대승

8월 11일

오스트리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가입

10월 16일

라이프치히 해방 전쟁

 

 

1814년

3월 9일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쇼몽 조약 체결

 

네 나라는 나폴레옹이 항복할 때까지 힘을 합하여 싸우고,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 나폴레옹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고, 또 평화조약 체결 이후라도 동맹국의 어느 하나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각각 6만의 병력을 공동 출병한다는 것 등을 협약하였다. 조약의 유효 기간은 20년이었다.

3월 30일

연합군 파리 점령

3월 31일

알렉산드르 1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파리 입성

4월 6일

프랑스 원로원,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나폴레옹의 폐위와 루이 18세 즉위 결의

4월 11일

나폴레옹 무조건 퇴위 선언, 퐁텐블로 조약 체결

4월 20일

나폴레옹, 근위대 고별 연설

5월 4일

나폴레옹, 엘바 섬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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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사랑이

14.12.21

그래 이부분
"러시아의 동장군은 나폴레옹군의 도망 속도보다 더 빨랐다. 추위와 굶주림과 절망이 전군을 엄습하였다."

사랑이

14.12.21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보니 기억난다 정리는 역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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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4.12.24

반밖에 정리 못했단 걸 오늘 새삼 깨닫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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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4.12.24

아니면 반이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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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1.27

전쟁과 평화에서 나폴레옹과 안드레이가 만났던 '아우스터리츠'는 두 사람의 관계를 빗대기 위한 장치였던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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