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으로부터 7년, 재연으로부터 5년.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시 돌아온 시아준수의 엘에게서 가장 현격한 변화를 맞이한 건 마지막 넘버인 〈마지막 순간〉
세상에, 내가 본 연기가 대체 무엇이었지 싶게.
노트에 강제당한 육신이 멋대로 라이토를 총격한 직후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방아쇠를 당긴 반동으로 높이 들려지는 제 팔에 놀란 동공이 후두둑 쏟아질 듯했다.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육신에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은 찰나에 스쳐 갔지만 잔상을 남길 정도로 또렷했다.
온 얼굴에 먹구름처럼 드리워졌다 사라진 표정, 셈하면 2초나 되었을까. 그러나 무대를 가득 색칠한 영상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으로 와닿았다.
뿐일까. 두 눈 부릅뜬 채 맞이하는 죽음. 그 눈 안에서 완전히 멈춰있던 시간... 깜빡임도 없이 멎어버린 큰 눈에 자연히 내 시간도 따라 멈추었다. 기억 속의 장면보다도 훨씬 오래 시간을 멈춘 채로 서 있는 엘은 쓰러지는 연기까지도 완벽했다. 몸을 사리지 않아 더욱 실감 나게 무너지는 육신이 지면 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활활 타오르던 생명이 쿵 하고 영영 스러지는 소리는 무대 위의 그 어떤 소리보다도 내 마음 안의 작은 소동이 되었다.
초재연에 비한다면 완연한 절규가 되어버린 그의 마지막 대사, “난 틀리지 않았어!” 처럼.
이런 연기를 해놓고,
이렇게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고는,
커튼콜에서는 새파란 신인처럼 가득찬 객석으로 올망울망한 눈을 던지는 시아준수라니.
무대 위에서 살아온 시간을 셀 수도 없는 사람이 마치 처음처럼 감격으로 그렁그렁한 눈을 반짝이며 건넸다.
그러니 별 수 있을까.
마음으로부터의 박수 이외의 다른 답은 없었다.
*
이하 처음이니 달라진 점 위주로 간략하게 적겠습니다.
대본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대본을 제외한 편곡과 무대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엘은 여전히 40분 후에 등장한다. 대본이 달라진 바 없으니 자연히 엘의 연기도 동일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하게 되어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그래서 두 손가락만을 사용하여 캐릭터의 감칠맛을 더하는 자잘한 디테일들이 더욱 눈에 띈다. 소소한 찰나에도 새롭게 보는 재미를 선사하기 위한 배우의 노력이라는 것을 아니까. 더불어 변함없는 열창은, 여전한 감동을 준다.
첫 등장
앙칼졌던 초연의 목소리를 기억하는데, 오, 다시 돌아온 샤엘의 목소리에서는 원숙미가 느껴졌다. 초연에 비한다면 사설탐정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의 여유가 물씬했다. 키라를 다그치고 조롱하는 듯하다가도 일순 무심해지는 음성과, 부드러워 어느 때는 나긋하기까지 한 말씨가 꽤 새롭다 여겼다.
게임의 시작
넘버 중 회심의 대사 ‘고등학생이야’는 ‘학생이다’가 되었다.
동선은 대체로 초연과 동일한데, 다만. 엘이 넘버 시작 전에 걸어서 입장하는 모습이 전부 보인다는 게 조금..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작중 미스터리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는 엘인데, 첫 넘버 직전의 등장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건 생각 이상으로 신비감과 몰입감을 해치는 요소가 되었다. 암전이 조금 더 확실해지거나, 다른 방식으로든 보완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비밀과 거짓
초연에서는 무대 좌측에 위치했던 엘의 세트가 삼연에서는 센터로 이동. 소파와 협탁만 달랑 있었던 자리에 이제는 소파 뒤편으로 긴 테이블도 생기고, 테이블 위에 먹을거리도 종류별로 다양해졌다. 물론 이번에도 베어 무는 건 오직 딸기 하나지만. (딸기 하나를 여러 차례에 걸쳐 냠냠냠 베어 무는 모습도 여전히 영원히 그대로이던 샤엘..☆)
돌출을 전혀 쓰지 않는다. 한쪽 다리를 살짝 끌며 리듬 살려 돌출을 정복하듯 걸어 나오는 엘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대신 엘과 라이토가 서로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모습을 본다. 엘은 라이토 방의 의자에 고유의 자세로 살짝, 라이토는 엘의 소파에 몹시도 기세등등하게 다리 꼬고 발라당. 엘과 라이토가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맞수라는 것이 이 동선 교차로 명명하게 드러나는 게 좋았다.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관계성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줄이야. 앉은 자세부터가 판이한 점에서 양자의 성격이 훤히 보이는 것 역시도 재미있었다.
정의는 어디에 rep.
초연의 난간이 사라지고, 이제는 지상에서 엔딩을 맞이하는 엘을 보게 되었다. 엘이 군중 틈에 섞여드는 엔딩이 매우 낯설다. 군중 속의 엘이라니. 엘은 그 누구와도, 어떤 무리에도 스며들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왔는데 말이에요. 또 다른 데스노트를 집어 드는 아마네 미사를 지켜보는 시선도 자연히 지상에서, 군중 틈에서 발한다. 난간 위의 초연에서처럼 관조자로서의 모습이 더는 연출되지 않는 것은 다소 아쉽다. 달라진 동선에 익숙해지고 나면, 삼연의 시각으로 이 넘버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되겠지요?
2막의 첫 등장, 키라는 당신의 아들
동일하게 오른쪽에서부터 등장. 발끝으로 종아리를 두어 번 가볍게 긁어주고, 이어지는 동선과 브라우니 전개 또한 같다(왜요? 혼자만 먹어서 치사빤쓰인가요? 드실래요?). 다만 ㅎㅎ 프리뷰부터 브라우니를 냉큼 받아 가는 수사관을 보게 될 줄이야. 막공에는 어떤 티키타카가 오게 될지 기대하게 했던 일순간.
다다다다 내뱉는 데도 능란한 대사의 흐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쫄깃함 역시도 그대로. 어쩜 이렇게 날카로우면서도 매끄럽게 대사가 흐를까. 극 중 무척 좋아했던 대사 또한 고스란히 만날 수 있어 매우 기뻤다.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어요, 야가미 국.짱님. 아, 웃음 묻은 이 시니컬한 목소리. 역시 사랑이다.
단 한 가지. 야가미 라이토가 키라일 확률, 3퍼센트였던 수치는 삼연에서는 5퍼센트로 상향 조정되었다.
죽음의 게임
가장 사랑하는 넘버인 죽음의 게임과는 가장 슬픈 재회를 맞이했다. 이 오케스트라 편곡.. 뭘까. 뚱땅거리는 반주부터 믿을 수가 없는데, 이어지는 이 무성의한 동선.. 뭘까. 이 넘버가 가지고 있던 주고받으며 치받는 긴장감이 소거되었다.
뒷목 등지를 박박 긁으며 터벅터벅 등장하는 엘의 귀여움만이 남았다. 라이토가 첫 소절을 시작할 때 단상에서 두 손가락으로 연설문 들어 올려 낭독하는 잔망만이 남았다. 그 얼굴의 잘생김만이 남았다... 이 넘버를 깨알같이 살려내는 샤엘의 디테일에 조금 울컥했던 것도 같다. 여타가 도와주지 않아도 배우 김준수는 이렇게 묵묵히 제 몫을 한다. 죽음의 게임에서만 몇 개의 디테일이 새로 생긴 거예요 대체..
변함없는 진실
생각에 잠긴 엘 너머로 뉴스 화면들이 보이고, 제2의 키라, 사신, 노트 등의 보도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덕분에 이 넘버에서 엘이 겪고 있는 혼란이 어디에서부터 발하였는지를 조금 더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무대에서 철퍼덕 주저앉은 채로 시작했던 초연과는 달리 삼연의 엘은 자신의 세트를 지켜냈다. 땅바닥이 아닌 푹신한 소파 위에 앉은 채로 등장! → 왼쪽에서부터 터벅터벅 걸어와서, 소파 위에 예의 앉은 자세로 착석!
그렇다는 건 초재연에 비해 엘의 혼란과 좌절이 옅어졌다는 의미가 될까? 예의 추리 자세도 내던지고 망연한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은 초재연의 자세는 설핏 보기만 해도 엘이 겪고 있는 혼돈의 크기를 짐작케 해주었는데, 삼연에서는 본인의 세트도, 자세도 아직은 지키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어지는 가창은 왜 김준수의 엘이어야 하는지를 다 보여준 무대였다. 키라에 대한 승부욕과 분노로 뒤엉키는 소리, 깨달음과 결단으로 증폭하는 소리의 울림통. 무대가 오색찬란해졌어도 이 사람 안에서 발하여지는 찬란함에 비견될 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절정은 사느냐 죽느냐 갈리는 경-계-선. 엘이 두 팔을 가로로 활짝 펼쳐낼 때, 그 몸짓에 맞추어 무대를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한 줄의 LED 효과는 내 안의 유레카를 이끌어냈다. 차오르는 모든 감격을 그의 발치에 던져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명예를 위해서 ~소위 만약 있다면요? 씬~
엘, 소파에 발라당 드러누운 채로 등장. 비밀과 거짓에서 점프하여 발라당 착석하는 모습이 사라졌기에 삼연에서는 이 포즈를 못 보나 했더니 여기서 본다. 아, 역시 이 치명적 귀여움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아쉬울 뻔했지.
늘티의 활약이 가장 도드라지는 구간이기도 하다. 발라당 누웠던 자세를 바로 할 때 어찌나 존재감 찬연하던지. 오랜만의 늘티 공격에 살짝 놀라기도.
놈의 마음속으로
죽음의 게임이 너프된 것과 정반대로 가장 강력해진 넘버. 삼연은 모든 역량을 이 넘버에 집중하다시피 했다. 초재연에서 이 넘버와 죽음의 게임이 극의 투톱이었다면, 삼연에서는 이 넘버가 원톱의 롤을 도맡는다.
초연과는 달리 회전무대가 없는 삼연이라 과연 어떻게 무대가 구성되려나 싶었는데, 엘이디 세트가 이동하며 배우들이 엘이디를 따라 셀프 이동할 줄이야.
셀프 이동하며 겨루는 배우들의 열연이 대단하다. 타이밍 딱딱 맞는 라켓 사용은 물론이고, 창과 방패처럼 맞물리는 공격과 수비, 새파랗게 타오르는 열창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아, 재밌네. 이 넘버의 절정에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그런데 경기 중에 엘, 두 번이나 넘어지는데 글쎄 처음 넘어질 때는 아더가 넘어지던 그 자리 그 위치 그대로 풀썩 엎어지지 뭐예요… 모습만 다르고 위치까지 똑같은 상황에 마음이 일순간 찌르르했다.
승부를 마치고, 악수 청하는 라이토의 손을 엄지와 검지로만 새침하게 잡는 건 삼연에서 새롭게 귀여운 지점. 마지막 순간에서 마지막에 노트 잡을 때도 검지만 톡 두드리던 새침함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장면이 아닐까.
미사의 등장
삼연에서는 제 앞에서 요란법석을 떠는 류크의 존재에 반응하는 엘을 본다. 류크를 알아차린 것은 물론 아니고, 입 냄새가 느껴진 것처럼 코를 틀어막고 무슨 냄새야.. 대사까지! 예상하지 못한 애드립 구간에 살짝 웃었다.
생명의 가치 ~미사 취조 씬~
난간이 사라진 탓에 엘의 동선이 가장 많이 달라진 넘버. 여기서 강력하게 떠오른 삼연의 관전 포인트는 사탕 먹방하는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 허어. 빨간 혀랑 허어. 무대 정중앙, 돌출 계단에 다소곳하게도 앉아서는 사탕을 요리조리 꽤 열심히 먹는데 추리를 들으라는 건지, 얼굴을 보라는 건지.
취조 중 미사에게서 ‘렘’의 이름이 나오자 다소곳이 앉아있다가 폴싹 뒤로 쩜프하며 자세잡는 건 너무나 유려했던 몸짓. 예의 자세를 잡고부터 맹렬하게 머리 굴리기 시작하는 얼굴은 또 매우 잘생겼다.
마지막 순간
죽음의 게임과 함께 몹시도 사랑했던 소리는 여전했다. 엘의 첫 소절 “처음부터 다 보였어”의 모래알과도 같은 부드럽고 허망한 빛깔, 변함없이 그대로. 여기 이 목소리. 모래알 머금은 바람 같은 소리를 참 사랑했었지. 삼연에서도 변함없이 사랑을 부르는 결 많은 소리는, 기억하는 그대로 아름다웠다.
*
마지막 순간에서의 사엘의 연기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다. 극 하나를 전부 복기하고도 마지막 순간 생각뿐이다. 이 넘버의 샤엘이 회차를 거듭하며 얼마나 더 대단해질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어서 더욱. 앞으로의 긴 여정이 얼마나 더 마지막 순간을 공든 탑으로 쌓아 올릴지, 믿고 보는 김준수이기에 섣불리 확언할 수도 없다. 마지막 순간을 끊임없이 곱씹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엘의 옷을 입은 배우 김준수에게 생각이 닿으면 웃음 어린 찬탄만이 남는다.
프리뷰에서부터 이 대단한 처음을 일구어낸 김준수는 언제나와 같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