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은 처음부터 눈물범벅이었다. 특히 밤공. 어째서 여기저기 자꾸만 눈물을 자아내는가. 왜 이렇게까지 나를 흔드는 인물인가. 도리안이 이럴 줄이야.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을 이미 용서해버려서 고통스럽다.
 
그의 고통을 봐버린 탓일까.
 
<넌 누구>. 하얗게 바래버린 금발, 추악하게 주름진 얼굴. 변해버린 초상화의 요목조목을 읊는 모습이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 심장이 찌르르 아파왔다. 인정할 수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내 자신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자신과 철저히 분리시켜 조롱하는 모습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어.
 
<무엇이 기다릴까>에서도. 초상화를 가둔 다락에서 비틀비틀 내려오며 ‘요즘, 너무 힘들어요. 약이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하는 숨결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나는 고통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 고통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고.
 
두려움에도 떨고 있다. ‘그 그림 어딘가 변하지 않았어?’ 선문답 같은 궤변으로 배질의 추궁을 빠져나가던 도리안의 움직임이 멎는다. 또르르 굴러, 그제야 배질을 바로 보는 눈동자가 번뜩였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지금 감히 그 비밀을 안다고 말하는 건가? 말할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될 그것을?
엄습해온 위기감에 초강수의 선택을 한 도리안이 이해가 되었다. 배질의 눈과 귀를 감각으로 막아서라도 입막음을 하고 싶었겠지. 죄악을 묻기 위해 또 다른 타락으로 향하는 그가 아름다운 만큼 서글펐다.
 
배질을 꼬여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헨리가 자신에게 사사하였던 타락의 경로 그대로라는 것 역시 마음을 심히 괴롭게 한다.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거예요, 배질.’과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reprise를 이루는 주된 소리가 1막에서 헨리를 따라 호기심에 한 번 불러보았을 때의 고운 미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할큄음인 것이 무엇보다 그렇다. 쾌락주의를 있는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린 모습이지 않은가. 초상화는 보여주지 않지만 이미 소리로 영혼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악마의 날개를 펼쳐내어 보이는 듯한 갈퀴 박힌 소리가 위험할 정도로 퇴폐적이었어. 더불어 그 퇴폐미를 자아내는 이면에서 그 순간에도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 스며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쓰라림 그 자체의 모순이었다.
 
<또 다른 나> 직후 더 변해버린 영혼을 확인하고 내려오는 모습에서도 고통이 묻어난다. 비틀비틀, 충격을 전하는 걸음걸이에서 확연하게 보여. 감당 못 할 죄책감. 외면하고 싶은 죄악감. 그런데도 정작 힐문하러 온 배질에게는 ‘저는 행복해요.’ 부러 그러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도리안도 알고 보는 나도 알아서 마음이 일렁였다.
 
<사라진 아름다움>에서 ‘없다고 믿고자 해도 계속하여 자신을 옥죄어 오던 심장.’의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그제야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끊임없이 고통받아 왔노라고. 저의 죄악이 숨결을 막고, 외면했던 영혼이 텅 빈 줄로만 알았던 심장을 틀어쥔다고. 죄책감이야말로 아름다움과 함께 일평생의 동반자였노라고.
 
마치 부정의 선언이 있기도 전에 도리안 스스로 느끼고 있는 듯이 보였다. 텅 빈 영혼, 공허한 아름다움. 그 자신이 더는 아름다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듯했다. 흥건한 눈물은 그러한 회한이었다.
 
그랬기에 <도리안 그레이>는 회한과 참회의 소멸이었다. 초상화의 훼손이 아닌 그 자신의 죽음이라는 참회. 원작대로의 엔딩이 아닌 것이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을 용서할 수 있게 해주는 결말이기에 감사했다. 황금 빛깔 천국을, 아름다운 소년을 바라보는 도리안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으니.
 
그리고, <엔딩>. 시빌을 발견한 직후 주체 못 하는 울음이 고여 얼굴을 가리고야 마는 찰나. 다시 만난 배질을 향하여 빠르게 걸음하는 뒷모습. 거기에 배질의 인사말. 찢겨진 육신이지만 바람에 날려 이제는 자유롭다는 말. 너무나도.. 도리안을 위로하기 위한 것만 같은 말. 이 셋이 오늘 최정점의 눈물이었다.
 
왜 내가 서러운지 모르겠으나 서러워서. 그리고 다행이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구원이 있다는 것이. 울음으로 웃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설혹 허상이라 하더라도 구원의 둘레를 걸치고 있는 편이 아니한 것보다 낫다. 구원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도리안의 삶을 사는 시아준수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러니 이 얼마나 다행인 결말인가.
 
 
*
 
그리고 이외의 감상:
 
1. 등장도 등장이지만 초상화 문턱까지 걸어와 곧게 설 때의 자세가 참으로 그림이다.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선 모습 정말 조각상. 움직임에 살짝 팔랑이는 백색 옷까지. 감탄스러워. 어떻게 이렇게 상상 그대로의 실현이에요?
 
밤공에선 바닥을 스치는 넷째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음악에 전율이 일었다. 아무래도 등장씬에선 이 동작을 가장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 또 음악을 타고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서 자세를 갖출 때의 각도가 참 아름다웠다.
 
순수의 얼굴은 밤공에서 가장 순하게 변모했다. 정말로 무구하기 그지없는 소년이었어. 때 묻지 않은 아도니스 그 자체.
그리고 오늘 공연으로 깨달은 것. ‘배질? 헨리가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의 순간이 오면 심장이 뛴다. 이 대사 너무 좋아요. 나긋나긋, 살랑살랑, 순수의 숨결.
 
2. 찬란한 아름다움
낮공의 A에서 오늘 도리안이 reprise를 부르기 직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만났다. 눈을 무척이나 동그랗게 부풀려 헨리의 말을 흡수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아이 같은 눈동자로.
헨리의 주문 후반부에 부푸는 눈동자는 너무나 형형하다. 그 아름다움에 선하고 좋은 것만 담아야 하는데.. 일렁이는 타락의 아지랑이가 안타깝지 않은 사람 있을까.
 
밤공의 C에서는 헨리가 액자의 영역을 침범할 때 초 단위로 감응하는 도리안의 얼굴을 정면으로 만났다. 아아, 이 각도와 사랑에 빠져버렸어. 여기 앉은 채로 헨리가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을 따라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가늘게 고쳐 뜨는데, 그게 도리안에게 결코 좋은 영향이 될 수 없을 거란 걸 잘 알면서도 유혹에 빠져들 때의 얼굴이 아름다움 그 자체라 마냥 보게 된다. 배질도 이런 마음이어서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던 건가.. 하는 생각도..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밤공. 그림의 완성. 액자가 상승하는 순간 모종의 불안과 안타까움이 엄습해왔다. 액자는 도리안의 순수. 태초의 영역. 누구에게도 물들지 않고 소년이 타고난 그대로 유지해온 순결한 소년만의 세계.
찬란한 아름다움에서도 그 안에서 머물던 도리안이 처음으로 타락의 주문을 접하고 그에 호응하기 시작하였을 때 액자 안으로 연기가 자욱했지. 나아가 그 액자로부터 첫걸음을 떼어서는 헨리의 주문ㅡ찬란한 아름다움을 따라 불렀다. 액자는 그의 순수를 가둔 둘레이자, 수호자였다.
그럴진대 그를 떠나는 순수의 굴레가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을까. 홀로 남겨질 맨몸이나 다름없는 그가 어찌 염려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로, 액자의 영역에서 이탈하여 금단으로 향하기 시작하는 도리안의 걸음걸음이 위태롭게 보였다. 곳곳에 도사리는 유혹에 어느 당장에라도 물들어버릴 것처럼 펄럭이는 순백의 의상은 무방비 그 자체라 위태로움을 더해주었다.
 
4. 당신은 누구일까
낮공의 A.. 여기가 이런 아이컨택존이었다니. 저는 영혼입니다. 찡긋거림의 홍수라니..
 
‘오늘 청혼할 거예요.’ 선언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종종종 바빠지는 걸음걸이. 토라진 듯, 응석 부리는 듯한 ‘일생일대의 로맨스라구요!'
 
그리고 그녀를 발견하고 헨리에게 도도도 달려가 자켓을 근사하게 착 차려입는 모습은 또 왜 이렇게 귀여운가. 엄지 척의 확인까지 받고 나서야 들떠서 출발하는 뒷모습에서 음표가 마구마구 보였다. 밤공에서는 멋있다는 헨리를 향해 수줍고도 들뜬 입매로 입술을 앙 물고 돌아서는 잔망스러움까지.
 
아아, 그리고 첫 애드립. 밤공의 쓰레기(헨리의 잤네 잤어-도 함께). 낮공은 나지막한 읊조림의 짐승이었다.
 
5. 너를 보낸다. 배질이 초상화를 보낸 이유가 도리안을 위해 도리안의 영혼을 도리안의 곁으로 보낸 것이었다니. 이건 조금 감동이었다. 변하는 영혼을 보고 도리안이 선을 넘지 않기를 바라는 진정을 본 듯하여서.
 
6. 최악의 줄리엣. 시빌이 등장하기 전까지 두근두근 콩닥콩닥 설레는 입매가 너무 예쁘다. 어서 그녀를 자랑할 생각에 어깨도 살짝 솟은 것 같고, 너무나 귀여워. 충격적 연기 후 애써 ‘시빌 베인이 아픈 것 같아요.’라 변명한 후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는 어깨도.. 귀여웠다..
 
7. 시빌 베인의 죽음. 오페라를 가자는 제안에 배질을 흘긋이는 순간이 너무 마음 아프다. 찰나에 머무는 양심의 고갯짓. 그 순간이 있다는 건 그의 영혼이 여전히 그에게 작용을 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정말 그뿐이기도 하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8. 무도회의 도리안은 반짝이는 금색의 롱코트만큼이나 반짝반짝하다. 입가에 살그머니 미소를 얹은 채 가늘게 접은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는 시선이 섹시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서는 마음에 썩 차지 않는 상대를 만나자 입술을 한 번 샐쭉였는데, 아 귀여워 혼났네. 밤공에서는 고개를 두어번 절레절레했다. 음, 아니야. 하듯이.
 
9. 1막의 또 다른 나. 영상으로 피라미드가 왜 나오는가 했더니 이집트 유령회사를 이때 세웠다는 거구나. 다른 나라 영상까지 나오는 건 나라를 가리지 않은 전범위의 악행이란 의미인가.
 
10. 한 팔을 우아하게 펼쳐내어 손으로 허공을 쓸어내리는 맵시. <넌 누구>에서, <무엇이 기다릴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우아한 자태. 너무나도 고혹적이다. 보다 보면 그의 신체가 자아내는 선의 균형, 싱그러운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11. 무엇이 기다릴까. 밤공. 가운이 꼬는 발목에 걸려서 그만 다리를 덮어버렸다. 일어날 때 걸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걸리적거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크게 얽힘은 없이 풀렸다. 가운이 길어서 왠히 신경이 쓰여.
 
12. 넌 어디로. 꼼질꼼질 마리화나를 꺼내던 손가락. 올려다보는 눈망울은 어째서 너무나 별조각이지요?
 
13. 샬롯의 습격. 내가 아직도 그 나잇대로 보여요? 에선 감탄한다. 영특해. 위기대처능력 탁월해.
 
14. 또 다른 나. 살짝의 피드백. ‘내 가슴 속 후회의 실체인가, 내 영혼 속 양심의 부름인가.’의 대목으로 퇴장이 앞당겨지고 무곡에서 되돌아온다. 퇴장 시간도 짧아졌어. 시야를 가리는 막은 여전하지만 오빠가 무대에 더 머문다는 것만으로도 넘버의 무게가 달라졌다. 훨씬 집중할 수 있었어.
 
15. Life of Joy
감히 말하건대 삼중창은 낮공이 좋았고 그보다 밤공이 좋았으며 앞으로도 매일이 계속 더욱 좋겠지. 가장 좋았던 부분은 배질과 대치를 거듭하다 헨리와 타락한 아름다움에서 만나는 순간. 그들이 좇는 것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그들이 자아내는 모든 소리로부터 와 닿았다. 헨리와 반원을 마주 그리며 타락의 건배를 하는 듯이 들어 올린 손목마저도 그렇게 보였다.
 
16. 악의 꽃. 여기서 혼자만 가면이 아닌 건 계속 보아도 계속 슬프다. 이렇게 예쁜 가면 봤어?ㅠㅠ
 
위선의 얼굴이 주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무도회의 도리안은 다비드 그대로다. 곧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매력적인 가슴골과 날씬한 다리. 나무랄 데 없는 걸음걸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신하는 나르시스트 그 자체.
그런 그가 파트너와 춤을 추기 시작하면. 아, 내가 그리던 꿈의 고전의 완성. 나폴나폴, 파트너와 부드러이 주고받는 박자에 맥을 못 추겠다. 이렇게까지 황홀할 수 있는 건가요.
그리고 도리안은 예술적인 여자를 좋아하지요? 귀를 이끄는 목소리를 찾아 샬롯을 발견하는 그. 그러다 놓쳐버리고는 엉뚱한 파트너를 만나자 입술을 샐쭉하는 건 심히 귀엽고.
 
샬롯을 이끄는 맵시는 어디서 배운건지 묻고 싶다. 내미는 손,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 단정하고 매혹적인 눈인사, 그리고 허리 뒤로 신사답게 접은 다른 팔까지. 어떻게 이렇게 하나의 그림이세요. 당신은 대체 어느 누가 그리고 어떤 무엇이 채색한 예술인가요.
 
그렇게 아름다운 이가, 샬롯의 죽음을 바라보는 무정한 얼굴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저리 내달릴 때까지 그 주변의 많은 이들은 무엇을 하였는지. 천사의 추락이라는 헨리의 읊조림에 동의하면서도, 그 단정은 헨리의 몫일 수는 없다는 화가 솟았다.
어떤 갈래의 웃음인지, 실소인지 자조인지 분간키 어려운 웃음을 밭은 숨처럼 내쉬는 그를 보는 것이 쓰렸다.
 
밤공에선 정반대의 마음이 일었다. 연민조차 잃은 텅 빈 영혼이라 힐난하는데, 상황만 보면 정당방위가 아닌가? 누가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연민을 품는단 말이야.
 
여담으로 무도회 계단에 오르는 광대의 코트가 꼭 꼭어제 콘서트의 인터스텔라 코트 같아서 흠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