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헤어는 옆머리를 조금 세워 올린 스타일. 덕분에 잘생김이 빛났다.


오늘의 넘버는 도리안 그레이.
 
기분 탓이었을까. <사라진 아름다움>의 회한의 소절ㅡ우리가 원하던 건 무언가ㅡ부터 소리가 달랐다. 어제의 합창이 두 영혼의 절규와 같았다면 오늘은 자조였다. 잠겨 드는 목소리에서 깊은 탄식이 느껴졌다. 누가 더하다 할 것도 없었다. 수렴의 방향이 가지는 다를지언정 갈래는 같았다. 덧없이 끝나버린 아름다움을 향한 회한.
 
<도리안 그레이>는 더한 나락이었다. 무게감 없는 걸음걸이로 한 보 내디딜 때마다 수렁이었다. 생기를 잃은 목소리가 뼈를 깎는 자조를 노래했다. 사무치는 후회가 얼굴에 한 가득이었다.
그림 속 저 사람 도대체 누굴까ㅡ이제야 마주보는 영혼의 얼굴. 어제는 보고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해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면 오늘은 조금쯤은 더 마주했다. 끝내 견디지 못하여 무너지는 것은 같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소멸. 죽음에 잠겨 든 육신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빛 받아 온통 하이얗게 바래버린 그 모습이 마치 육신이 산산이 분해되어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만 같았다.
죽음에 삼켜진 생기, 빛을 잃은 눈동자. 더듬더듬 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는 얼굴이 희미하게 웃었다. 황금 빛깔 천국을 보았을까. 손을 뻗어 그러쥘 듯하다 미간을 슬프게 접는 얼굴이 처연했다. 지친 입꼬리에는 눈물이 맺혀, 눈을 대신하여 울음하는 것 같았다. 죽음 건너편의 한때는 아름다웠던 그 소년은 그를 마중 나왔을까. 다시 만난 그를 위하여 대신 웃어주었을까. 그래 주었다면, 좋겠는데.
 
쓰러진 후, 죽음 뒤의 얼굴이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닫힌 입술, 경직된 이마, 짧게 맺힌 눈썹. 죽음을 얻고서도 편안해 보이지만은 않는 표정을 하염없이 보았다. 감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온몸으로 회한하였던 그의 <도리안 그레이>가.
 
커튼콜의 배경은 아직 어둠이 깔린 남청빛 새벽녘 같아 서글픔을 더해주었다. 모든 것이 안개빛 어스름에 가려져 실재와 아닌 것을 분간할 수 없는 시간. 그 자체가 환상인 배경. 하지만 환상인 구원이라 해도 좋다. 혼자가 아닌 채로 그를 보낼 수 있으니, 그것으로 좋아. 부디 그곳에선 누구도ㅡ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잃지 않고 행복하게 아름답기를.
 
 
*
 
1막의 넘버는 Against Nature. 그런데, 생각해보니 1막에는 시아준수 완곡이라 할 수 있는 곡이 딱 둘뿐이었구나.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노래의 결핍이 느껴지지 않았다니. 이번에 아무리 노래와 연기의 구분이 없는 경지의 그라지만, 세상에나. 이건 너무나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걸.
 
 
1.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오늘도 배질의 애드립. 둘이 웃지 마, 정들어. 그리고 나-쁜 영향? 에서 반짝거리던 호기심.
 
헨리의 찬란한 아름다움에 몸을 맡긴 듯이 음을 타던 그가 아름다웠다. 이어 조금씩 소리내어 따라불러 보는 음성은 2막의 리프라이즈와 현저히 대비되는 곱디고운 미성. 어울리지 않는 옷을 주섬주섬 입어보는 듯한, 제 것보다 훨씬 큰 다른 이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덧대어보는 듯한 음성이 마음을 서걱서걱하게 했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안 되었던 걸까. 저 호기심 멈추어줄 이가 정말 없었던 걸까, 하고.
 
2.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액자가 떠날 때마다 가지 말라 붙잡고 싶다. 액자야, 그를 떠나지 마. 그의 순수를 지켜줘.
 
‘이게 정말 나에요?’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자각하자마자 그것을 잃게 될 운명까지 더불어 알아버린 얼굴에 깊은 상실감이 서렸다. 그러쥘수록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모래알과 같은 젊음의 덧없음에 불현듯 사무친 얼굴. 자신의 아름다움도 채 소화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잃기까지 해야 한다니ㅡ그 무엇에도 준비되지 않아 온통 혼란인 얼굴. 그 와중에 알쏭달쏭하게 빛을 내는 눈동자가 더없이 아름다웠던 그.
 
이 상태에서 단지 거들뿐인 헨리는, 와, 딱 기름에 불붙이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3. 당신은 누구일까
줄리엣의 목소리에 일렁이던 눈동자 속 빛. 찰나가 전해준 황홀함. 이 장면을 연출한 모든 분들 복 받으세요. 무대 위의 아름다움 그 자체인 시아준수 감사합니다. 특히나 마지막에 두 손 모아 노래할 때 세상에 감사하는 기분이 된다. 그에게 줄 환희를 위하여 세상에 사랑을 내린 것만 같아.
 
4. 최악의 줄리엣
오, 저 발코니에 모인 빛은 무엇인가요? 로미오의 대사를 이대로 치환하여 그에게 들려주고 싶다. 아아, 왕자님.
왕자님은 오늘 두 번 고개 숙였다. 줄리엣의 발연기에 당황하여 일행들을 돌아보며 침묵 속에서 시무룩 한 번, 시빌 베인이 아픈 것 같다 하자 돌아오는 브라보! 에 또 한 번.
 
5.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헨리, 나는 냉혹한 사람일까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에서 경탄이 깃든 떨림. 헨리에 대한 경외, 불현듯 사그라진 고통과 찾아온 환희를 향한 찬탄. 내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던 그의 심장박동.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공감각적으로 연기를 할 수 있는 걸까.
 
6. Against Nature
신이시여 용서하소서ㅡ두 손 맞잡아 기도하는 안무는 볼 때마다 그 배반적인 모습에 짜릿하기 그지없다. 좋을 때마다 거듭 써야지.
그리고 표정도.. 어떻게 그렇게 평정하지? 어떻게 그렇게 흔들림 없이 평온해? 얼굴만 보면 춤추는 중인 걸 모르겠다.. 그냥 변함없이 아름다울 뿐야.
 
7. 넌 누구
라일락향 가득했던 나의 젊음ㅡ의 과거형인 것이 오늘의 슬픔. 머리로 아니라 해도 알고 있는 그가 아팠다. 넘버 전체로 반항하며 뿌리치려 몸부림하는 그가 서글펐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 외적인 소리는 착착 바닥을 날카롭게 내려치는 구두 굽. 급박하고도 차갑게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에서 희열이 솟는다.
 
8. 무엇이 기다릴까
그림에 대해 캐묻는 배질을 놀리듯 웃음기 만연한 얼굴에는 조금의 심각함도 없었다. 배질의 심각함과는 판이하게 대비되는 생글생글함. 심지어 오늘은 이제까지의 도를 넘은 우롱을 선사했다. 찬찬히 한 모금 빨아들인 연기를 배질의 얼굴을 향하여 곧장 내뿜는 순간 잠시 공기가 멈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침묵의 좌절이 떠오른 배질의 얼굴을 보고는 그것마저 재미있다는 양 야시시 웃는데, 그렇게 거리낌 없이 상대를 능욕하면서도 그러한 행동에 흡사 당위까지 느껴지게 하는 존재적 설득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도리안이 배질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데, 뭐.. 이런 느낌이었다고 하면 될까.
 
선악의 변모. 영혼의 비밀을 소리로 들려주는 찬란한 아름다움 리프라이즈의 시간이 오면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쥔다. 1막에서 더듬더듬 첫 발걸음을 떼던 조심스럽던 소리와 현격히 다른 음성. 이제는 완연한 자신의 것으로 녹여내어 타락의 극치를 선사하는 퇴색한 금속성. 흐늘거리는 육신, 약에 취해 야살스레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 배질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변해버린 그 음성. 어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쪽소리는 오늘도. 가운의 열일도 오늘도. 게다가 왼쪽 샌들 끈은 왜 그랬어? 이제는 샌들도 유혹하는 거양? 소품까지 물아일체의 경지인가, 그런가..
참. 소파에서 일어나 가장 처음 뗀 걸음이 유난히 격정적이었다. 그 입 반드시 막아주지 하는 결의가 보였다고 해야 하나.
 
9. 또 다른 나
연출의 의도는 알겠는데. 재등장이 조금씩 당겨지고 있는 것도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가 무대에서 사라지는 순간 현장감도 함께 사라지는 느낌은 어찌할 수 없다.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야. 라이브인지 녹음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현재하는 라이브가 전해주는 그 날만의 느낌이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말아.
 
10. Life of Joy
기도하고 사랑하라 짜릿하게, 행복하고 유쾌하라 음란하게. 중앙 동선으로 옮겨와 헨리와 배질 사이를 가르고 서서 두 팔을 펼쳐내며 노래할 때, 말끔한 검은 정장 덕에 검은 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다. 이것이 곧 악의 꽃일까 싶게 소릿결과 모습이 하나와 같이 아름다워.
 
찬란한 아름다움 리프라이즈에서 헨리와 다시 만나 타락의 건배를 나누는 건 역시나 안타까움과 희열의 이중주를 선사한다. 돌이키고 싶어 하는 것을 아는데 돌이키는 방법을 모르는 그. 오로지 타락으로 내달리는 방법밖에 배우지 못한 그임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
 
11. 악의 꽃
다비드, 올림포스, 아폴론. 그 어떤 신성을 끌어와도 무도회의 도리안을 다 품지는 못할 것이다. 능숙한 왈츠는 여유롭기까지 하여 심장을 뛰게 해. 20년간 저렇게 사교계의 가장 찬란한 벌로 군림하여 왔으리란 것을 알게 한다.
 
처음 보는 미모의 노랫소리에 반응하는 시시각각의 얼굴도 아름답다. 소리가 먼저, 얼굴이 그다음. 흥미로운 상대를 만난 얼굴에 피어난 관능적인 미소. 저런 얼굴로 손을 내밀면 누가 마다할까.
그런데 그러고 보면 시빌 베인 자매는 둘 다 도리안을 멈추어 세웠네. 복 받은 유전자인가 봐.
 
12. 너를 보낸다 reprise
배질의 죽음. 오늘의 눈물은 빨랐다. 배질이 죽음에 무너진 후에 얼마간의 충격으로 멍해져 있던 얼굴이 일시에 울음으로 터져버리곤 하였던 것이 이제까지의 그였다면 오늘은 칼을 찌른 채로 자신의 품 안으로 늘어진 배질을 보며 이미 울컥해버린 목소리였다. 서서히 품에서 떨어져 나간 배질이 죽음에 갇히고 나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칼을 쥔 손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황망하게 떨렸다. 그보다 더욱 떨렸던 것은 손. 부르르르 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손이 끝끝내 칼을 놓치고 말면, 배질의 곁으로 쓰러져 울음을 뱉었다. 서럽게. 서럽게.
 
 
(+) 당신은 누구일까가 끝난 후의 소품이 떨어져 깨지는 사고. 다음 순서인 최재웅 배질이 노래하며 매우 자연스럽게 깨진 조각을 주워 드는데 어쩐지 노래의 상황과 매우 어울린단 생각을 했다. 센스있기도 했고.
(+) 헨리!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