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공은 내린 샤큘, 밤공은 깐샤큘.
염색을 새로 하여 완연한 붉은빛의 그. 돌아온 피땀과, 피눈물.
요즘 내린 그는 청순함이 빛이 난다. 반짝반짝. 넘긴 머리로는 거침없이 유려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깐샤큘일 때의 그는 가능한 한까지 멋져줄게 이렇게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낮공의 그는 차분했다. 그 찹찹함으로부터 일파만파 퍼지는 감정선은 삼연곡에서 섬세함의 절정을 이루었다. 낮공의 그는 꼭 사랑의 외줄을 타는 것 같았다. 이전에는 400년 세월을 사랑의 외나무다리에 의지해 견뎌왔다면 오늘은 두 발로 딛고 설 만한 공간조차도 없어 보였어. 사랑의 외줄(이자 생명줄)을 두 손으로 간신히 붙들어 맨 채 꾸역꾸역 시간을 흘려 온 듯했다. 그 정도의 처연함이었다.
밤공은, 자랑스럽고 기쁘게 레전드라 말하여 본다. 극 안에서 그는 온 우주였다. 배우, 관객, 무대의 몰입도가 하나를 이룬 채로 그를 향해 수렴했다.
완벽함, 완전함 그 어느 수식을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오늘의 밤공이 어느 정도의 격충이었느냐면, 막이 내린 후 카메라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그가 누운 자리를 보다, 그가 도로 나와 웃고, 인사하고, 손 흔드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공연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게 한 채로 그저 바라만 보게 하였던 건 가장 최근에는 (뮤지컬로만 본다면) 디셈버 서울 막공 이후 오랜만이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던 것은 오늘 펼쳐진 공연의 조화로움에 감탄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오늘에도 역시, ‘다음’이 존재함을 선언한 그에 대한 경이가 감격을 낳고, 그 감격 속에서 퍼지는 행복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아, 시아준수. 그래요. 시아준수의 무대는 끝나지 않을 아름다움의 오르막길. 오만 번이고, 백만 번이고 박수받아 마땅한 사람. 언제나 내 마음의 금메달리스트.
낮공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삼연곡. 그리고 Life After Life, It’s Over, The Longer I Live.
밤공은 정말 모든 장면이 다 좋았는데 그래도 굳이 꼽자면, Fresh Blood, She, Life After Life.
1.
Solitary Man
낮공에서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적막하였던 그. 걸음걸이조차도 평소보다 훨씬 노쇠하여 안쓰러웠다. 공주와 행복하였던 시절의 아름다운 왕자님은 어디에 가고 이토록 시들어버렸나요.
2.
Fresh Blood
낮공. 변신 후의 목소리에서 젊음과 생기가 확연하게 흘러넘칠 때 그 형용할 수 없는 짜릿함. 몸놀림도 한순간에 확 바뀐다. 젊어진 만큼 야성적으로, 더 거침없이.
게다가ㅎㅎ 너무 오랜만의 드라큘라여서 그랬나. 새삼 충격적인 비주얼에 감탄, 또 감탄. 충격적으로 아름다우시잖아요 시아준수가.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이, 낮공 때는 비교적 오랜만이라서 충격이 컸다 치자. 그러면 밤공은 왜.. 심지어 밤공의 충격이 더 컸다. 밤공은 무슨, 이 무대를 처음 보는 것 같았어. 27일 밤공에서도 그 충격적인 아름다움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는데 오늘 그 못지 않았다.
특히 그가 침대에서 내려와 무대를 횡단할 때. 횡단하면서 멋지게 늙은 얼굴로 가득가득 조효할 때. 그 굽은 등과 살짝 끄는 걸음걸이와 공기를 움켜쥐는 손가락이.. 흑흑.. 파괴적으로 멋있어..
‘내 사랑 미나!’ 하며 조나단의 목을 움켜쥐고, ‘영원히 살리!’ 하며 그를 침대로 내동댕이칠 땐 숨이 막혔다. ‘다시 찾은 내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파워풀했던 건 물론이고. 망토 모자가 한 번에 벗겨지질 않아 슬레이브가 버벅대며 잡아끄는 바람에 머리가 제멋대로 가닥가닥 뻗었지만 그마저도 야성적으로 섹시했다.
슬레이브들과 하나의 붉은빛처럼 엉켜 젊음을 과시할 땐 어떻고.
완벽했어. 너무하리만치 파괴적으로 아름다웠다.
아.. 아무래도 이번 뮤지컬에서 너무 좋아서 우는 경험을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
3.
윗비. 항상 쓰는 말인데 윗비에서 정말 정말 진짜진짜진짜 너무너무 예뻐요. 말투나 몸가짐이 근사하여 신사 같은 데다 얼굴에서 벅찬 빛을 숨기지 못하고 반짝반짝 빛을 내니 시선이 가고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예뻐요, 정말 예뻐요.
특히 뒷짐 지고 걸을 때의 자태.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근사하다. 발끝이 그리는 곡선마저 우아해. 예뻐요. 정말요.
낮공에선 심지어 미나가 그를 붙잡을 때(죄송해요! 영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돌아보는 눈동자가 일렁일렁 빛났다. 감격스러운 듯이.
거봐, 우린 운명으로 이어져 있어, 하는 시선으로 감격해 하는 것도 같았고, 또 환생한 그녀에게서도 엿본 착한 성품에, 미나가 곧 400년 전의 엘리자벳사임에 감격해 하며 또 한 번 사랑에 빠진 눈 같기도 했다. 그래서 루시를 잠깐 스치는 차가운 눈동자와의 격차가 더욱 두드러졌어.
(+) 루시 때문에 몸을 돌려나갈 때 홱 소리가 날 것처럼 몸을 틀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네. 낮공.
4.
Lucy & Dracula 1
밤공은 오랜만에 C블록이었어서 루시를 향한 그의 표정이 잘 보였다. 매우 복잡미묘했어. 이게 뭐지? 얘는 뭐야? 이런 느낌으로 미간을 모으고 있다가 숄을 내려 드러난 어깨를 보고는 본능에 이끌리며 입맛을 다시던 얼굴까지.
아아, 이런 게 브라운관 클로즈업 연기감인데. 뮤지컬 극장에는 왜 전광판이 없는 거죠? 전신 따로 얼굴 따로 이렇게 샅샅이 다 보고 싶은데.
5. 삼연곡ㅜ.ㅜ
She.
밤공에서 사무쳤던 부분은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낮밤 모두 아팠던 대목은 ‘제발, 신이시여, 사랑하는 나의 그녀, 다시 살려 주소서.’
제발과 신이시여에서 음이 허용범위에서 멋대로 떨리며 울던 모습, 일렁이던 눈동자 잊지 못해. 여기까지 부른 후 고개를 떨구었을 때 오늘따라 넓어 보이던 어깨는 또 왜 그리 가여웠는지. 축 늘어져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쓸어주고 싶었다.
At Last.
She에서 차곡차곡 응축한 감정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잠겨있다가 At Last에서 함께 폭발한다. 항상 너무도 슬퍼. 가사도 대사도 너무 절절해서.
‘절대로’에서 내뱉어지던 그의 절망.
‘영원히’에 섞여들던 괴로운 울음.
‘당신과 함께’ 고개를 틀어 그녀를 바라보며 용기 내 건네는 대답.
그리고 노래의 시작. ‘이제 깨달았나요.’ 이때 그의 음성이 얼마나 스스럽고도 신중한지.
일전에 그녀보다 한참 앞서 나가느라 반발을 샀던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는 목소리다. 400년을 기다려왔는데 몇 초 몇 분이 대수일까.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마음을 꾹 눌러 담고 그녀에게 온 신경으로 사랑을 호소하는 그(를 보는 내 마음이 터질 것 같다..ㅎㅎ...).
‘마침내의 입맞춤’은 낮밤 모두 평소보다 길었고 긴 만큼 절절함이 배가 되었는데, 나 여기서 정말 너무 심장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파. ‘마침내’ 입술이 닿았을 때의 그 떨림에 내가 다 울 것 같아..
그리고 기어이 그를 울리는 그녀와, 그의 외마디 절규. ‘당신은!! 이미 결혼했어..’
러빙유.
밤공. 1절.. 아아.. 내가 이것을 보고 듣고도 살아있다니..
‘사-아-랑’
‘내게로 와요’
울음으로 불렀던, 바슬바슬 애틋하게 부스러지던 음성.
2절. 그가 움켜쥐는 심장이 그의 심장인지, 나의 것인지. 폭발할 땐 정말 심장으로 감당하기 버겁다. 버겁다고 느끼면서 새삼 신기했어.
보통 거듭 보다 보면, 유달리 감정을 건드리는 날 외에는 시아준수를 면밀하게 보고 듣고 관찰하는 태도가 (나도 모르게) 되곤 하는데 이번은 조금 다르다. 공연 횟수가 스무 번이 가까워 지는데도 매번 나를 감정적으로 건드리는 부분이 하나씩은 꼭 있다. 어느 틈엔가 울컥해서 눈앞이 희미해져.
오늘의 러빙유에서 가장 사무쳤던 부분은 마지막에 ‘이제 내게 돌아와 함께 춤춰요 새벽을 향하여.’ 애구하는 그를 지나쳐 조나단에게로 가는 미나와, 그녀를 따라 옮겨가는 그의 시선을 보았을 때.
털썩 무릎 꿇어 웅크린 등과 얼굴로부터 다시금 피눈물과 피땀이 쏟아져 내렸다. 낮공 삼연곡 시작 전만 해도 깔끔했던 블라우스가 이즈음에는 다시 불긋불긋해졌다. 특히 뒷목 부분.
6.
Life After Life
흑흑 오늘 정말 최고.
낮공에서 루시의 박자가 살짝 빠른 부분이 있었는데 동요 없이 정확한 흐름을 유지하는 그를 보며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루시가 실수할 때마다 그가 더 거대해 보인다. 대장님 같고, 창조주 같아.
묘지 문밖으로 향할 때 고개를 젖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는 멋진 동작은 오늘도 보았네. 낮밤 모두! 특히 밤엔 고개만이 아니라 상체를 전부 써서 매우 탄력적이고 거칠게 머리를 넘겼다. 멋있음 흑흑.
7.
렌필드는 밤공에서 ‘멍청한 것’이 되었다ㅎㅎ
8.
Mina’s Seduction
안개 속에 함‘께’ 이 부분의 소리가 왜 이렇게 좋은지. 마냥 곱진 않은, 뭔가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은. 정갈한 세계가 쪼여 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음성으로 길고 세게 내질러 주니까 희열이.. 아ㅜㅜ 너무 좋아ㅜ
흡혈 당하며 털썩 힘이 빠지는 연기는 고개와 상체, 팔 모두 섬세했다. 밤공에선 미약하게 한숨 소리도 들렸다.
9.
It’s Over
오늘처럼 It's Over 에서 박수치지 못해 애가 탄 적이 또 있었나. 정말 아쉽다. 구석구석까지 강렬한 노래. 철심을 박아놓은 것 같은 파워.
낮밤 모두 포↗기해. 그리고 낮공에선 오랜만에 크고 명확한 헛웃음.
밤공에선 헛웃음 대신 미나가 그를 막아설 때 잔뜩 부푼 눈에서 의아함과 배신함을 함께 보았다.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하며 뛰쳐나갔어. 그 순간 그의 감정이 내게로 전이되어 미나가 정말 밉더라.
아아, 밤공 초반. ‘포’기해 음 하나가 허스키하게 튀며 갈라졌다. 대번에 원래의 음계로 돌아와 평소처럼 마무리되었지만, 그 갈라져 튄 음이 몰아치는 It's Over와 꼭 어울렸던 탓에 오히려 의도한 것처럼 절묘한 연출이 되었다. 꼭 I Have Nothing 에서의 튄 음처럼. 과연, 시아준수에겐 노래 아닌 소리가 없다.
10.
The Longer I Live
행진곡을 부르기 위해 걸어나올 때부터 비장한 얼굴에 결연함이 감돌았다. 수심 가득한 모습. 이미 결심을 굳힌 눈이었다. 내려놓고, 보내주기로 한 뒤의 얼굴이었어.
'사/라/질/까’에 이어 ‘영원한 삶’으로 넘어갈 때 이 목소리의 변화. ‘까’에서 크게 내지른 후 곧바로 이어지는 곱고 모래알 같은 음성의 ‘영원한 삶.’ 낙엽처럼 퍼석하기도 한 그 음성. 여운이 엄청났다.
밤공에선 내려오다 휘청했는데, 진짜 이 계단 위험하다. 특히 맨 위 계단은 항상 흔들려. 여기도 어떻게 수선을 하였으면.
11.
At Last
(+) 깃이 눕지 않았다!!!!
낮공. 당신의 어둠을 향한다는 소절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석상 사이에서 등장할 때는 항상 울음을 참는 얼굴인데, 밤공은 그 정도가 유달리 심했다. 기다리던 그녀가 마침내 당도하였지만, 그 기다림 끝에 더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어진 상황에서 울음이 모이던 그의 얼굴. 조심스럽고 천천히 그녀를 향하여 걸음을 옮기던 수심에 잠긴 옆모습.
‘차가운 암흑 속에 저주받은 내 인생.’
낮밤 모두 ‘암흑 속에’가 요동쳤다. 흐느낌으로 떨렸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저주받은 내 인생’에선 두 팔을 벌려 상체가 경련했다. 그래서 더 와 닿았어. 그의 400년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그녀를 설득하고자 하는지.
동시에 그가 더 많이 아팠다.
누구보다 마지막을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일 텐데. 그가 스스로 결심하고 맞이하고자 하는 마지막이 어떤 것인지, 그 고결함이 대체 어떤 사랑을 품고 있는지. 그 전부를 그가 노래했다.
그렇게,
마지막 포옹.
마지막 눈맞춤.
마지막 입맞춤.
그리고 정말 마지막.
그녀를 향해 뻗은 마지막 손길이 눈에 콕 박힐 정도의 충분한 시간 속에서 그가 어둠에 잠겼다. 낮공의 미나는 침묵의 흐느낌 속에서, 밤공의 미나는 섧게 토해내는 외마디 비명 같은 울음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사랑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