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첫 공연, 새 달, 새 염색. 그래서 윗비베이에서 참 눈이 부시도록 쨍하게 아름다웠던 백작님.
아름다움만큼이나 오늘의 윗비에서 분명하게 보였던 건 그의 넓은 보폭.
“그럼, 이만.”
한숨결에 흘려보낸 인사말과 함께 단 한걸음 만에 이미 아치문 앞에 도달해있다.
Lucy & Dracula 1, 당신을 만나러 왔노라며 성큼 다가설 때도 그랬다. 한걸음에 무대의 거의 반을 횡단해오니 미나가 놀라는 것도 당연해. 다가오지 말라 경계하는 그녀에게서 흠칫 물러날 때는 다가선 걸음의 반을 물렸다. 그의 움직임이 크고도 분명하여 이 밀고 당기는 걸음걸이가 참 크게 다가왔어. 특별할 게 아닌데도 참 좋았던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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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성의 노백작님. 미나와의 재회에서 건넨 ‘엘리자벳사’의 음성이 무척 새로웠다. 부드러우면서도 얼떨떨한 상승선을 그렸던 평소와는 달리 물결쳤다. 높은음에서 시작하여 다섯 음절이 전부 톡톡 튀었어. 또 들을 수 있을까.
드라큘라 성을 시작으로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톤의 음성이 많았다.
Lucy & Dracula 1,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구요ㅡ부터 특히나. 속삭이듯, 타이르듯 안개 같이 부드러운 음성이었어. 잘라서 들을 것.
It’s Over, 다시 부르는 ‘미나!’ 역시. 절망 반 놀람 반의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래서일까. 딱히 그녀를 향해 하는 말 같지 않았다. 그냥, 현실을 부정하며 미나의 이름을 불러본 것도 같았어.
하지만 강할 때는 강했는데 그중에서도 최강점은 Fresh Blood, ‘내 사랑 미나!’의 높은음. 감히 오늘의 절정이라 칭하고 싶다.
임혜영 미나와의 기차역은 이제 대본을 벗어났다.
오늘따라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기차를 탈선시켰노라며 웃는 얼굴이 해사하더라니. 꿍꿍이가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 이 분위기 어떻게 하죠..”
미나의 질책에 그가 반걸음 쯤 앞으로 나섰다. 미나에게만 곧게 향해있던 시선이 빙 돌아 객석으로 향했다. 짧지만 고루고루 분위기를 살핀 후에야 나직하게 중얼거렸어. 꼭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She, 공주님을 소개할 순서. 두 사람이 웃음 나눌 때가 참 항상 어찌나 이렇게 애틋한지. 이렇게 알콩달콩 동화 같은 실화를 함께 나누며 지내는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는 생각을 기어이 하게 만들어.
그런데 신을 저주하기 전에 손으로 꼬물꼬물 무엇을 빼낸 거지? 무대 높이에 그의 상반신만 보여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언가를 엘리자벳사 아래에서 두 손으로 힘겹게 빼내던데, 옷이 깔렸던 걸까.
At Last, 눈물의 주고받기.
‘이제 안개가 걷힌다’는 미나에게 그가 옅게 웃었다. 예쁘게, 그리고 무척이나 애틋하게.
‘내 앞에 그대 서 있네요’ 라는 그에게는 미나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빠르게, 다급하게. 필사적으로.
그와 그녀의 마음주고 받는 앳라스트 너무 좋다구요.
Loving You Keeps Me Alive, 두 팔을 가로 넓게 벌리며 그가 노래했다. “내 세상은 떨려.” 제 세상을 두 팔 안에 펼쳐 보이면서, 이 떨림을 제발 보라는 것처럼.
트레인 시퀀스 디테일은 볼 때마다 마음 아리게 좋다. 마음 다하여 갈구한 후엔 그녀를 향해 뻗은 손이 마주 닿기를 기다리는 그다. 그녀를 잡아채지 않고,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고,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걸음으로 그에게 오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눈이 아무리 절박한 빛으로 울고 있어도 러빙유의 그는 절대 강제하지 않는다.
결국 그를 비껴간 그녀가 조나단의 앞에 서더라도, 탈선하지 않아.
설령 엘리자벳사의 기억이 없다 하여도 이렇게나 정중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를 그녀는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Mina’s Seduction, 오늘의 임혜영 미나. 흡혈 후 꽤 느리게 침대 위로 쓰러졌다. 코앞에 적들이 도열해있는데도 끝까지 그녀를 지켜보던 그가 참 다정했다.
줄리아의 죽음. 어미가 살짝 바뀌었다. 조금 더 구어체로, (그녀를 생략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는 것뿐이었어.’
‘난 미나를 사랑해’에서는 물음표 가득한 눈을 보았다. 사랑을 입에 담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눈이었다. 어느 날보다도 분명하게 The Longer I Live의 연장선으로 보였다.
Finale. 드라큘라를 찾아 성안을 두리번대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사람의 그림이 바로 보였다. 천이 내려가 있어 그림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처음 있는 일. 단번에 시선을 꿰찬 그림 앞으로 그녀가 홀린 듯이 다가갔다.
이제야 내가 원하는 걸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그녀의 고백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말을 가로채는 법은 없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얼굴은 그녀를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연신 고개를 내젓는 그의 모습 위로 1막의 At Last에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겹쳐졌다.
그와 그녀의 엇갈림이 슬펐다. 그녀가 그를 향해 다가서며 끄덕였던 고갯짓을, 그가 물러나는 것으로 화답한 셈이므로.
..5월 3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