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2016.04.05

128-129p.
"아, 베질,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도리언 그레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황금색 기포가 들어 있는 섬세한 베네치아산 유리잔에 든 엷은 노란색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몹시 따분한 눈길로 홀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만 하세요.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요."
"어제를 과거라고 하나?"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는 상관없잖아요? 하나의 감정을 지우는데 1년이나 걸리는 건 오로지 어리석고 천박한 인간일 따름이에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쉽게 기쁨을 창조하는 것처럼 슬픔도 쉽게 끝낼 수가 있지요. 난 내 감정에 좌우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그 감정을 이용하고 즐기고 지배하고 싶다고요."
"도리언, 어떻게 그런 끔직한 말을! 뭔가가 자네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어버렸군. .... 지금의 자넨 마치 심장도 없고 연민도 없는 냉혈한처럼 말하고 있어. 이게 다 해리의 영향 때문이라는 거, 난 알고 있네."
도리언은 상기된 얼굴이 되어 창쪽으로 다가가더니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쏟아지는 햇살에 푸른 정원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베질, 난 해리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어요." 마침내 도리언이 입을 열었다ㅡ"당신한테 감사하는 것 이상으로요. 당신은 나에게 헛된 것밖에 가르쳐주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