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이야기. 동화가 된 뮤지컬. 볼 때마다 행복하다. 실컷 웃어서, 또 실컷 울어서. 오빠의 콘서트처럼 행복을 맡겨둔 무대. 이런 게 뮤지컬에서도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실컷 춤추니까 어때요? 개운한가요?
도리안에서 미처 다 풀지 못했던, 웨사스에서는 아예 묶여 있었던 몸. 그간의 원을 청산하는 사람처럼 그야말로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오빠를 보는 마음 또한 잔잔할 리 없다. 오아시스에는 야자수를, 시아준수에게는 노래와 춤을. 이 반박할 수 없는 명제를 공고하게 천명하는 듯한 두 시간 반인 것을. 첫 프리뷰에서 언뜻언뜻 내비치던 긴장감도 두 번째 공연부터는 완전히 씻겨 내려가서 진정 가벼운 발끝과 어깨가 볼 때마다 얼마나 애틋한지.
아그라바 아이돌다운 팔 각도, 박자에 대고 맞춘 듯이 정교한 동작, 그러면서도 유려하기 그지없는 안무.
춤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다 춤추는 극. 박수칠 때 떠나는 법 없이 계속해서 춤추는 극.
대체 누가 오빠처럼 춤추고 노래할까. 노래에도 춤에도 숨 돌릴 틈은커녕 숨 쉬는 구간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군무에는 활력을 주고 노래에는 품격을 주는 배우.
춤이란 건 사실 신이 오빠를 위해 인류에게 선물한 재능이 아닐까. 박자라는 건 오빠의 춤을 인간의 눈으로 헤아리기 위해 빚어진 관념인 것이지? 노래라는 건 오빠의 소리에서 파생된 아름다움이 아닌지?
상상을 현실로 맞이하는 감격이 너무 커서 때때로 압도되는 느낌이다. 관객인 나도 이럴진대, 신비의 동굴에서 알라딘의 탭댄스를 설계한 안무가의 심장은 무사할까? 엔딩을 기획한 연출가의 영혼은 감격을 버텨내고 있을까?
이 모든 동화를 눈앞에 둔 관객으로서의 나는, 어려서 보고 자란, 참 오래 좋아하여 때때로 향수를 느끼곤 했던 소중한 추억이 김준수로 완결되는 행복을 직격으로 맞은 나는, 화살에 명중당한 과녁의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오빠가 늘 말했던, ‘춤 50, 노래 50의 김준수’의 밸런스를 비로소 실현하는 극.
하나부터 열까지 김준수를 위해 준비된 무대.
Proud of Your Boy부터가 이미 소리의 결이 오빠에게 불리기 위해 태어난 노래니까. 본넘버도 리프라이즈들도, 오빠의 색을 입는 것으로 오롯하게 완성되는걸. 이 노래가 오빠의 오디션 곡이었다면, 노래는 마침내 찾은 자신의 소년을 첫 만남부터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수평선 너머는 어떻게 또 마침 ‘수평선’ 너머인지. 어려서부터 노을, 파도, 수평선 같은 자연에 빗대어 노랫말을 써온 오빠를 위해 준비된 가사가 아니면 뭘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이 노래, 이 무대가 오빠만을 절실하게 기다려왔음을. 그 소망에 부응하는 공연자, 극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예술가. 김준수 아니고서야 그 누가 수평선 너머로부터 이처럼 아득한 향수를 길어 올 수 있을까. 토니가 그렇게나 바랐던 ‘그곳’이 바로 여기, 오빠의 알라딘이 노래하는 사막의 별빛 아래, 이 파도 너머에 실재하노라는 확신이 얼마나 눈물겹게 벅찬지 모른다.
오빠도 참 무자비하지. 소리로 노래를 엮을 때마다, 팔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오빠가 궤적을 남긴 자리에 동화가 서리는 감격이 크다 못해 무겁다는 걸 상상도 못할 사람 같으니.
기쁘고도 벅찬 건 오빠가 선택한 이 동화가 꽉 막힌 해피엔딩이라는 것이다.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워 더욱 단비 같은 웃음들로 가득한 극이라는 것이다. 웃다 못해 눈물짓게 되는 순간엔 한량없이 신기해지고 만다. 십수 년간 오빠를 사랑하며 또 처음 겪어보는 유형의 행복이 있다는 게.
‘알라딘’이라고 쓰고 행복이라고 읽는 오빠의 선물. 그 맑은 눈에 눈물이 고이는 순간은 오직 지니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때뿐인 극. 그게 벅차도록 좋아 숨죽여 글썽일 요량으로 뒤를 돌면 퇴로에는 또 함박웃음이 도사리고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
이 극이 다른 누구보다 오빠에게 행복이 되었으면 한다. 생애 첫 해피엔딩을 만나 처음 겪는 행복을 소화하는 사람처럼 벅차게 충만하여, 온전히 행복했으면 한다.
내 삶의 지니 같은 존재인 오빠에게 전하는 내 소원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