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어려운 건 연기였다. 11년차 가수인 그에게 무대는 이미 익숙한 공간이지만, 말과 표정으로 타인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암만해도 어색한 일이었다.
김준수(26)는 그래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대학 캠퍼스의 자유로운 낭만에 대한 또렷한 기억은 없지만, 뮤지컬 장면 속에 자신을 담가 '아마, 대학의 분위기란 이런 것이겠구나!'라고 짐작해 본다고 했다. 그리곤 여느 또래들처럼 누리지 못한 20대 초반의 '누락된 경험'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고 했다.
5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룹 JYJ의 김준수를 만난 건 뮤지컬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이하 '디셈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디셈버'는 '영원한 가객' 고(故) 김광석(1964~1996)의 노래 24곡을 엮은 작품. 김준수는 배우 박건형과 번갈아 주인공 '지욱'으로 무대에 선다. 극의 배경은 1990년대 비장한 기운이 흐르던 캠퍼스에 낭만이나 사랑 같은 '말랑말랑'한 정서가 조심스레 내리던 시기다. 대학생인 지욱은 음악과 시를 즐기는 순수한 학생으로 당찬 여대생 '이연'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아픈 헤어짐 끝에 20년 세월이 흐르고, 40대가 된 지욱은 이연을 닮은 여인과 만나 옛 사랑을 떠올린다.
준수는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이라서 오히려 더 어려운 느낌"이라고 말했다. 16세의 나이에 데뷔한 그에게 대학 시절 미팅이나 축제, 강의실의 팽팽한 논쟁 같은 경험은 '공백'같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지욱의 캐릭터는 나와 닮았다"고 했다.
"한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첫눈에 반한 사람의 시선을 끌려고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척도 해보고, 대립하는 의견을 일부러 내 보기도 하죠. 저와 비슷한 모습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가 소화해야 할 김광석의 노래에 대해 물었다. 그 시절 노래에 담긴 정서를 김준수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는 1막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1990년대 초반 고작 다섯 살 정도였을 그에게도 김광석의 노래가 여전히 힘이 있다는 '증거' 같은 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장면이에요. 지욱은 그에게 한 번 안아보자고 말하죠. 그런데 그 사람은 돌아서서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려요. 그러면 이 곡의 전주가 나오는데, 여기서 눈물이 탁 나오더라고요. '그대 보내고 멀리…'라는 첫 소절을 시작하는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요. 클라이맥스로 가면서는 감정을 좀 다잡고, 노래를 하는데요. 런스루(Run-through, 끊지 않고 전체를 한 번에 이어서 하는 연습)를 하는데 콧물까지 너무 나와서 '이걸 끊자고 해야 하나'란 생각을 했을 정도입니다. (웃음)"
김광석이 지금 30~40대에게 추억을 선사한다면, 20년 후 김준수도 지금의 10~20대 팬들의 기억에 머무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훗날, 김광석 '선배'처럼 김준수의 노래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섹시하고 격정적인 멜로물이 나올 것 같다"고 파안대소하면서도, 그는 시간을 견디는 김광석의 음악에 대한 진지한 부러움을 내비쳤다.
"음악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오래 남는 노래가 적어졌다고 할까요. 제 노래를 포함해서요. 그 누구의 잘못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는 시대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예전에는 하나의 노래에 그 시절이, 계절이, 추억이 실렸다면 지금은 그냥 소비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렇기에) 제 음악이 오래 기억돼 남는다면 가장 행복한 일이 될 겁니다."
공연 개막일까지 11일을 남겨둔 김준수는 터무니없는 악몽을 꿨다고 했다. 무대에 섰는데 대사를 몽땅 잊어버린 아찔한 꿈이었다. 실제 창작 뮤지컬의 경우, 끊임없이 대사와 구성이 수정되기 때문에 외국에서 사들인 '레디-메이드' 작품보다 난도 높은 순발력을 요구한다.
"창작 뮤지컬 '천국의 눈물'에서도 그랬거든요. 어제 대사가 오늘 바뀌고, 공연 들어간 다음 날 바뀌고…. 비교적 변화에 잘 적응하는 편이지만 불안하긴 하죠."
창작품 작업이 어려운 줄 알면서도, 이번 뮤지컬에 출연할 결심을 한 건 '배움의 시간'을 위해서였다. "'앗, 속았다'고 했다"며 농담을 할 만큼 작품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은 물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한 뼘쯤 성장한 자신을 기대한다고 했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분이 장진 감독님이에요. 늘 뭔가 '맥시멈'으로 하게 하는 분이죠. (그렇게 최대치를 끌어내는) 그 작업 자체만으로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김준수는 뮤지컬 '모차르트!', '엘리자벳', '천국의 눈물' 등 무대를 거치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아이돌 가수의 수명을 계산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가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높이 올랐기에 언젠가는 겪을 '내려오는 과정'이 너무 아프지는 않을까.
그는 "그냥 '행복했구나' 그럴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제가 받는 사랑은 당연한 게 아니에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을 (덤처럼) 이룬 것뿐이죠. 꼭 있어야 할 무엇을 잃는 게 아니잖아요. 감사하게 누리던 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불행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마침 카페 안에 김광석의 노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가 흘렀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외로움이 친구가 된 지금도/ 아름다운 노랜 남아 있잖아…'라는 노랫말이 그의 말에 포개졌다.
김준수가 생각하는 앞으로의 10년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질문을 받자마자 “이런 감사함을 유지하고 싶어요”라고 담담하지만 강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속에는 팬들에 대한 무한 사랑과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저는 제 음악을 기다려주는 팬이 없다고 느낄 시에는 가수 활동을 안 할 생각이에요. 지금 노래를 하는 것은 저를 위한 것도 있지만 80%는 팬들을 향한 감사함이거든요. 사실 전 정말 가수 활동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팬들의 힘 덕분에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팬들을 위해 노래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제 음악을 기대하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면 저는 깔끔하게 그만두고 뮤지컬 배우로서만 살고 싶어요. 사실 지금도 제 마음 속에는 뮤지컬이 주이긴 하지만, 진짜 뮤지컬 배우가 메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만약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 뮤지컬 배우 김준수가 도전을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만큼 제게 뮤지컬 무대의 짜릿함은 최고인 것 같아요.”
또 그는 “만약 제 음악을 기다려주는 팬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며 “저는 지금 제가 받고 있는 사랑이 과하다고 생각해요. 방송활동을 안 한지 4,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콘서트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잖아요. 그것이 저 스스로도 참 신기해요. 그렇기에 감사함을 늘 잊지 않고 행복하게 생각하고 싶어요”라고 진심어린 마음을 전했다.
“20대에 정말 많은 일을 했으니까, 30대에는 좀 놀고 싶어요. 안 그러면 정말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사실 제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예전에는 6시간 자보는 것이 꿈이었을 정도로 감사한 마음만큼 불행도 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좀 여유로운 마음으로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저 뿐 아니라 멤버들고 여유를 얻은 것 같아요. 물론 그만큼 책임감이 더 생겼지만요.”
연꽃
- 추천
"지금 제가 받는 사랑은 당연한 게 아니에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을 (덤처럼) 이룬 것뿐이죠. 꼭 있어야 할 무엇을 잃는 게 아니잖아요. 감사하게 누리던 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불행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