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날리던 악보가 옥상 난간으로 내려앉았다. 세 장 정도. 떨어진 것들을 스윽 내려다보곤 옥상 난간과 바닥에 남은 악보를 주섬주섬 주워든 그가 사람의 기척에 소스라쳤다가, 이연의 얼굴을 보고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만다. 이때 종이 한 장이 옥상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마음처럼, 팔랑팔랑.
하숙집 아침에선 아침 식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내 간밤의 일을 더듬더듬 곱씹으며 황홀해하는 모습이었다. 여일이 불러 깨울 때까지 미동도 없이, 귀여움을 발산하던 입술 사이로 언뜻언뜻 혀가 빼꼼하기도 했다. 여일 덕에 깨진 자기 세계를 보따리에 챙겨 넣으면서는 오늘 역시, 부리 청소.
담을 넘기 위해 안간힘 쓰는 종아리가 허공에서 잇따라 흔들렸다. 대롱대롱. 무릎을 각지게 접어, 거의 담 꼭대기까지 다리가 닿았다. 여일만 아니었으면 정말로 넘을 수 있었을 수도.
강의실 앓이의 일등공신은 그의 혀. 가지런한 이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입술을 축이고, 존재감을 과시하던 옅은 붉은빛 혀. 무르고 눅신한 혀를 앙 깨물며 눈썹 주위로 자잘한 빗살을 그려넣던 얼굴은 하숙집 아침에서보다 훨씬 깊은 황홀함에 도달해 있었다. 온 얼굴로 '끄응..' 마음의 소리를 냈다.
어김없는 방해자ㅡ여일을 향한 분노는 잡힌 손을 거세게 잡아빼는 것으로 시작한다. 커플 댄스 대회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여일의 터무니 없음에 혀를 내두르며 '안 나가' 일언지하에 거절한 그가 조금 더 확실히 몸을 빼기 위해 성태를 쿡쿡 찌른다. 중간에서 말리려는 여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을 엮어주며 손가락을 핑글핑글 돌렸다. 둘이 딱이야, 손뼉을 짝. 둘이서 해, 총알을 나란히 빵. 이것으로 논란은 끝, 손의 각도를 살려 자기 목을 쓱쓱 긋기까지.
조금쯤은 홀가분해진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하품한다. 강단의 교수님을 배려하여 몸을 튼 채로. 쌍꺼풀은 여일의 면전에서 그려 보였다. 토라졌던 여일이 그가 걸어오는 장난에 홀려 녹자, 고개를 요렇게 조렇게 좌우로 흔들어도 본다.
원칙 있는 남자. 수업 중에 꽁냥은 거려도 커플 댄스는 안 된다. 어느 틈엔가 여일이 도로 잡아온 손을 또 홱 빼곤, 가방 위로 엎어져 찡찡거린다. 지루함과 피곤함으로 범벅된 얼굴. 강단에선 학생 한 명이 교수에게 걸려 훈시를 듣고 있지만 그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성가심을 숨기지 않는 시선이 무심하게 멎어있다.
아아, 그런데 그녀다.
지루하던 강의가 온통 꽃밭이 된다. 확장된 동공이 열기로 달뜬다. "저기요!" 불렀으나 상황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토론을 하라니? 일단 차림새를 정돈하고 목을 가다듬어 차례를 기다린다. 눈동자를 좌우로 또르르 굴리며 손등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부리 충전 완료!
차례고 뭐고, 말을 가로채어 전력 질주한다. 얼마나 전심전력인지, 스스로도 제 말이 여일의 것보다 터무니없음을 느끼지만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끝까지 가본다. "아니라고!! 믿고 있으니까여!!" 말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지만, 반쯤의 성공. 언성을 마구 높이며 그녀가 돌아본다. 마침내 시선이 맞았다.
웃는다.
해돋는 미소.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그녀는 아니다. 애써 건넨 인사가 아깝지만 비장의 무기가 남았다. 소리. 나나나, 나나, 나! 나! 나! 부드러운 허밍에서, 스타카토로, 엉겁결에 버럭하는 그에게 맞장구 쳐주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교수님이다. 그래 너너너, 교수가 아니라 이연이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종이 울릴 때까지도 그녀는 돌아봐 주지 않는다. 그녀와 공유하던 공간이 수업 종으로 해체되면, 다시 또 사라진 그녀의 자취를 좇아 그가 부리나케 달려나간다. 방해꾼은 다 비켜,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게시판 앞. 축제로 떠들썩한 교정을 온통 뒤흔들며 찾아다닌 그녀다. 그의 인사에 대한 답인사도 아니고, 왜냐며 용건을 물을 뿐인데도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이힛, 웃음이 실실 샌다.
아아, 이 순간의 그와 매번 사랑에 빠진다. 거침없이 싱그러운 청년이다. 마구잡이로, 온 사방으로 반짝댄다. 청년을 떠나서 사람이 이럴 수 있나 싶게. 가방끈을 매만지는 손동작도, 그녀를 향해 오해 말라며 가로젓는 양팔도, 잰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쫓다가 우뚝 멈춰 서곤 하는 두 다리도. 거름종이로도 거르지 못한 떨림이 묻어나는 "한잔할래?!" 의 그가 좋다. 사단 변화를 거치며 시무룩함에 반쪽이 되었던 얼굴이 그녀의 웃음 한 번에 반색하여 폴짝 기운차리는 모습도.
기쁨의 노래. 아름다운 얼굴로, 선 채로 로미오가 된다. 있는 힘껏 맞잡아 하늘을 향해 떨리는 두 손에서 그의 흥분이 느껴진다. 땅에 닿기를 거부하는 뒷발차기에서도.
그의 반짝임에 사랑이 얹어지면? 그것은 마치 '사랑'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눈앞에 나타난 듯한 조합이다. <다시 돌아온 그대>는 완벽한 사랑의 절정이다. 이 하나로도 충분한데, 이 하나가 너무나도 아름답기에 한 곡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자체적으로 <이렇게 사랑해본 적 없죠>와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의 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사랑을 노래하는 그를 조금만 더 볼 수 있었으면..
짧은 만남이나 세상 그 어떤 것에 뒤지지 않는 아픈 이별임을 가능케 하는 것은 1막 내내 반짝반짝한 지욱과 <다시 돌아온 그대>가 있기에 가능하다. 이 노래 안에서의 그의 목소리, 홀로 부를 땐 증폭되고 어우러져 부를 때는 부드럽게 귓가를 감싸오는 목소리와 이연을 바라보는 생기 가득한 눈빛이 가능케 한다. 사랑의 여운으로 황홀해진 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접히며, 힛,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로 웃는 모습이 만드는 성이다. 사랑의 성.
눈물범벅의 이별.
생눈으로도 눈물의 반짝임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선냄비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 때는, 그 자신이 하나의 눈물방울이 되어 떨구어지는 듯했다. 그 울음이 대지에 닿으면, 그가 선 곳의 땅이 모두 화석이 되어 굳는다. 그의 기억도, 사랑도 모두 그날의 시간 속에 봉인된다.
*
시간이 많이 흘렀다. 외견상으로도, 목소리도, 표정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했던 첨벙거리는 걸음걸이는 이제 없다. 웃지 않는 순간에도 언제나 어떤 표정으로든 변화무쌍하던 얼굴은 무미건조해졌다. 잔상이 겹쳐지는 거동은 자칫 권태로워 보일 정도로 나른하다. 20년 후의 그다.
그런 그를 다소나마 무장해제하는 성태와의 만남은 그래서 반갑다. 나직이 "김성태 차장님~" 부르더니 와락 안겼다. 잠시지만 그의 두 다리가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허공을 짚었다. 여일이 가세한 후엔 그의 웃음이 마르는 순간이 없다. 폭풍 같은 호들갑. 목덜미를 쥐어 요리조리 훑어보고, 반갑게 포옹해오는 여일을 그도 기쁘게 안아준다.
그립고 반가운 사람들. 과거에도, 현재에도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 짧은 해후 끝에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 그들과는 다르게 흘러온 그의 시간이 비집고 나온다. 나는 그 사람을 한눈에 알아봤는데 그 사람은 왜 나를 모를까.. 그의 삶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20년 전. 그는 융화되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을 산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에서 그에게만 외따로 쏟아지는 부신 조명은 그의 격리된 외로움을 보여준다. 절망처럼 따갑게 쏟아지는 하얗디하얀 빛. 온몸으로 맞는 조명 속의 그를 참 좋아한다. 아름다워서도, 고독해서도, 안타까워서도.
<그날들>. 다프네를 잃은 아폴론이 자신의 신성을 내던지고 빠져든 절망이 이럴까. 그의 시간이 온통 어둡고, 그의 공간이 온통 덧없다. 그가 가진 것은 기억 한 자락인데, 홀로 남은 그가 지나치게 아름다워 더 큰 비극이 된다. 기둥채로 굳은 그리움. 박자를 밀고 당기는 노래 속에 고독감이 유영한다.
그는 화이를 통해 이연을 보면서도, 화이가 이연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벽을 세우는 말투는 그래서다. 이연을 보고자 하면서도, 이연을 발견하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태연히 개인 레슨에 임하는 그를, 그에 앞서 오디션으로 화이를 발탁하는 그를 보면서 궁금해졌다. 그는 정말로 어쩔 셈이었을까. 훈이, 화이가 그의 허구를 깨트리지 않았다면, 그는 이연을 다시 발견한 것만으로 만족할 작정이었을까? 아니면 화이에게서 보는 이연의 자취를 더듬더듬, 계속하여 사랑하고자 했을까? 그도 아니면 이연에게서 화이로, 자연스럽게 사랑을 옮겨 갈 수 있었을까.
생략된 것이 많아 짐작하기 어렵다. 훈의 일침으로 가까스로 되살려낸 이연의 죽음 앞에 절망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이연과 화이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 타는 그가 어떤 심정인지 어쩔 작정인지.. 극이 보여주는 대로만 본다면 화이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화이가 그를 향해 어떤 마음을 키워가든 간에, 그의 입장에서는 이연을 되살리고 이연을 놓아줄 수 있게 하는 건널목일 뿐이다.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펼칠 수 있을 설정을 두고도 모든 가지를 쳐내고 전개되는 극에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는 결국 극이 내릴 때까지 아쉬운 넘버로 남을 모양이다. 훈과 이연과의 삼중창이 듣기에 잘 어우러지고, 아프고, 나쁘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이때의 지욱이 무너지는 모습을 더 생생하게, 그에게만 집중하여 보고 싶은 욕심 탓에 매번 서운하다. 이연의 죽음을 깨닫고 좌절하는 지욱의 독백 속에 반드시 훈이 함께 해야 할까? <거리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지욱이 가장 처절하고 가장 아프며, 가장 고독해야 하는 순간이다. 20년의 허구가 허물어지는 순간의 고통을 훈은 모른다. 나누어 가질 수 없다.
<거리에서>. 술을 연이어 들이키는 그를 보면서는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도 어쨌든 겉으로는, 사회적으로는 나이를 먹었다. 화이와 충돌한 후 바스라졌던 울음 끝에 그가 도피처로 선택한 것이 술이다. 아픔과 쓰라림을 술로 다스려보고자 하는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다스려지나. 혼탁해진 눈동자로 그가 주춤주춤 일어선다. 질질 끌리는 걸음걸이. 처진 어깨, 무거운 고개. 술기운에서도 그녀를 꼭 붙들고 있었던 <그날들>과는 달리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거리에서>다.
<12월>. 하얀 연기와 검은 연기로 어우러지는 영상이 나오고, 합창하는 사람들 앞으로 지욱과 이연이 재회한다.
그를 바라보던 이연이 천천히 모자를 벗어 가슴에 품는다. 다시 돌아온 그녀. 첫 만남의 옥상으로 되돌아간 두 사람이 마침내 포옹한다. 그녀에게 닿지 못한 그 노래가, 하늘에 닿아 그녀를 불러왔을까. 힘겹지만 분명하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 또 봐..
이연에게 그러하였듯,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말. 또 봐. 놓지 못해 살아온 지난 20년 동안에도, 비로소 놓아주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된 순간에서도 이연은 그의 삶이다.
2. 감독님ㅎㅎ Turn It Up 하고 그렇게 부동자세로 있기 없기? 자연히 박수가 막 터져 나왔는데, 그걸 듣곤 그가 한 손으로 에이~ 아서아서~ 하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다. 아아, 정말이지 시아준수, 그렇게 귀여우면서 멋있음이 동시에 되는 사람이란 걸 뽐내지 않아도 되는데 ㅎㅎ 뽐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