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십자가를 찌르는 순간이었다. 높은 단상 위를 기어이 헤집고 선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노여움으로, 증오로, 그렇게까지 거침없고 맹렬한 그는 처음이었다. 어떤 평정의 시도도 없었다. 맹수? 아니 그렇게 단편적으로 이름할 수 없다. 원한다면 어떤 형태의 격정으로든 체현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였다. 그리고 실로 그랬다. 적개심으로 덩어리진 생명이 성가를 향해 돌진했다. 분노, 분노 끝에 분노를 더한 분노. 그의 손끝의 칼심이 그가 섬겼던 신의 심장으로 박혀 들었을 때, 근래 경험한 어떤 카타르시스보다 강렬한 쾌감이 심장을 휘감았다.

격정을 따라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을 천천히, 두 눈에 담았다. 담고자 노력했다. 본능적으로 그가 선사하는 쾌감을 바짝 좇고 있었다.

그의 신성모독은 경건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붉은 머리카락보다도 짙은 검붉은 피. 대조되는 순백의 프릴 블라우스. 그가 발하는 존재감에 비해 턱없이 가는 한 줌의 허리. 기막히도록 곧게 뻗은, 그러나 슬픔과 분노에 잠겨 간신히 버티고 선 다리. 빗발치는 증오를 따라 곤두선 머리칼. 격정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나의 격정을 충동질했다. 그의 손끝에 닿은 것도, 그의 머리칼도, 그의 눈가도 전부 빨갛게 빛났다. 사방이 거센 불길. 폐부 깊숙이 홧홧한 것이 들어찼다. 신경을 모조리 곤두세운 나머지 자칫하면 그로부터 탈선해버릴 것 같았다. 그가 선사하는 환영에 눈이 멀어 정작 그를 놓쳐버릴 정도로 위태롭고 긴박했다.

숨 쉬는 것조차 아까웠다. 그는 신을 저주했지만, 나는 그를 버린 신께 감사했다. 그의 몸부림이 황홀했다. 저주의 밑바닥으로 떨어져도 그는 아름다웠다. 자신을 옭아맨 절망을 향해 패악으로 맞서는 그는, 그는... 파괴적으로 아름다웠다.


브램 스토커 원작의 드라큘라 백작은 아름답지 않았다. 소설에는 백작의 등장조차 드물었다. 그는 타인의 말과 두려움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히 괴물일 수밖에 없다. 수식을 더하자면 흉측한 괴물. '뱀파이어'하면 으레 연상하는 치명적인 매력은 전무했다.

뮤지컬에서는, '그'에게서는 내가 보고자 했던 것과 그 이상을 모두 보았다. 그는 어둠, 그는 아름다움, 그는 파괴자.
그리고, 그는 순정.

옛사랑을 노래하는 그는 처연하여 아름다웠다. 격정에 휩싸인 그는 파괴적으로 아름다웠다. 새 삶을 갈망하는 그는 완고하면서도 처창한 아름다움이었다.


오늘 그는 세 가지 장면에서 충실하게 아름다웠다.

첫째 옛사랑의 노래(She)와 미나를 향한 사랑의 고백(Loving You Keeps Me Alive). 둘째 반 헬싱 무리의 처단(It’s Over). 마지막 프레시 블러드(Fresh Blood). 각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앞으로도 상술할 기회가 많을 것 같으니 오늘은 ‘첫 느낌’ 위주로 적는다.


옛사랑의 노래, She. 구연동화 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의 울림은 <호랑이와 비둘기>를 닮았다. 나긋나긋, 상냥하게 타이르는 음성이 듣는 이를 부드럽게 유혹한다. 이것이 시작.

소름의 연속이었다. 녹녹하여 아름다운 가성에서부터, 그녀를 위해 신 앞에 무릎 꿇고 애걸하는 절절한 목소리(정말정말 섹시함!). 끝끝내 사랑을 잃은 자의 참혹한 절규와 절망의 소리까지. 곡 하나에 몇 개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지! 이 안에 몇 명의 시아준수가 존재하는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연기는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의 머리칼마저도 그를 따라 연기했다. 죽은 그녀를 품에 안고 몰아치는 격정을 따라 곤두선 머리칼이 이를 증명한다. 꼿꼿하게 솟은 붉은 머리카락. 온몸으로 표현하는 분노였다.


Loving You Keeps Me Alive 는 가장 슬펐다. 그는 내도록 울었고, 400년의 절절함은 내 마음도 울렸다. She에서부터 Loving You Keeps Me Alive 로의 연결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리란 생각은 미처 못했기에 당했다.

나풀거리는 프릴 블라우스의 소매가 바닥을 쓸도록, 그의 애처로운 고백이 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를 향해 애원을 거듭했다. 나를 봐요, 내게 돌아와요. 눈물로 호소하는 붉고 창백한 얼굴은 저돌적인 동시에 순수했다.

“당신은 이미 결혼했어.”

정적과 함께 슬픔의 절정이 찾아왔다. 그도 울고, 나도 울고. 그러나 끝내 목도하는 그녀의 결혼식 앞에 무릎 꿇은 그의 어깨가 바스러질 듯 흔들렸다. 비틀리는 걸음걸이로 휘청휘청 움직여 뒷걸음쳤다.

동시에 치러지는 루시의 결혼식. 부케를 건네받게 된 그가 돌연 슬픔을 떨쳐내고 웃었다. 파괴자의 기질이 샘솟는 얼굴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물스러운 동시에 은밀한 온오프. 그 이중성이 좋아 몸서리쳤다.


It’s Over. 이렇게까지 원초적으로 사납고, 맹렬한 그를 본 적이 있었나. 미나와의 순간을 방해받은 그의 노여움은 크다. ‘사납고 맹렬하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던’ 그가 분노의 날을 세운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섹시하다. 아름답게 섹시하다. 목소리도, 몸매도, 차가운 눈빛도 모조리 섹시하며, 거침이 없다. 거침없는 그는 매력적이다. 파격적으로 매력적이다!!!

이 넘버에서의 걸음걸이와 골반의 움직임은 죽음일 때의 그와 흡사했다. 날렵하며 위협적인 움직임. 그러나 관념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죽음과는 확연하게 다른, ‘인간의 형체를 입은’ 움직임이었다. 인간의 감정-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그의 걸음마다 얼룩졌다. 과연, 드라큘라로서 그의 뿌리는 ‘인간’이므로.


Fresh Blood.

이건 도대체 어떻게 풀어서 적어야 하나. 백 문장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단연코 낫다. 흉측한 허물을 벗어내고 젊음을 되찾은 그를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이므로!

그의 변신은 엄청난 쾌감을 선사한다. 그의 삶은 오로지 미나를 향해 있으나, 그의 유혹은 모두를 그의 포로로 삼는다. 그가 망토의 모자를 걷어내고 새빨간 머리카락과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을 때, 그렇게 되었다.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칼을 무심하면서도 박력 있게 쓸어내릴 때, 그렇게 되었다...


나는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심지어는 공감각적으로 전달되는 한 흡혈귀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원작 소설은 하지 못한 일이다. '뮤지컬 드라큘라'가 어떠한 개선의 여지를 품고 있느냐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극은, '그'의 극은 이미 나를 사로잡았다. 전술한 장면 중 그 어느 하나만 존재하였다 해도 나는 미혹되었을 것이다. 손을 한 번 튕겨내는 것만으로 손쉽게 반 헬싱 무리와 대적하던 것과 같이, 그는 너 하나쯤이야 하는 듯이 너무나도 가든히 나를 무릎 꿇렸다.

그는 극을 지배했다. 모습을 감춘 뒤에도 그의 목소리가, 그의 환영이 사위를 틀어쥐고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지루함을 깨트리는 각성제였고, 극의 이음새를 다듬는 교정장치였다. 프리뷰인가 본공연인가의 구분은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는 최선을 다해 배우 김준수였다. 그러함으로써 그는 극 자체가 되었다.

황홀했다.

 


 


그밖에 한 줄 감상.

1. 드라큘라 백작 한줄 요약 = ‘사납고 맹렬하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
2. 의상은 모두 바람직하다. 무대를 런웨이로 만드는 그.
가장 좋은 것은 2막 후반부의, 커튼콜 의상이기도 한 붉은 깃옷. 다만 깃이 높아 옆모습이 되면 얼굴을 다 가린다는 단점이 있다.
3. 농담으로라도 기차를 모두 탈선시켜 버린 드라큘라 백작. 여자를 웃기는 방법을 모르는 드라큘라 백작.
4. 안개로, 연기로 나타나는 그는 또 얼마나 자릿했는지. 기억해요,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소리로만 듣는 그가 얼마나 그 순간 어둠의 지배자다웠는지!
5. 자신의 팔을 직접 그어 피를 보이는 그..는 그 피가 물감임이 훤히 보이는 것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으로 섹시하다.
6. 조나단의 면도칼을 혀로 핥던 그…
7. 그리고 이 이야기는 꼭 해야 하는데, 드라큘라 성에서 조나단 하커와 처음 만났을 때, 그때 그의 첫 대사들. 고풍스러운 울림이 가득한 대사 처리. 끝을 늘어뜨리는 고상하고 여유로운 말투. 신비롭고 비밀스럽던 그 목소리.
8. 마지막으로 손동작. 관에 누워 가슴 위로 두 손을 교차할 때의 우아한 손동작. 멋있는 데다 설레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늘 귀여웠던 것

1. 죽음 직전에 관으로 되돌아갈 때, 단이 높았나? 한 번에 관 안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삐끗했다. 으앙 귀여움.
2. 동상의 먼지 씌우개 하나가 그의 망토와 얽혀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 뒤를 졸졸졸 따라갔었다. 꼬리 같아 귀여웠는데, 혹시나 넘어질까 염려도 되었어.
3. 기차를 모두 탈선시켜버렸다는 대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귀엽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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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4.07.17

정작 입가에 맴도는 멜로디는 '사↗랑↘해↗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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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4.07.17

샤큘은 느림보도 부지런해지게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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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4.07.17

잘라놓고 보니 시아준수 노래 짱 많다. 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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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5.03

문득 기억나는 이야기:

콘서트에서 드라큘라를 설명하며 그는 '십자가를 찌르고, 찔린 곳에서부터 흐르는 피를 받아마셨다'고 했다. 공연에서는 표현상 생략되었지만 그런 스토리가 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