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 첫날의 공연만을 보고 쓴 후기이기 때문에 기억이 왜곡한 부분이나 캐릭터나 극에 대한 감상이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오로지 첫 느낌만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 둡니다.
첫 등장은 백년 후의 죽음
<프롤로그>
루케니의 소개말과 함께 등장하는 죽음은 초월적인 존재답게 리프트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허공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바닥까지 닿는 긴 코트를 발끝으로 헤치며, 단 한 걸음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은발의 죽음이다. 그 아래, 지상에서 엘리자벳의 이름을 부르던 앙상블은 죽음을 상징하는 음악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림자로 가려진다. 푸르스름한 조명이 죽음만을 비추면, 죽음은 얼핏 권태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다가와 선다. 멈춰선 죽음의 앞으로 고풍스러운 황금빛 액자가 거미줄 쳐진 채로 버려져 있다. 그 앞에서 죽음은 희미해진 옛 기억을 꺼내보듯, 오랜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듯 몽롱하게 잠긴 눈으로 사람들이 부르던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에 반응한다. 백년이 지나도록 차갑고 냉정한 죽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이름. ‘환희 혹은 고통, 사랑.’
고고한 등장이었다. 걸음으로 시를 쓰듯, 우아한 동작. 처음부터 토드였다. 엘리자벳의 초상을 허공에서 쓸어내릴 때 떨리던 은발의 뒤통수, 그림 속 엘리자벳의 얼굴을 따라 섬세하게 곡선을 그리는 손 끝에서 반짝이던 검은 매니큐어. 왼쪽 소매에만 달려 흐늘거리는 천 자락까지 무엇 하나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정도로 그 자신이 초월적인 죽음이 되어있었는가 하면, 서늘하고도 따분해 보이는 얼굴에 시아준수의 기색이 없었다. 낯선 토드만이 있었다.
그 낯선 얼굴이 사랑을 했었다며 노래를 하니 빨려들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긴 잠에 들고도 남을 백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엘리자벳과의 기억을 더듬는데, 차갑고 냉정한 자신을 버려가면서 사랑을 했었다고 하는데, 그 감정의 깊이가 아팠다. 달리 죽음이 아니었다. 매력적이었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시작부터 너무나 치명적이었으므로..
이후의 전반부는 엘리자벳의 성장과정에 할애된다.
공주보다는 서커스 단원이 되겠다는 엘리자벳의 어린 시절에 두 사람의 첫만남이 자리한다. 공중 줄타기를 하다 떨어진 엘리자벳과 그녀를 죽음에서 구한 죽음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신사처럼 근사한 죽음이 기절한 엘리자벳을 품에 안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프롤로그에서와 달리 은빛이 감도는 회색 자켓을 입고, 가슴이 얼핏 보이는 풀어헤쳐진 검은 셔츠에 가죽 소재의 검은 스키니를 입고 검은 부츠를 신은, 바야흐로 어둠의 왕자님의 등장이다. 이윽고 그녀가 죽음의 품에서 눈을 떠 두 사람이 한눈에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때, 화자 루케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케니의 설명이 없이도 알 수 있다. 엘리자벳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은 죽음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떠나지를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던 손이 공기를 타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으로 다가간다. 엘리자벳 역시 홀린 듯이 죽음에게로 손을 뻗는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손이 미처 죽음의 코끝에 닿기 전에, 죽음은 어루어 만질 듯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가져갔던 손을 거둔다. 그리고는 유유히 멀어져 간다. 엘리자벳이 그를 왕자님이라 부르며, 남아달라 붙잡을 때도 대답 없이 돌아볼 뿐 죽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엘리자벳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죽음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꾹꾹 눌러담은 절제함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모순되게도 어린 엘리자벳을 보는 시선에는 탐미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차가운 열정이라는 말로 그때 그 순간의 눈빛을 표현한다면 적합한 것이 될까. 당장에라도 원하지만 때를 기다리는 물러섬. 차갑고 냉정한, 죽음의 사랑 앞에서의 여유. 물러서는 걸음걸이가 우아한 맹수를 연상케 했다. 잡아먹을 때까지 잘 커주렴, 단 한 마디 대사도 없었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음은 본디 죽음.
죽음의 의무는 모든 것에 마지막을 선사하는 것. 그런 죽음의 본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무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죽음은 죽을 자를 무릎 꿇려두고 그의 발치 아래 인간 세상을 관망한다. 자비를 청하는 목소리에 아랑곳 없이 대공비 조피가 처결을 정하는 순간, 산자는 사자가 되어 죽음의 품 속으로 흡수된다. 은회색 자켓이 죽음의 평상복인 느낌이라면, 이 순간 걸친 프롤로그에서와 같은 길다란 코트는 죽음의 정복 같은 느낌이다. 두 팔을 수평으로 펼쳐 그 코트의 소매를 망토처럼 길게 늘어뜨렸다가, 죽을 자의 머리를 끌어 안으며 소름끼치게 웃는다. 사람을 삼키기 직전 부르르르 떨어대며 긴장을 고조시켰던 양팔에서도, 극적인 표정의 변화에서도 광기가 가득하다. 죽음의 웃음소리와 죽어가는 자의 비명소리가 한데 섞여 광기만이 가득하다.
한편 부쩍 자란 엘리자벳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한눈에 사랑에 빠진 그녀는 행복한 신혼을 꿈꾸며 빈에 입성한다. 그러나 신 앞에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프란츠 요제프를 법적인 남편으로 받아들일 것’을 맹세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죽음이 결혼의 성립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나타난다. 죽음은 종과 연결된 밧줄에 매달려, 종치기를 자청하며 종을 울린다. 종이 댕, 울릴 때 죽음의 웃음소리도 함께 퍼진다. 죽음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잠기고 죽음만이 존재하는 시간에서 소리가 퍼진다. 댕, 댕, 댕, 댕. 공중을 휘저으며, 높은 곳에서 밧줄에만 의지한 우아한 곡예가 이어진다. 아름답고도, 차갑고도, 슬픈 초월자는 온몸으로 엘리자벳의 배신을 표현한다.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으며, 온몸으로 위태로운 동작들을 우아하게 펼쳐 보이며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조롱한다. 상처받은 왕자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까지도 비웃어버리는 냉혹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급기야는 오랜만에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첫만남과 같이 은회색 자켓을 입은 왕자님의 등장이다.
<마지막 춤>
엘리자벳의 결혼식 피로연에 죽음의 천사들을 거느린 죽음의 등장으로 무대는 어둠에 잠긴다. 엘리자벳과 죽음만이 빛을 받는다. 무대에 사선으로 걸쳐진 리프트에서 사뿐사뿐 내려오며 공간을 탐망하던 죽음의 시선은 즐거운 한 때를 만끽하는 엘리자벳을 발견하고부터는 그녀에게서 떠날 줄을 모른다. 리프트 난간에 무게중심을 실은 채로, 죽음의 손이 엘리자벳을 향해 가만히 내밀어 진다. 엘리자벳 역시 그를 발견하고 홀린 듯 다가온다. 독사과에 마음을 빼앗긴 백설공주나 물레를 발견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본능적인 끌림이다. 그런 그녀를 삐뚜름한 고개로 내려다보는 죽음의 얼굴에 살며시 입꼬리만 올린 뇌쇄적인 미소가 지어진다. 엘리자벳이 자신의 손을 마주 잡기를 기다리며 그녀에게 건네는 차갑지만 아름다운 미소다. 마치 슬로우컷을 보는 것처럼 느짓느짓한 이 모든 동작들로 인해 죽음 주변의 공기만 다른 세계의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사람의 생과 사뿐 아니라 시간마저도 관장하는 초월적인 느낌. 죽음이 무대 위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시아준수가 그런 죽음을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죽음의 미소는 주춤하는 엘리자벳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진다. 언제나 여운을 남기는 여유로운 동작만을 보여주었던 죽음에게서 유일하게 즉각적으로 나온 반응이다. 손을 거두며, 미소가 사라진 고개가 작은 원 모양으로 가볍게 까닥인다. 어이가 없어 화를 다스리는 몸짓이다. 이윽고 그만의 공간에서 내려와 마침내 밟은 지상의 무대에서, 죽음은 서슴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탁! 탁! 탁! 탁! 한쪽 발만을 굴러 박력 있게 스텝을 밟는다. 그를 따르는 죽음의 천사들도 죽음을 닮은 사뿐한 몸짓으로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죽음의 지시에 따라 대형을 유연하게 자유자재로 바꾸어가며, 죽음과 엘리자벳을 감싸는 동작이 엘리자벳을 사로잡고도 남을 죽음의 화를 표현해낸다. 비로소 죽음의 무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너무나 잘 알고, 너무나 기대려온 무대였다. 잘 아는 만큼이나 낯선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뻔한 말이지만 죽음을 연기하는 시아준수가 아니라, 단지 죽음이었다. 단 한 번도 시아준수인 적이 없었다.
이를 앙 문 턱에서, 한껏 낮춘 목소리에서, 지그러진 눈매에서 억눌린 화가 배어 나온다. 그러나 아름다운 초월자가 살짝만 치켜든 턱으로 고갯짓을 할 때는 화를 내는 상황이 무색할 만큼 섹시하고 근사하다. 발을 구르는 박력과 심장에 달라붙을 것 같은 음습한 목소리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다. 손짓 한 번으로 죽음의 천사들을 부려 엘리자벳을 희롱할 때나, 엘리자벳에게 직접 거친 입맞춤을 시도할 때에도 죽음은 너무나 근사하다. 때로는 바싹 엎드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때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먹잇감을 날카롭게 잡아채는 매처럼 감각적으로 엘리자벳을 몰아간다. 엘리자벳이 두려움에 떨며 저항할수록 물살을 타는 이 모든 저돌적인 공세가 더없이 우아하기에 도저히 사람 같지가 않다. 손짓 하나, 걸음 하나에 마치 무게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사뿐사뿐. 화를 실어 격한 춤을 출 때도 나풀나풀. 죽음이 단 한 걸음만을 옮겨도 매혹되고, 분노마저도 그를 닮아 관능적이니 거부할 도리가 없다. 거침없이 화를 내면서도 감각적인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 무섭다. 분노 속에서도 초월한 자의 여유를 발현하는 것이 능수능란하다. 그 강약의 조절! 그 카리스마! 혼자만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파괴적인 존재감이 아닌가!!!
더군다나 분노한 나머지 잠에서 막 깨어난 이 아름다운 사자는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거세게 몰아쳤다가도 ‘마지막 춤은 나와 추게 될 것’임을 못 박고 해코지 없이 물러난다. 차갑고 냉정하지만 엘리자벳에게만은 자비롭고 낭만적이다. 아아, 멋있다. 멋있다. 엘리자벳을 사랑하기에 그녀의 배신에 분노했지만, 죽음은 사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사를 관장하는 죽음은 초월적인 존재. 모든 것은 결국 그런 죽음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었으니까, 조급함은 그의 몫이 아니다. 엘리자벳이 당장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상관 없다. 죽음이 그녀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
이 여유로운 지배자가 진심으로 멋있었다. 사랑하는 여인마저 조롱하는 차가움이 소름끼쳤다. 웃을 때조차도 얼굴의 반쪽만 써서 비웃음을 머금는 것으로 대신하는 차가움. 모든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이 가는 대로 연주하는 여유로운 관능미. 한 마디의 대사 없이 오직 노래로만, 오직 춤으로만. 그것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런 시아준수라니!
이어 죽음이 의도한 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 황후의 불행이 시작된다.
‘황실의 풍족함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 죽음이 화가 났기 때문에. 황후가 된 엘리자벳을 바라볼 때면 죽음의 기분이 몹시 상했으므로.’ 화자는 이렇게 운을 떼며 엘리자벳에게 연이어 닥쳐드는 불행을 빠르게 보여준다. 그 불행 속에서 죽음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엘리자벳의 인생 곳곳에 개입하는 배후의 숨결이 기다리던 때를 만나면, 엘리자벳의 아이가 죽음을 맞이한다. 슬픔 속에 관을 떠나보내는 엘리자벳을 무대 왼쪽 꼭대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죽음이 내려다본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짙은 회색의 새로운 의상을 보면 죽음의 옷맵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위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죽음은 마치 달의 사자처럼 우아하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서 있다. 턱 끝을 살짝 올린 채, 두 눈은 한없이 내린 채로 죽음이 지켜보는 것은 엘리자벳이다. 자신이 계획한 어두운 슬픔 속에 엘리자벳을 밀어넣고 나서, 죽음은 주문을 걸듯 그녀에게 노래한다. 부드럽고 나긋하게, 아직까지는 점잖은 신사처럼 그녀를 유혹한다. 엘리자벳이 진실로는 죽음밖에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인정할 것을 죽음은 요구한다. 부드럽지만 강하고 꼿꼿하게. 죽음에게 유흥은 있어도 허언은 없다. 죽음은 말 대신 노래와 눈빛으로 그 모든 것을 전한다.
죽음은 멈추지 않는다.
엘리자벳을 위한 죽음의 무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죽음의 천사들이 죽음의 명령에 따라 곳곳을 누비며 포석을 깐다. 무대가 바뀌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끌벅적한 카페는 일을 도모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종업원으로 차려입고 있는 것은 사실은 동향을 살피는 죽음의 천사들이다. 화자인 루케니도 그 안에 섞여들어 엘리자벳의 불행으로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부추긴다. 그들은 신문을 보며 제각각 엘리자벳의 개인적인 불행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진다. 어딜가나 화제에 오르는 그녀의 불행. 카페 안이 한 번 크게 들썩이고 종업원과 손님들이 혼잡하게 얽혀 잔뜩 혼란스러워 질 때,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남자가 소리없이 등장한다. 어두운 색 바바리 코트를 입은 그는 오른쪽 맨 뒤에 앉아 내내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한다. 마지막에 모든 말소리가 사그라들고 사방이 정적에 빠지면, 일어서서 얼굴을 드러내는 죽음이 바로 그다. 각이 잡힌 손동작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신문을 걷어내며, 죽음은 루케니에게 시선을 둔다.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이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화자인 루케니지만, 이야기를 다스리는 것은 죽음임을 와닿게 하는 순간이다. 그때 죽음이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자신만만한 얼굴에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치밀하고 집요하게 죽음은 엘리자벳을 조여간다.
아아, 죽음.
이어지는 장면에서 엘리자벳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프란츠 요제프에게 최후통첩을 날린다. 남편도, 아이들도 빼앗긴 새장 안의 삶을 견딜 수 없어진 그녀의 마지막 수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벳의 차가움에 낙심하며 사라지고, 홀로 남은 엘리자벳은 외로움에 몸을 떤다. 바로 그때, 죽음이 그녀의 앞에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두 눈을 의심할 만큼 치명적인 모습으로.
엘리자벳만이 무대에 남았을 때, 엘리자벳의 등 뒤에 있던 병풍이 움직이며 (병풍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침대가 그녀 쪽으로 돌아선다. 서서히 앞면을 드러내는 그 침대 위에 죽음이 누워있다. 왕자님의 은회색 자켓은 벗어두고, 실크 소재의 검은 셔츠만을 입은 죽음의 열린 가슴에 시선이 간다. 존재만으로 깊은 어둠, 그러나 다가서고 싶은 유혹적인 어둠. 죽음은 한껏 느즈러진 자세로 한쪽 팔을 엘리자벳 몫의 베개에 얹은 채다. 이곳의 너의 자리다, 하는 듯이. 요염하고도 교만하며 탐욕이 가득한데도 기품이 있는, 자신만만한 유혹의 시선을 그녀에게 둔 채로, ‘엘리자벳’. 새빨간 침대 위에서 짙은 어둠의 죽음이 그녀를 부른다. 그 퇴폐적인 시선만으로도 빨려들 것 같은데 엘리자벳에 음을 싣는 나른한 목소리가 또 한 번 심장을 때린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섹시하다. 엘리자벳의 침대에서 누워 엘리자벳을 자신의 품으로 유혹하는 죽음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그 순간 죽음은 왕자님에서 마왕으로 분한다. 타락한 천사를 거느리는 어둠의 마왕. 노골적인 관능미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담아낸다. 그 누가 죽음을 거부할 수 있을까.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엘리자벳을 향해 입꼬리만 미소짓던 죽음이 살풋 몸을 일으켜 엘리자벳에게로 상체를 내민다. 대범하게 꼬고 있던 다리가 일순간에 풀리며 날렵하게 무릎을 꿇는다. 날렵하지만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몸놀림에서 다시 한 번 죽음의 초월성을 느낀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다.
매초마다 보는 이를 충격에 빠트리는 이 씬에서 새삼 죽음의 몸매에 혀를 내두른다. 얼굴은 엘리자벳을 향해있지만 몸은 정면을 향해있는 탓에, 가슴과 어깨, 허리, 상체를 버티고 선 무릎, 그리고 탄탄한 허벅지 중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른다. 가죽 소재의 검은 스키니를 입고 마른 허리에는 복대를 단단히 차고 있는데, 매끈하게 탄탄해 안기고 싶은 품이다.
바로 그 품으로 죽음이 엘리자벳을 부른다. 위로해주겠다며, 자유를 주겠다며. 달콤하게 속삭인다. (침대 위로?ㅠㅠ) 우아하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부드럽게 재촉한다. 엘리자벳, 엘리자벳. 이름으로 주문을 걸듯,
느리고,
나른하고,
치명적으로 달콤하게.
마침내 널 사랑한다며 쐐기를 박는 순간 엘리자벳이 그를 뿌리친다. 천사의 날개처럼 보드라운 표정을 짓고 있던 죽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는 엘리자벳을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 위로 어둠이 내린다.
죽음은 포기하지 않는다.
<밀크>
이제 죽음은 엘리자벳의 개인적인 불행을 조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엘리자벳과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우유가 없어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우유는 어디에 있는가? 배 곪는 군중은 진실을 원하고 루케니를 통해 조심스럽게 일의 경위가 드러난다. 경악스러운 진실 앞에서 군중은 혼란과 분노로 뒤엉키고, 아비규환 속에 막이 내린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진실이 밝혀질 때 루케니의 주위를 맴돌던 것은 죽음의 천사들이다. 진실은 한 가지, 모든 것이 죽음의 뜻대로라는 것뿐이다.
<나는 나만의 것 반복>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벳의 최후의 통첩을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엘리자벳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 나의 주인은 오직 그녀뿐이라는 대사가 애절해 프란츠 요제프가 안타까웠다. 두 사람이 화해 아닌 화해를 하는 순간, 거울 속에서 죽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년 후와 같은 긴 코트를 걸치고 어스름한 거울 속에서 죽음과 프란츠 요제프가 엘리자벳과 함께 그녀가 얻어낸 자유를 노래하는 것을 끝으로 막이 내린다.
<프롤로그>
루케니의 소개말과 함께 등장하는 죽음은 초월적인 존재답게 리프트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허공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바닥까지 닿는 긴 코트를 발끝으로 헤치며, 단 한 걸음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은발의 죽음이다. 그 아래, 지상에서 엘리자벳의 이름을 부르던 앙상블은 죽음을 상징하는 음악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림자로 가려진다. 푸르스름한 조명이 죽음만을 비추면, 죽음은 얼핏 권태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다가와 선다. 멈춰선 죽음의 앞으로 고풍스러운 황금빛 액자가 거미줄 쳐진 채로 버려져 있다. 그 앞에서 죽음은 희미해진 옛 기억을 꺼내보듯, 오랜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듯 몽롱하게 잠긴 눈으로 사람들이 부르던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에 반응한다. 백년이 지나도록 차갑고 냉정한 죽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이름. ‘환희 혹은 고통, 사랑.’
고고한 등장이었다. 걸음으로 시를 쓰듯, 우아한 동작. 처음부터 토드였다. 엘리자벳의 초상을 허공에서 쓸어내릴 때 떨리던 은발의 뒤통수, 그림 속 엘리자벳의 얼굴을 따라 섬세하게 곡선을 그리는 손 끝에서 반짝이던 검은 매니큐어. 왼쪽 소매에만 달려 흐늘거리는 천 자락까지 무엇 하나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정도로 그 자신이 초월적인 죽음이 되어있었는가 하면, 서늘하고도 따분해 보이는 얼굴에 시아준수의 기색이 없었다. 낯선 토드만이 있었다.
그 낯선 얼굴이 사랑을 했었다며 노래를 하니 빨려들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긴 잠에 들고도 남을 백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엘리자벳과의 기억을 더듬는데, 차갑고 냉정한 자신을 버려가면서 사랑을 했었다고 하는데, 그 감정의 깊이가 아팠다. 달리 죽음이 아니었다. 매력적이었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시작부터 너무나 치명적이었으므로..
이후의 전반부는 엘리자벳의 성장과정에 할애된다.
공주보다는 서커스 단원이 되겠다는 엘리자벳의 어린 시절에 두 사람의 첫만남이 자리한다. 공중 줄타기를 하다 떨어진 엘리자벳과 그녀를 죽음에서 구한 죽음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신사처럼 근사한 죽음이 기절한 엘리자벳을 품에 안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프롤로그에서와 달리 은빛이 감도는 회색 자켓을 입고, 가슴이 얼핏 보이는 풀어헤쳐진 검은 셔츠에 가죽 소재의 검은 스키니를 입고 검은 부츠를 신은, 바야흐로 어둠의 왕자님의 등장이다. 이윽고 그녀가 죽음의 품에서 눈을 떠 두 사람이 한눈에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때, 화자 루케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케니의 설명이 없이도 알 수 있다. 엘리자벳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은 죽음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떠나지를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던 손이 공기를 타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으로 다가간다. 엘리자벳 역시 홀린 듯이 죽음에게로 손을 뻗는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손이 미처 죽음의 코끝에 닿기 전에, 죽음은 어루어 만질 듯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가져갔던 손을 거둔다. 그리고는 유유히 멀어져 간다. 엘리자벳이 그를 왕자님이라 부르며, 남아달라 붙잡을 때도 대답 없이 돌아볼 뿐 죽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엘리자벳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죽음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꾹꾹 눌러담은 절제함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모순되게도 어린 엘리자벳을 보는 시선에는 탐미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차가운 열정이라는 말로 그때 그 순간의 눈빛을 표현한다면 적합한 것이 될까. 당장에라도 원하지만 때를 기다리는 물러섬. 차갑고 냉정한, 죽음의 사랑 앞에서의 여유. 물러서는 걸음걸이가 우아한 맹수를 연상케 했다. 잡아먹을 때까지 잘 커주렴, 단 한 마디 대사도 없었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음은 본디 죽음.
죽음의 의무는 모든 것에 마지막을 선사하는 것. 그런 죽음의 본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무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죽음은 죽을 자를 무릎 꿇려두고 그의 발치 아래 인간 세상을 관망한다. 자비를 청하는 목소리에 아랑곳 없이 대공비 조피가 처결을 정하는 순간, 산자는 사자가 되어 죽음의 품 속으로 흡수된다. 은회색 자켓이 죽음의 평상복인 느낌이라면, 이 순간 걸친 프롤로그에서와 같은 길다란 코트는 죽음의 정복 같은 느낌이다. 두 팔을 수평으로 펼쳐 그 코트의 소매를 망토처럼 길게 늘어뜨렸다가, 죽을 자의 머리를 끌어 안으며 소름끼치게 웃는다. 사람을 삼키기 직전 부르르르 떨어대며 긴장을 고조시켰던 양팔에서도, 극적인 표정의 변화에서도 광기가 가득하다. 죽음의 웃음소리와 죽어가는 자의 비명소리가 한데 섞여 광기만이 가득하다.
한편 부쩍 자란 엘리자벳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한눈에 사랑에 빠진 그녀는 행복한 신혼을 꿈꾸며 빈에 입성한다. 그러나 신 앞에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프란츠 요제프를 법적인 남편으로 받아들일 것’을 맹세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죽음이 결혼의 성립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나타난다. 죽음은 종과 연결된 밧줄에 매달려, 종치기를 자청하며 종을 울린다. 종이 댕, 울릴 때 죽음의 웃음소리도 함께 퍼진다. 죽음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잠기고 죽음만이 존재하는 시간에서 소리가 퍼진다. 댕, 댕, 댕, 댕. 공중을 휘저으며, 높은 곳에서 밧줄에만 의지한 우아한 곡예가 이어진다. 아름답고도, 차갑고도, 슬픈 초월자는 온몸으로 엘리자벳의 배신을 표현한다.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으며, 온몸으로 위태로운 동작들을 우아하게 펼쳐 보이며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조롱한다. 상처받은 왕자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까지도 비웃어버리는 냉혹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급기야는 오랜만에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첫만남과 같이 은회색 자켓을 입은 왕자님의 등장이다.
<마지막 춤>
엘리자벳의 결혼식 피로연에 죽음의 천사들을 거느린 죽음의 등장으로 무대는 어둠에 잠긴다. 엘리자벳과 죽음만이 빛을 받는다. 무대에 사선으로 걸쳐진 리프트에서 사뿐사뿐 내려오며 공간을 탐망하던 죽음의 시선은 즐거운 한 때를 만끽하는 엘리자벳을 발견하고부터는 그녀에게서 떠날 줄을 모른다. 리프트 난간에 무게중심을 실은 채로, 죽음의 손이 엘리자벳을 향해 가만히 내밀어 진다. 엘리자벳 역시 그를 발견하고 홀린 듯 다가온다. 독사과에 마음을 빼앗긴 백설공주나 물레를 발견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본능적인 끌림이다. 그런 그녀를 삐뚜름한 고개로 내려다보는 죽음의 얼굴에 살며시 입꼬리만 올린 뇌쇄적인 미소가 지어진다. 엘리자벳이 자신의 손을 마주 잡기를 기다리며 그녀에게 건네는 차갑지만 아름다운 미소다. 마치 슬로우컷을 보는 것처럼 느짓느짓한 이 모든 동작들로 인해 죽음 주변의 공기만 다른 세계의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사람의 생과 사뿐 아니라 시간마저도 관장하는 초월적인 느낌. 죽음이 무대 위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시아준수가 그런 죽음을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죽음의 미소는 주춤하는 엘리자벳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진다. 언제나 여운을 남기는 여유로운 동작만을 보여주었던 죽음에게서 유일하게 즉각적으로 나온 반응이다. 손을 거두며, 미소가 사라진 고개가 작은 원 모양으로 가볍게 까닥인다. 어이가 없어 화를 다스리는 몸짓이다. 이윽고 그만의 공간에서 내려와 마침내 밟은 지상의 무대에서, 죽음은 서슴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탁! 탁! 탁! 탁! 한쪽 발만을 굴러 박력 있게 스텝을 밟는다. 그를 따르는 죽음의 천사들도 죽음을 닮은 사뿐한 몸짓으로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죽음의 지시에 따라 대형을 유연하게 자유자재로 바꾸어가며, 죽음과 엘리자벳을 감싸는 동작이 엘리자벳을 사로잡고도 남을 죽음의 화를 표현해낸다. 비로소 죽음의 무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너무나 잘 알고, 너무나 기대려온 무대였다. 잘 아는 만큼이나 낯선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뻔한 말이지만 죽음을 연기하는 시아준수가 아니라, 단지 죽음이었다. 단 한 번도 시아준수인 적이 없었다.
이를 앙 문 턱에서, 한껏 낮춘 목소리에서, 지그러진 눈매에서 억눌린 화가 배어 나온다. 그러나 아름다운 초월자가 살짝만 치켜든 턱으로 고갯짓을 할 때는 화를 내는 상황이 무색할 만큼 섹시하고 근사하다. 발을 구르는 박력과 심장에 달라붙을 것 같은 음습한 목소리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다. 손짓 한 번으로 죽음의 천사들을 부려 엘리자벳을 희롱할 때나, 엘리자벳에게 직접 거친 입맞춤을 시도할 때에도 죽음은 너무나 근사하다. 때로는 바싹 엎드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때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먹잇감을 날카롭게 잡아채는 매처럼 감각적으로 엘리자벳을 몰아간다. 엘리자벳이 두려움에 떨며 저항할수록 물살을 타는 이 모든 저돌적인 공세가 더없이 우아하기에 도저히 사람 같지가 않다. 손짓 하나, 걸음 하나에 마치 무게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사뿐사뿐. 화를 실어 격한 춤을 출 때도 나풀나풀. 죽음이 단 한 걸음만을 옮겨도 매혹되고, 분노마저도 그를 닮아 관능적이니 거부할 도리가 없다. 거침없이 화를 내면서도 감각적인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 무섭다. 분노 속에서도 초월한 자의 여유를 발현하는 것이 능수능란하다. 그 강약의 조절! 그 카리스마! 혼자만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파괴적인 존재감이 아닌가!!!
더군다나 분노한 나머지 잠에서 막 깨어난 이 아름다운 사자는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거세게 몰아쳤다가도 ‘마지막 춤은 나와 추게 될 것’임을 못 박고 해코지 없이 물러난다. 차갑고 냉정하지만 엘리자벳에게만은 자비롭고 낭만적이다. 아아, 멋있다. 멋있다. 엘리자벳을 사랑하기에 그녀의 배신에 분노했지만, 죽음은 사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사를 관장하는 죽음은 초월적인 존재. 모든 것은 결국 그런 죽음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었으니까, 조급함은 그의 몫이 아니다. 엘리자벳이 당장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상관 없다. 죽음이 그녀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
이 여유로운 지배자가 진심으로 멋있었다. 사랑하는 여인마저 조롱하는 차가움이 소름끼쳤다. 웃을 때조차도 얼굴의 반쪽만 써서 비웃음을 머금는 것으로 대신하는 차가움. 모든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이 가는 대로 연주하는 여유로운 관능미. 한 마디의 대사 없이 오직 노래로만, 오직 춤으로만. 그것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런 시아준수라니!
이어 죽음이 의도한 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 황후의 불행이 시작된다.
‘황실의 풍족함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 죽음이 화가 났기 때문에. 황후가 된 엘리자벳을 바라볼 때면 죽음의 기분이 몹시 상했으므로.’ 화자는 이렇게 운을 떼며 엘리자벳에게 연이어 닥쳐드는 불행을 빠르게 보여준다. 그 불행 속에서 죽음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엘리자벳의 인생 곳곳에 개입하는 배후의 숨결이 기다리던 때를 만나면, 엘리자벳의 아이가 죽음을 맞이한다. 슬픔 속에 관을 떠나보내는 엘리자벳을 무대 왼쪽 꼭대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죽음이 내려다본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짙은 회색의 새로운 의상을 보면 죽음의 옷맵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위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죽음은 마치 달의 사자처럼 우아하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서 있다. 턱 끝을 살짝 올린 채, 두 눈은 한없이 내린 채로 죽음이 지켜보는 것은 엘리자벳이다. 자신이 계획한 어두운 슬픔 속에 엘리자벳을 밀어넣고 나서, 죽음은 주문을 걸듯 그녀에게 노래한다. 부드럽고 나긋하게, 아직까지는 점잖은 신사처럼 그녀를 유혹한다. 엘리자벳이 진실로는 죽음밖에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인정할 것을 죽음은 요구한다. 부드럽지만 강하고 꼿꼿하게. 죽음에게 유흥은 있어도 허언은 없다. 죽음은 말 대신 노래와 눈빛으로 그 모든 것을 전한다.
죽음은 멈추지 않는다.
엘리자벳을 위한 죽음의 무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죽음의 천사들이 죽음의 명령에 따라 곳곳을 누비며 포석을 깐다. 무대가 바뀌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끌벅적한 카페는 일을 도모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종업원으로 차려입고 있는 것은 사실은 동향을 살피는 죽음의 천사들이다. 화자인 루케니도 그 안에 섞여들어 엘리자벳의 불행으로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부추긴다. 그들은 신문을 보며 제각각 엘리자벳의 개인적인 불행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진다. 어딜가나 화제에 오르는 그녀의 불행. 카페 안이 한 번 크게 들썩이고 종업원과 손님들이 혼잡하게 얽혀 잔뜩 혼란스러워 질 때,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남자가 소리없이 등장한다. 어두운 색 바바리 코트를 입은 그는 오른쪽 맨 뒤에 앉아 내내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한다. 마지막에 모든 말소리가 사그라들고 사방이 정적에 빠지면, 일어서서 얼굴을 드러내는 죽음이 바로 그다. 각이 잡힌 손동작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신문을 걷어내며, 죽음은 루케니에게 시선을 둔다.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이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화자인 루케니지만, 이야기를 다스리는 것은 죽음임을 와닿게 하는 순간이다. 그때 죽음이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자신만만한 얼굴에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치밀하고 집요하게 죽음은 엘리자벳을 조여간다.
아아, 죽음.
이어지는 장면에서 엘리자벳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프란츠 요제프에게 최후통첩을 날린다. 남편도, 아이들도 빼앗긴 새장 안의 삶을 견딜 수 없어진 그녀의 마지막 수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벳의 차가움에 낙심하며 사라지고, 홀로 남은 엘리자벳은 외로움에 몸을 떤다. 바로 그때, 죽음이 그녀의 앞에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두 눈을 의심할 만큼 치명적인 모습으로.
엘리자벳만이 무대에 남았을 때, 엘리자벳의 등 뒤에 있던 병풍이 움직이며 (병풍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침대가 그녀 쪽으로 돌아선다. 서서히 앞면을 드러내는 그 침대 위에 죽음이 누워있다. 왕자님의 은회색 자켓은 벗어두고, 실크 소재의 검은 셔츠만을 입은 죽음의 열린 가슴에 시선이 간다. 존재만으로 깊은 어둠, 그러나 다가서고 싶은 유혹적인 어둠. 죽음은 한껏 느즈러진 자세로 한쪽 팔을 엘리자벳 몫의 베개에 얹은 채다. 이곳의 너의 자리다, 하는 듯이. 요염하고도 교만하며 탐욕이 가득한데도 기품이 있는, 자신만만한 유혹의 시선을 그녀에게 둔 채로, ‘엘리자벳’. 새빨간 침대 위에서 짙은 어둠의 죽음이 그녀를 부른다. 그 퇴폐적인 시선만으로도 빨려들 것 같은데 엘리자벳에 음을 싣는 나른한 목소리가 또 한 번 심장을 때린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섹시하다. 엘리자벳의 침대에서 누워 엘리자벳을 자신의 품으로 유혹하는 죽음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그 순간 죽음은 왕자님에서 마왕으로 분한다. 타락한 천사를 거느리는 어둠의 마왕. 노골적인 관능미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담아낸다. 그 누가 죽음을 거부할 수 있을까.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엘리자벳을 향해 입꼬리만 미소짓던 죽음이 살풋 몸을 일으켜 엘리자벳에게로 상체를 내민다. 대범하게 꼬고 있던 다리가 일순간에 풀리며 날렵하게 무릎을 꿇는다. 날렵하지만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몸놀림에서 다시 한 번 죽음의 초월성을 느낀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다.
매초마다 보는 이를 충격에 빠트리는 이 씬에서 새삼 죽음의 몸매에 혀를 내두른다. 얼굴은 엘리자벳을 향해있지만 몸은 정면을 향해있는 탓에, 가슴과 어깨, 허리, 상체를 버티고 선 무릎, 그리고 탄탄한 허벅지 중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른다. 가죽 소재의 검은 스키니를 입고 마른 허리에는 복대를 단단히 차고 있는데, 매끈하게 탄탄해 안기고 싶은 품이다.
바로 그 품으로 죽음이 엘리자벳을 부른다. 위로해주겠다며, 자유를 주겠다며. 달콤하게 속삭인다. (침대 위로?ㅠㅠ) 우아하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부드럽게 재촉한다. 엘리자벳, 엘리자벳. 이름으로 주문을 걸듯,
느리고,
나른하고,
치명적으로 달콤하게.
마침내 널 사랑한다며 쐐기를 박는 순간 엘리자벳이 그를 뿌리친다. 천사의 날개처럼 보드라운 표정을 짓고 있던 죽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는 엘리자벳을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 위로 어둠이 내린다.
죽음은 포기하지 않는다.
<밀크>
이제 죽음은 엘리자벳의 개인적인 불행을 조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엘리자벳과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우유가 없어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우유는 어디에 있는가? 배 곪는 군중은 진실을 원하고 루케니를 통해 조심스럽게 일의 경위가 드러난다. 경악스러운 진실 앞에서 군중은 혼란과 분노로 뒤엉키고, 아비규환 속에 막이 내린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진실이 밝혀질 때 루케니의 주위를 맴돌던 것은 죽음의 천사들이다. 진실은 한 가지, 모든 것이 죽음의 뜻대로라는 것뿐이다.
<나는 나만의 것 반복>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벳의 최후의 통첩을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엘리자벳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 나의 주인은 오직 그녀뿐이라는 대사가 애절해 프란츠 요제프가 안타까웠다. 두 사람이 화해 아닌 화해를 하는 순간, 거울 속에서 죽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년 후와 같은 긴 코트를 걸치고 어스름한 거울 속에서 죽음과 프란츠 요제프가 엘리자벳과 함께 그녀가 얻어낸 자유를 노래하는 것을 끝으로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