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공 때 이미 목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프롤로그에서부터 기색을 느꼈는데 마지막 춤을 부를 때 그간의 목소리 중 가장 허스키한 소리가 나왔다. "미소를 지으며"에서 음이 먹히면서 마지막 단어(며)가 짧게 끊기자 이어지는 가사를 톡톡 끊어서 정확하게 소리를 냈다. 환상에서 깨.어.날. 거야 이렇게. 그 짧은 순간에 본능적으로 음을 정확히 짚어가며 노래를 유지한 것이다. 역시 시아준수의 순발력이란. 밤공에서도 마찬가지로 깨.어.날 거야를 약한 스타카토로 끊어 불렀는데, 임시방편이었겠지만 그렇게 끊어서 부르는 것도 노래에 잘 어울려서 종종 스타카토를 가미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낮공의 마지막 춤에서 순발력이 돋보였다면 밤공에서는 가장 신이 난 토드를 보았다. 특히 노래 끝에 리프트 위로 올라가 "나와 함께~"를 부를 때. 마치 머리로 떨림음을 넣는 것처럼, 께에에에~에서 고개를 (시소 방향으로) 빠르게 서너 번 들썩거렸다. 찰나의 동작이었지만 그것으로 그 순간 시아준수가 노래에 몰입한 정도가 확 와 닿았다. 그의 빙의된 순간을 날 것에 가깝도록 생생하게 직접 전해받은 그런 느낌. 그래서인지 예전에 공기를 습하고 탁해에서 얼굴 앞으로 손가락을 촤르륵 펼쳐 보였을 때 생각도 나고 좋았다.

 

또 은회색 자켓 아래로 시아준수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골반에 시선이 자꾸 가는데, 그 라인이 드러날 때의 볼륨감이란. 후후. 어둠 속 밀회~에서부터 폭발하기 시작할 때 목에 우수수 돋아나는 힘줄도 언제나 소름을 돋게 한다. 그나저나 낮공은 오랜만에 3층이었는데 내려다봐서 그런건지 얼굴이 더 핼쑥하고 홀쭉해 보였다. 뺨에 명암이 질 때면 깜짝 놀라서 원.

 

낮공과 밤공 모두 레어가 있었는데, 특히 낮공의 1막 그림자는 길어지고. 그리고 전염병에서 기쁘게 기다리마!! 외치고 나서 습기가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처럼 엘리자벳의 등 뒤에서 백허그하며 그녀의 깍지 낀 손을 꼬옥 움켜잡았던 것과 목걸이가 너무 낮게 던져진 탓에 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보기만 했던 것. 반대로 밤공에서는 오랜만에 왼손으로 척 잡아냈던 것까지. 그러나 밤공의 기억은 전염병에서 옥주현 엘리자벳의 동작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거의 리셋되다시피해서.. 목걸이를 잡고 오늘은 잡았어! 하면서 부리를 앙 다물어 모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아아, 밤공에서 엄마 어디있어요를 부르는 어린 루돌프 앞에 나타날 때 침대에서 약간 휘청거렸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퇴장할 때 유난히 껄렁거렸던 어깨도. 25일의 어린 루돌프는 오랜만에 준서였는데, 못 본 사이에 연기가 놀랄 만큼 늘었다. 낮공의 1막에서 제발요! 하고 외칠 때도 강약을 살린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2막에서 그 섬세한 강약의 조절에 감탄했다. 역시 마법의 JS.

 

자잘한 레어가 많았지만 연기면에서도 노래에서도 레어에서도 25일의 군계일학은 역시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리프트가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절정으로 치달을 때, 죽음이 내지르는 "그것이 운~명~"에서 목소리가 끊어졌다. 처음 있는 일. 파편이 되어 흐트러진 음성을 인지하는 순간 놀랐으나, 더 놀라운 장면이 이어졌다. 소리가 갈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ㅡ본능적일 정도로 같은 순간에ㅡ그가 허리를 뒤로 잔뜩 젖히고, 두 팔을 더욱 활짝 펴면서 끊어져가는 쇳소리를 이어갔다. 기어코 음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은, 잔뜩 젖혀진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는 바로 폭풍 연기를! 이탈하는 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원래의 궤도를 지켜낸 것이다. 전율이 일었다.


밤공에서는 목소리가 무리없이 매끄럽게 울려퍼졌고, 오랜만에 지르기가 나왔다. 15일 공연에서 세상을 구원해!!! 하면서 버럭했던 것에서 변형되어 세상을!!!! 구원해~가 되었다.

 

엔딩에서 보여주는 눈빛은 점점 아리송해진다. 이전에는 슬픔과 공허, 안타까움과 마침내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면 이제는 약간이지만 물음표도 섞여있다. 그제서야 사랑을 깨달은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순진해보이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낼 것도 같다. 그래서 밤공의 엔딩에서는 시아준수의 표정에 집중해버려서 키스신이 이어지리란 것도 잊고 있었는데 옥주현 엘리자벳이 거의 달려들다시피 입을 맞춰서 진짜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파도처럼 덮쳐들었다가 또 확 떨어져서 키스신 자체는 짧았지만 헉 정말 깜짝 놀랐어. 옥주현 엘리자벳이 너무 적극적이었던 탓에 토드가 입맞춤으로 죽음을 준다기보다는 엘리자벳이 죽기 위해 토드에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총평을 하자면 전반적으로 25일은 목 상태에 따라 새롭거나 시아준수의 순발력에 따라 덧붙여진 부분이 있어서 희귀한 공연이었다. 희귀함으로만 보자면 낮공이 단연 레어였고, 밤공은 낮공의 레어를 만든 원인인 목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복 없는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평상시만큼, 어쩌면 평상시보다 훌륭한 공연이었다. 무엇보다 밤공을 위해 낮공에서 적당히 한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던 것과, 낮공에서 기력을 소진한 느낌이 전혀 없었던 밤공에서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종일반을 뛰면 어떤 때는 낮공과 밤공이 전혀 다른 날의 공연처럼 색다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마치 1부, 2부처럼 이어지는 느낌을 줄 때가 있는데 25일은 그날의 공연을 관통했던 하나의 공통된 요소인 목 상태로 말미암아 후자였다. 12일, 첫날의 샤토드가 그랬듯이 단지 시간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연이은 공연에서 시아준수가 뮤지컬 배우이자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또 한 번 껍질을 깨고 나오는지를 지켜볼 수 있어 마음이 충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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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3.25

내가 써놓고도 다시 보는 후기가 많지는 않은데 매해의 3월 25일이 돌아오면 이 글의 기억은 들춰보곤 한다. 오늘도 자연히 생각이 났다. 곧 십 년이 되어가는 기억인데도 생생한 건 그래서인가. 문자를 따라가지 않아도 그릴 수 있다. 소리를 끌어내기 위해 반동을 주던 상체와 응집한 힘을 따라 되돌아왔던 소리. 절정의 순간에서 위험천만하게 아름다웠던 순발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