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 여운이 짙다.
1막은 완벽했다. 가득히 뭉친 공기. 전 캐스트가 조화로웠다. 배우들이 대사할 때의 마이크 음량이 다소 작게 들렸던 것 외에는 나무랄 것이 없었다. 오케스트라가 제 역할을 다했다면 2막 역시 그랬을 것이다. 옥에 티로 치부하기에는 넘버 이곳저곳에서 지나치게 자주 파열음이 튀었다. 심지어는 시아준수의 솔로에서도. 오 이건 곤란해.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공연이었다. 공연을 무사히 ‘완수’한 것 이외에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남긴 날이기도 했다.
1. Solitary Man
‘이 땅에서, 이제, 떠나갈 시간’ 하면서 촛불을 끄는 동작. 멋있다. 구붓한 등으로 진짜 할아버지처럼 무기력하게, 그러면서도 절도 있게 한 팔씩 벌리는 모습에서 야릇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런던으로 향하는 그의 기대감이 전해져서인가.
그리고 노신사님 진짜 예스러우시고, 우아하시고, 그 나이에도 엄청 정정하시고 멋있다. 노래를 마무리하면서 손 깍지 끼는 동작은 예스러운 멋짐의 절정ddd 관 안에 누워 두 손을 포개는 동작과 함께 고풍스러움의 쌍두마차다. 시아준수는 참 그런 동작도 어울려.
2. Fresh Blood
오늘도 모자를 쓰고 등장! 등장할 때는 역시 모자를 쓰는 편이 좋다. 모자 계속 써주세요. 모자를 벗은 타이밍은 어제와 같았다. 먹이를 던져준 후 조나단의 침대로 다가가며 잘생긴 늙은 얼굴을 짜잔.
그런데 오늘 목소리가 유독 다르게 들렸다. 평소보다 가느랗고, 높고, 서슬 퍼런 목소리. 그래서인가? 어느 때보다 변신 후의 목소리가 파워풀해진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목소리에서도 젊음을 연기하는 시아준수! 크아앙!!!
3. Lucy & Dracula 1
루시로 목을 축이기 전에 기대감에 찬 얼굴은 사악해서 매력적이다. 미나를 보곤 앗, 이런 모습을 들키다니 하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건 귀엽고. 동공이 잔뜩 커진 채로 홱 뒤돌아서서 아차! 싶은 얼굴로 으르렁하는데 으으. 그녀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서둘러 변명하는 모습은 순정순정해.
미나에게 그가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른 이들은 구걸을 하고 애원을 하는데!’ 하기 전에 대사 두어 마디를 평소보다 더했다. 느낌상 대사 자체가 추가된 건 아닌 것 같고, 살짝 엉켰는데 자연스럽게 풀어서 한 듯했다. 순발력의 시아준수 ㅎㅎ
4. 삼연곡
수훈감. 단연 오늘의 수훈감. 정말 최고였다. 세 곡이 전부. 모조리 싹 다!
프리뷰 때부터 훌륭했지만 오늘 She의 드라마는 압도적이었다. 사랑스러울 때는 물론 신에게 애원할 때나, 흑화할 때나 숨막히는 흡입력. 게다가 오늘은 비명소리마저도 유달리 아이같고 처절하여서..
무엇보다 오늘 시아준수가 공주와의 사랑을 노래할 때 얼마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냈는지. 얼마나 사랑스럽고 곱고 평화롭고 세상의 모든 선량함이 깃든 목소리였는지. 목소리에서부터 그들의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져 와 내 감정이 다 복받쳤다. 목소리만으로, 또 공주를 보는 그의 따뜻한 표정으로 그들의 사랑이 모두 이해되었다. 그래, 그렇게 사랑했었군요. 그렇게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을 했었군요.
그런데 그 사랑이 끝났어. 끝날 리 없던 그 사랑을 지켜주지 않았어. 그의 신이.
분노는 당연하다. 나라도 분노하겠어.
얼마나 신이 원망스러웠느냐면, 그가 작은 십자가를 내던질 때 쾌감마저 느꼈다. 그런데 또 하필 작은 십자가를 내던지고 단상 위에 촛대를 걷어치우는 모습이 오늘따라 얼마나 박력 있었는지;; 왼팔로 왼쪽 촛대들을 챙, 오른팔로 남은 촛대들을 챠르륵. 듣기 좋은 경쾌한 파열음!
At Last는 노래도 노래지만 앞뒤 대사의 절절함이 사무칠 정도로 좋다.
‘절대로’
‘당신과 함께’
‘당신은 이미 결혼했어요!’
오늘의 존댓말은 여태까지의 존댓말 중 가장 처량하고 절절했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을 향하여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가 버림받은 기분이었어. 그 어느 때보다 미나가 밉고, 그가 가여웠다.
그리고 러빙유.
도입부였다. 나조차도 신기할 정도로 감정이 마구 차올라서 망원경도 내려놓고 그저 보았다. 그의 노래. 그의 애원, 그의 슬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댄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한 첫 ‘사랑’>에서 그가 ‘사랑’을 발음하면서 미세하게 울음 했던 것. 그의 얼굴에서 땀과 눈물이 섞여 흐르고, 턱 끝에 매달린 투명한 땀방울이 달랑거리다가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낙하하던 것. 붉은 머리칼이, 특히 앞머리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흐드러지며 땀으로 말갛게 번진 얼굴을 가렸던 것도.
루시에게 닥칠 일들에 대하여 그녀는 그를 탓할 수 없다. 그녀가 다 자초한 거야. 그의 삶의 이유, 허무의 빛, 숨결이라는 데, 그 애원을 모두 뿌리치고 눈앞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준 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렇게나 공들여서, 모든 진실을 다 설명해주었는데도 그를 박차고 떠나버렸던 그녀다.. 그녀는 그를 탓할 자격이 없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로부터 터덜터덜 뒷걸음질하던 그가 딱 멈추어서더니, 허리를 살짝 뒤로 젖힌 상태에서 얼마간의 짜증이 배인 손길로 머리를 콱 움켜쥐고 쓸어넘겼다. 항상 앙상블에 가려서 반밖에 보지 못하거나 거의 보이지 않았거나 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다 보여서 심장에 무리가… 아 그때의 섹시함이란…
부케는 오늘도 놓쳤다. 하지만 허리 숙여 주워드는 모습도 우아해서, 상관없다.
(+) 탈선 대사할 때 어느 날은 '기차역 북쪽에서 오는 기차들을’ 이라 할 때도 있고 ‘이쪽으로 오는 기차들’이라고 할 때도 있는데 오늘은 전자였다.
(+) ‘더 늙고, 더 외롭고, 더 못돼졌죠.’ 이 대사는 항상 찡한데 오늘은 유독 와 닿았다. 뭔가 막..
(+) 오늘은 붉은 땀보다 투명한 땀이 더 많았다. 피눈물 같았던 붉은 땀도 좋고, 또 예뻤는데. 맑은 땀이 되면 정말 반짝반짝 얼굴에 보석이 박힌 것 같아서 ㅎㅎ
5. Lucy & Dracula 2
오늘도 가운 밖으로 루시를 받쳐 들었당.
6. Life After Life
루시가 그에게 안겨들 때, 그의 차갑지만 얼러주는 눈빛에는 내가 다 설렌다. 미나를 대할 때와는 다른 ‘내 것’을 대하는 그 눈빛.
그리고 묘지 문을 향해 걸으면서 몸을 한 번 뒤로 콱 젖히며 그 동작으로만 머리를 넘기는 데 헉. 멋있어서 놀랬다. 시아준수를 보면 멋있는 방법도 참 여럿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하.
7. 대사 처리가 가장 많이 바뀌었던, 미나와의 대화
‘내가 바로 그런 존재예요!’ 는 덤덤하게 말해서 오히려 더 슬픈 대사였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감정을 실어 말했다. 약간 울컥하는 듯이 '내가! 바로 그런 존재예요.’ 하고.
또 내 영혼을 봤잖아요 대신 내 눈을 봤잖아요~ 라고 말했고. 특히!! ‘원하지 않는다면 나타나지 않을게요.’ 말하기 전에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는데, 진짜 이 순정남을 어쩌면 좋나요ㅜ
8. The Master’s Song (Reprise)
‘멍청한 놈’ 하기 전에 한 손으로 렌필드의 볼을 어루어 만져주며 조롱했다. 헐. 렌필드.. 주인님께 어루어만짐을 당하다니 성공한 종일세..
9. Mina’s Seduction
그가 등장할 때 부르는 노래에는 약을 탄 것 같다. 이 기묘하기까지 한 부드럽고 달콤한 쇳소리는 대체불가다. 분명 부드럽고 나긋한데 갈퀴가 있다. 잡혀 들면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벼르는 무언의 악력이 깃들어 있다. 반 헬싱의 말대로 은밀하게 유혹한다. 시아준수 목소리 정말 보물이에요. 목소리도 보물이고 시아준수가 그의 목소리를 쓰는 방식까지 남김없이 싹 다 보물로 지정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야. 이 넘버에서의 그의 목소리 변화도 She 못지 않게 다채롭다. 여러모로 드라큘라에서는 그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미나를 따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갈 때, 침실 커튼을 손으로 탁 쳐내던 그의 조용한 박력. 으으. 또 입맞춤하려다 미나가 몸을 뒤로 뺄 때 더는 강요하지 않는 모습이 나는 왜 항상 설레지. 미나에게는 그 무엇도 함부로 하지 않는 그의 순정이, 평소 그가 보여주는 파괴적인 멋있음과 대비되어 더욱 그런 걸까. 볼수록 ‘사납고 맹렬하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상냥한’ 그.
10. It’s Over
침대에 폭 뉘였던 몸을 날렵하게 일으킬 때 그는 정말 멋있다. 속사포처럼 가사를 내뱉는 목소리의 쨍쨍함도 너무 좋아. 귀를 짜릿하게 한다.
반 헬싱과의 또렷한 음색 차이도 이 넘버의 매력.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존재. 섞여들지 못하는 목소리. 날카롭게 대치하며 서로를 쳐내는 듀엣이라니, 너무나 그럴듯하잖아.
커튼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땐 또 한 번 위기를 겪을 뻔했지만 다행히 커튼과의 실랑이가 길지는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커튼이 언제고 또 속을 썩일 것 같은 예감ㅎㅎ
뛰쳐나갈 때는 소리 지르는 대신 신음처럼 거칠게 크르릉 하는 소리 정도만 냈다.
11. Train Sequence
관 속이 많이 더운가? 싶을 정도로 오늘따라 이 장면에서 구슬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삼연곡보다도 여기서 가장 많이 흘렀던 같아. 근데 또 이 땀에 뒤덮인 얼굴이 너무 예뻐서… 보석이 막 반짝반짝 묻은 듯하여 얼굴만 보았네. 안 그래도 여기서 곱게 눈 감은 얼굴이 그림 같은데 그 얼굴에 보석까지.. 후..
12. The Longer I Live
오케스트라.. 잘해주세요 ㅡ"ㅡ
A블록은 다 좋은데 그가 관 안에서 손을 포개고 마지막 소절을 부를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오히려 죽는 장면에서는 얼굴이 가려질 틈이 없이 관 뚜껑이 덮여서 괜찮은데 여기선ㅜ 그가 눈을 감고 있는지, 어떻게 아픈 표정을 짓는지, 눈물은 혹시 흘러내리는지. 궁금한 것이 많다.
13. At Last
고개 젓는 얼굴이 당장에라도 울 것 같기에 놀랐다가, 마음이 착잡해졌다. 왜 그렇게 착한 사랑을 하나요. 400년의 허무 끝에 드디어 다시 만난 사랑인데, 왜 그렇게 그녀를 위한 사랑을 해요.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되잖아.
그를 향해 ‘당신을 원한다’고 말하는 미나의 대사도 못내 불만스럽다. ‘원한다’는 미나의 유혹에서의 반쯤은 홀린 듯한 상태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대사다. 일차적이라서 와 닿기는 하지만, 사랑한다고 한 번쯤은 그를 향해 분명하게 말해주어도 좋을 텐데..
그런 그녀에게 그는 또 최선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지. 어둠을 떠나달라며, 이런 인생을 줄 수 없다는 절규.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그녀에게 어둠을 달라 청하는 그.
항상 나를 울리는 부분의 가사는 23일 밤공과 같았다.
<부탁해요 제발. ‘내게’ 밤을 허락해요.>
단검을 밀어 넣을 때, 정선아 미나와는 그가 훨씬 능동적이기에 더욱 아프다. 자진하여 칼을 꽂는 모습은 그의 말 그대로다. ‘사랑해서 그댈 위해 떠나는’ 그가 서러워.
그리고 오늘은 왜인지, 그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 앞에 쓰러져 우는 미나를 보고 조나단이 힘없이 고개를 돌리더라.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이상한 승리감 같은 것이; 솟아서 기분이 매우 기묘해졌다. 남겨진 사람들의 불행을 얼핏 본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예전과 같은 삶을 이어가지는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