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될 9월 4일의 후기.
늘 그래왔듯이, 첫공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내린 샤큘로서의 그.


1.

Solitary Man

마지막일 노백작님. Fresh Blood나 Loving You Keeps Me Alive는 어떻게든, 어떤 형태로든 다음이 있을 것 같지만 이 넘버에서의 백작님은 재연이 오지 않는 한 마지막일 것(또 모르겠다 연말콘서트 vol.4 정도 되면 볼 수 있을지도).


노백작일 때의 그가 소리와 몸짓, 아우라로써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400년.’

네 번의 백 년. 그에게서 웃음도, 색상도 앗아간 시간. 마르고 건조한 목소리에는 외따로 견뎌야 했던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성 안 가득한 엘리자벳사의 석상만이 지난 400년의 유일한 동행이었겠지.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위안이 되었을 리 없다.

더는 그녀와 마주 잡을 일 없어진 손이 폭삭 늙었다. 조각칼만을 벗 삼아 고통 속에 방치해두었나. 엉망으로 늙은 손. 깊은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과 구붓한 등도 세월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의 영혼도. 육신을 따라 함께 시들어버린 눈동자에는 목적하는 방향이 없다. 사람의 온기는 오간 데 없는 황폐한 눈빛이 수동적인 명멸을 반복한다.

이렇게 건조한 심신으로 엮은 노래는 마른 가지를 스칠 뿐인 바람 소리와 같다. 허무와 회한이 맺힌 음성의 고독함은, 평소 그의 목소리에서 훨씬 더 폭넓은 진동을 입힌 예스런 어투로도 숨기지 못한다.

죽지 못했을 뿐 더는 생명이 아닌 존재.

‘타오르는 갈증’에 대한 욕망을 표출해낼 때조차도 무엇엔가 짓눌려 있다. 살아숨쉬는 생명으로서의 혈기가 전무하다. 부러 억누른 것처럼 고요한 어둠.

이것이 400년을 외따로 견딘 그의 드라큘라.


* 늘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 ‘이 땅, 에서, 이제, 떠나갈 시간’하며 촛불을 꺼버릴 때의 그. 그 순간 탄력 있게 차르르 펼쳐지던 손가락의 움직임.


2.

Fresh Blood

평소와 달리 조나단의 셔츠가 어깨를 꽤 덮고 있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서자마자 어깨 아래로 셔츠를 확 젖혀주시던 백작님. 그 박력이 멋있었다.

흡혈 후 자켓 단추를 뜯으려고 손을 댔을 땐 단추가 전부 이미 뜯어져 있었다. 그래서 잠시 잠깐 헛손질. 쥘 것이 없어 허공에 뜬 손이 귀여웠다. 하얗고 매끄러운 손이 잠시 공중에 붕 떠있다가, 풀려버린 옷자락을 툭 치는 것으로 동작을 마무리했다. 찰나였지만 순간적으로 옷자락에 핀잔주는 듯했던 그 동작이 또 너무 귀여웠네.

망토를 벗고 난 뒤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르마 없이 내린 머리의 콘셉트 사진에 가까웠다. 찰랑찰랑, 예쁨예쁨. 생기가 넘쳐 흐르던 그.

그것이 시작이었다. 마지막일 변신.


되찾은 젊음. 한 남자의 생명을 심지 삼아 아름답고 잔인하게 타오르는 불꽃. 가장 만발하였던 시절로 회귀하는 그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파괴적이며
냉혹하고
잔인할 정도의
황홀한
아름다움.

불가사의할 정도의 환몽과도 같은 순간. 그는 악귀인 동시에 만인의 에로스로 분했다. 기피의 대상인 동시에 열망의 대상. 모두가 두려워하나 또 모두가 갈망하는 존재.

과감하게 흩날리는 핏빛 머리칼이 무대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누볐다. 너희의 갈망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매력적인 확신에 찬 얼굴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가 선 곳이 무대가 아니라 구름 위 같이 가마득했다.

한순간에 무대 안팎을 포로 삼은 그가 슬레이브들과 엉켜 들었다. 검고 깊은 눈에 생을 향한 욕망이 가득 반짝였다. 폭발 직전의 불꽃 같았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목소리가 귓가를 세차게 두드려 왔다.

되찾은 시간을 음미하던 그의 시선이 슬레이브들에게서 정면으로 옮겨졌다. 시간이 정지되었다 느낀 순간, 온통 붉디붉어 하나의 광폭한 화염과도 같은 그가 포효했다.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향하여 빗발치는 오랜 사랑에서부터 끌어올린 포효였다.

그것은 신호탄. 바야흐로 막공의 막이 올랐다.


매 순간이 다시 없을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지만, 프리뷰도, 세미막공도 압도했던 막공의 박수 소리에는 정말로 끝이란 것이 실감 나 울컥했다. 진짜 마지막이구나. 끝이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심장이 뻐근해졌다.

섭섭함과 아쉬움이 몰아쳤다. 노백작님도, 이 넘버도, 변신의 짜릿함도. 한꺼번에 세 가지의 마지막이 찾아왔고, 훌쩍 끝나버렸다. 마지막을 염두에 둔 그가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하고 거대하게 무대 위에 군림하였던 것만이 아쉬움을 물리치는 동인이 되어 주었다.


*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ㅡ언제나 넘버 전체가 하나로써 심장을 관통하곤 했지만ㅡ ‘다시 찾은 내 힘!’에서 검푸른 실선 조명을 받는 그와 옆걸음으로 무대를 횡단하며 포효할 때의 그. 옆걸음으로 포효하는 그는 내 안에 카타르시스와 연결된 모든 감각을 일깨워주려는 듯이 강렬하고 매섭고, 황홀했다. 늘.

(+) Forever Young에서 슬레이브 중 신세계 배우가 뒤돌아서.. 했당. 막공 기념 애드립이었나 보다.


3.

Lucy & Dracula 1.

간직해온 비장의 카드가 그녀에게 외면당하는 순간. 원하는 사람에게나 주라는 그녀의 분명한 거절은 그의 이성을 일시에 허물어뜨렸다. 그는 본능에게 흡혈을 허락한다. 사랑에 상처받은 자의 조악한 복수심으로.

그러나 이를 악물며 ‘좋아’하던, 두고 보라는 듯이 내뱉었던 음성과는 달리 얼굴은 버림받은 표정이었다. 울컥임이 차오르던, 아픈 얼굴. 그녀에게만은 결코 잔인해질 수 없는 그의 절대적인 사랑이 그 순간의 얼굴로부터 감지되었기에 마음이 아렸다.


4. 삼연곡

기차역.
‘농담입니다’ 하기 전에 오늘 왜 뜸을 들인 걸까. 애드립이 나오려나 잠깐 두근두근했다. 평소와 어투가 달랐던 것 자체가 이미 애드립이었지만 ㅎㅎ


She
파괴적인 아름다움의 그.

‘널 저주해!’의 표정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울음과 분노가 회오리치던 얼굴. 희번덕이는 눈빛과 날이 선 눈썹. 단검을 있는 힘껏 움켜쥔 작은 손. 용수철처럼 홱 돌려지며 제단을 향하는 그의 몸. 증오가 몸놀림의 원동력이 되어도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유려하다. 음악과 어우러지고, 춤추는 것 같아.

나부끼는 새하얀 옷자락을 보며 어쩔 수 없는 감회에 젖었다. 길고 긴 시간을 돌아와, 저주의 심연에서 몸서리치는 그도 어느덧 마지막이구나. 마지막 무대에 서 있는 그의 모습 위로 처음이 겹쳐졌다. 아득해졌다.


She, 이 뮤지컬에서의 나의 첫 사랑. 그의 드라마, 스토리텔링 전부를 함약한 거대한 넘버. 그는 뮤지컬이 완벽한 장르라 했지만, 뮤지컬이 완벽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장면을 꼽을 수 없다. 이 장대한 포르티시시모 안에 수만 가지의 감정과 표정이 새겨져 있고, 그 전부가 하나로 뭉쳐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압축된다. 이렇게 파괴적으로 아름다운 드라마는 본 적이 없어.

사랑의 나날들도, 전쟁의 시절도. 사랑을 잃은 그의 울부짖음도. 사랑을 노래하던 평화로운 얼굴이 한순간에 돌변하여 증오를 새기는 순간까지도. 그와 그의 목소리는 단 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름다움과 처절함이 공존하는 시청각적인 울림으로 늘 만개하여 내게로 쏟아졌다. 한결같게도.

아득한 감회로부터 정신을 끌어와, 온 힘을 다하여 그를 두 눈에 박았다. 이마를 덮는 붉은 머리칼과 볼에 맺혀 흐르는 피눈물과도 같은 물줄기가 그의 얼굴보다도 먼저 보였다.

차라리 이 고통의 삶 끝내주소서
늘, 사랑해 마지 않았던, 참 잘생긴 목소리. 사랑을 잃고 무너지는 그를 보며, 나는 사랑을 맹세했다.

(+) 시작할 때 오케스트라의 박자가 밀려서 그가 기다렸다가 이끌어갔다. 소중한 She에서.. 오케스트라도 끝까지 한결같았다.


At Last

소금물이었다. 그도 그녀도 나도.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의 눈물이 방울지는 소리가 울렸다.

오늘의 미나는 이미 그에게 완연히 기울어버린 탓에 그를 애써 떨쳐내는 일부터가 힘에 부치는 듯 보였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결국 그녀가 짧은 눈물의 입맞춤마저 외면하고 그에게 등을 보였을 때. 세상을 내려놓을 듯이 그녀에게로 던져진 그의 비명 같은 말.

‘당신은 이미 결혼했어..’

그의 슬픔으로 한없이 끌려 들어가다, 짜릿함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는 지극히 잘 알고 익숙해진 순간에서조차 내게서 소름을 일깨워내는 시아준수. 그의 감정과 몰입과 집중력에 황홀했다. 때문에 슬프면서도 기뻤어. 당신은 하염없이 슬픈데 나는 슬프면서도 황홀해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의 슬픔이 사무쳐 오는 이런 순간이 늘 너무도 좋은걸.


러빙유

내게는 곧 뮤지컬 드라큘라로 기억될 넘버. 그가 소절을 시작하는 순간 ‘마지막’이라는 글자가 소낙비처럼 연신 뇌리를 강타했다. 매 순간, 매 음절이 마지막이 될 소리. 이제 이 순간이 지나면 없을.

그리고 그가 정말로 그렇게 노래했다. 처음처럼, 다시는 없을 마지막처럼.

모든 진실을 그녀 앞에 가감 없이 꺼내어 놓았는데, 그의 사랑은 난도질 당했다. 이해할 듯하던 그녀는 그를 외면했다. 외면할 뿐 아니라 그로부터 뒷걸음질한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나고, 그가 손을 내밀면 두 걸음 멀어진다.

끝내는 더 다가서지도 못한 채 그녀와 가깝고도 먼 거리감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선 채로 멈추어 버린 걸음. 그 자리에 못 박힌 채로 그녀를 향한 눈물의 세레나데.

가슴을 쥐어뜯는 그는 꼭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간신히 버티고 선 무릎. '차가운 암흑 속에'에서와 같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견디고 서서, 분명할 정도로 그를 밀어내는 그녀에게 원망 한 톨 없이, 오직 사랑을 노래했다.

그 모습과 마지막이 주는 감회 때문이었을까. 그가 2절을 시작하는 순간, 내가 마치 400년 사랑을 잃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이 났다. 그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라 속상했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특히
그댄 내게 단 한 사람..

늘 그가 이 대목에서 터트려내는 순간에 약했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 노래하는 시아준수가 사무친 걸까, ‘마지막’이 주는 감회에 사무친 걸까. 둘 다였겠지. ‘단 한 <사>람’을 어제와 같이 강하게 올려 부르는 소리가 가슴에 칼심처럼 박혔다. 간신히 숨을 참았다. 나의 숨소리조차도 그 순간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싶지 않았다. 전부 그의 노래로 가득한 그 공간 안에 영원히 멈추어 두고 싶었다.

운명에 이끌린 듯 그녀가 그의 노래에 감응하던 순간도 찰나. 끝끝내 그를 지나쳐 조나단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마침내 그의 무릎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심장도 함께.

심장을 따라 무릎을 따라 수없이 방울지던 눈물. 곧이어 그의 코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미나와 ‘그녀를 보는 그’의 절망. 나락을 향하는 사랑. 아아.


5.

Life After Life

늘 한 손과 고개로 반원을 그리며 상큼하고 사느랗게 웃는데, 오늘은 다음 소절까지 웃음이 이어졌다. ‘장례식을 가장한 새 새 생명의 축제’하며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러빙유에서의 처창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 딴사람이 되어 나타난 그에게 울음의 흔적은 없다. 흡혈귀로서의 본능만이 기탄없이 쏟아진다. 영원한 삶을 향한 환락의 전주곡이 펼쳐졌다.

달콤한 ‘피’는 이제 이 순간의 그를 축약하는 단 하나의 소리가 되었다. 공연을 거듭하며 곳곳에 많은 디테일이 추가되고 또 다듬어졌지만 가장 큰 변화를 이룩한 넘버라면 역시 Life After Life. 그리고 그 변화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소리, 바로 달콤한 ‘피’.

‘피’의 진동은 인간의 소리 같지 않다. 이 소리는, 다 갈래로 이지러지며 공기 중으로 침투하는 이 소리는 문자 그대로 파멸의 전주곡처럼 들린다. 얼키설키 얽힌 검질긴 핏물과도 같은 음성. 파괴적이고 이질적인 소리. 소리가 목적하는 방향이 있다면 꼭 지그재그의 형태를 하고 있을 것만 같은 신묘한 음색. 숨김없고 거침없이, 마치 공간을 먹어치우듯이 폭발하는 흡혈귀로서의 본능을 표현하기에 꼭 알맞고 그 순간의 긴박함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데 더할 나위 없다.

‘피’의 진동이 처음 달라졌던 그날의 순간이 선명하다. ‘피’의 노선을 달리 잡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역시 뮤지컬 드라큘라 메이킹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그의 코멘터리도 담아, 그가 어떠한 기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선별하고 또 그것을 가꾸어 완성하였는지 보고 듣고 싶다. 넘버 별로, 회차 별로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


6.

Mina’s Seduction

그가 디디는 첫발의 우아함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항상 설렜던 부분인데 적을 기회가 없었어. 오늘에야말로 적는다. 등장하는 순간 커튼을 양옆으로 젖히며 딛는 첫발의 각도는 늘 같다. 느릿하게, 비스듬히 45도. 커튼을 젖히는 손가락의 우아함과 함께 확신에 찬 느긋함을 표현한다. 윗비에서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아우라가 가득하다. 홀려들 수밖에 없어.

언제나 목소리만큼이나 섹시했던 그의 걸음걸이. 그의 평소 걸음을 아니까, 늘 이 넘버에서의 걸음걸이가 눈에 콕 박혔다. 멋있단 말로밖엔 표현할 수가 없어.

특히 미나와 침실문으로 이동할 때와, 미나의 손을 잡고 침실 안으로 들어갈 때 느적느적하면서도 여유로운 그 걸음걸이!! 침실 문 쪽으로 향할 때는 동선이 늘 소파 뒤쪽으로 이어졌는데 오늘은 특별히? 소파 앞쪽으로 걸어서 그의 걸음걸이가 유독 잘 보이기도 했다. 좋았어..ㅎㅎ..

정선아 미나가 침실 문 앞에서 그의 멱살을 잡을 때는 항상 놀라지만, 그때 그가 미나의 동작에 맞추어 고개를 탁 치켜 올리는 건 정말 좋다. 멋있어.. 그리고 매우 극적이야. ‘바로 이 순간’이란 느낌. 또 두 사람이 운명적인 충동에 의해 서로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같기도 하다.

그리고 침대에서 미나가 단추를 뜯을 때, 침대 끝을 움켜쥐는 그의 작은 손을 나는 보았당 ㅎㅎ 결연한 느낌으로, 꽈악.


7.

It’s Over

내내 웃었다. 스며들기 무섭게 사라지는 짧은 웃음이었지만, 그것이 웃는 얼굴이라는 것을 인지할 정도는 되었다. 성경책을 날릴 때 이 악물면서도 이쯤이야 하는 것처럼 웃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창가로 물러나 ‘얕은 지식 따윈 우스워!’ 할 때에도 고개를 살짝 비틀며, 비웃듯이 손을 착! 피식, 내뱉는 웃음도 있었고 입가로 사르르 스며들었다가 녹아서 없어지는 부드러운 비소도 있었다. ‘하찮은 인간들’을 업신여기며 무대로 재등장할 때는 만면 가득 비웃음이었다.

여유로움을 가득 뽐내며 날랜 몸짓으로 무대를 누비는 그는 ‘군림하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모든 것이 숨 막힐 듯 쏜살같이 흘러갔지만 단 한 번. 자체적으로 정지화면 되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가 창가로 물러나 ‘얕은 지식 따윈 우스워!’ 하기 전 숨을 고를 때. 그 직전에 완전히 뒤돌아선 채로 허리를 숙였을 때 보였던 뒤태. 숨 고르는 것처럼 등을 수그린 채로 완전한 뒷모습을 보여주는데, 으앙. 처음이었다.

그리고, 유난히 발레하는 것 같았던 그의 다리. 특히 마지막에 무대를 횡단하며 한 명 한 명 날려보내고 반 헬싱과 겨룰 때. 몸놀림에 맞추어 땅을 짚고, 유연하게 휘어지던 그 다리! 어찌나 우아하고 유연하며 날랬는지.


8.

곡 내내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단 하나, 그녀만을 제외하고.

‘난 누구의 죽음도 원치 않아요!’

그와는 양립할 수 없는 그녀의 말. 그녀는 알았을까. 그녀의 그 말은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인간의 피를,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죽음을 딛고서만 살아갈 수 있는 그에게 그녀의 말은 사형선고와도 같다는 걸. 그와 피를 나눈 후에, 완전히 자기 사람이 되었다 믿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주는 그에게 줄 충격을 그녀는 다 헤아릴 수 있었을까.

몰랐겠지. 그도 그녀의 행동이 그를 상처 주기 위한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녀가 그를 막아서는 순간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그녀와 그가 결코 동질한 존재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그래서 그는 도망한다. 그녀로부터, 그녀 앞에서 무너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 막공 기념인가, 십자가에 불이 붙지 않았다. 프리뷰와 수미상관이네요.


9.

Train Sequence

꿈인가.
그가 약간 웃는다.

꿈이라도 좋다.
그녀의 목소리라면.

어두워도 좋다.
이 밤이 그녀의 꿈을 꾸게 해주니.

그러나 무엇일까. 이 생생한 소리.

이끌리듯 눈을 뜬 그가 그녀의 존재를 찾는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그녀. 그녀를 향해 소리내어 부름 한다. ‘이제라도 내게 와요.’ 손을 뻗는다. 상처받았어도, 그와는 양립할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라도 그녀는 그의 운명.

운명을 따라 내게 와.

포기는 애초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그렇기에 운명인 것.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사랑에 그는 어깃장을 놓듯, 최후의 악을 쓰듯 ‘영원한 삶’을 노래한다. 더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부르짖음. 안될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그럼에도 향할 수밖에 없는 그 길을.

그래서였는지.. The Longer I Live 에서보다도 이때에 더 짙은 회한을 느꼈다.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운명을 따라’ 그녀를 부르는 그의 본능적인 사랑이 서글펐다. 절대 놓을 수 없는, 그러나 끝내는 놓고야 마는 그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꿈결 속에서 웃는 모습과, 눈을 뜨면서 웃음이 사르르 말려드는 얼굴이 유난히 평온하고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여기서 시아준수 정말 아름다우니까..


10.

The Longer I Live

한의 노래.
이 노래는 그 방식의 ‘창’이다. 그녀라는 사랑과, 그녀라는 한으로 올올이 엮어 맺은 한의 소리야.

소절마다 그의 생명이 한 껍질씩 벗겨졌다. 음절을 타고 흐르는 회한으로 그는 삶을 정리했다. 생에의 욕망도, 영원에 대한 집착도, 그녀와의 행복마저도 전부.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차례차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들 전부가 허물이 되어 관 위로 포개어졌다. 마지막 순간 그가 향할 곳. 그에게 안식을 허락할 유일한 장소 위로.

안식의 관.

모든 허물을 벗고, 날 것과도 같은 쓰라린 영혼으로 관 앞에 섰을 때 그의 눈가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흘러내리지는 않았으나 소리 없이 반짝이던 그것이 그의 두 눈이 무겁게 닫힘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대 없다면 내 세상 멈추네
그대 없다면 내 세상 멈추네
그대 없다면 내 심장 멈추네



11.

At Last

‘정말로 나와 함께 가겠어요?’

손을 내미는 것을 대신한 물음. 십자가를 뜯어내며 ‘영혼을 팔아’ 그의 곁으로 다가서는 그녀를 보는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출렁였다. 기쁨일까, 슬픔일까. 그 모두일까.

끝까지 그녀의 마음은 보듬어주면서, 까맣게 타는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그를 멀거니 보았다. 울음으로 웃는 그의 얼굴이 그녀를 다독였다. 그녀의 마음과 사랑의 일치를 확인하고, 미소 지었던 것도 잠시. 어렵사리 각오하여 건네진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돌려주며 그가 청했다.

날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그녀의 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괜찮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차가운 암흑 속에 저주받은 내 인생, 이런 삶, 이런 인생…….

그 처절함이 그녀에게 닿아, 그의 청을 한사코 거부하려던 그녀를 무너뜨렸다. 그녀가 끝내 그의 잔인한 소망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끝이 왔으므로.

사랑해요 그대
그대 사랑해요
사랑해서 내가 떠날게요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이 그녀를 찾았다. 관 앞에서 나누는 이별의 인사는 짧았다. 입맞춤이라기보다는 눈물의 나눔이었다. 그토록 바랐던 사랑의 일치. 이제야. 이렇게라도. 그의 눈물이 그녀의 뺨에 닿아 흘렀다.

그리고는 두 입술이 마주 닿은 상태에서, 그 사랑의 일치를 영원의 반열에 올려둘 구원이 그를 향하여 날아들었다. 사랑이 허락한 죽음.
구원이자 안식.
칼침의 반동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그의 손이 뻗어졌다가, 잠겨드는 문과 함께 서서히 스러졌다. 경직된 고통을 품고도 애써 웃음 지어 보이던 얼굴까지도.

그것으로 그의 시간이 멎었다.
오랜 고독과 아픔의 끝이었다.

소금으로 빚은 세 개의 석상이 버티고 선 그들만의 세계에서, 마지막 순간 그에게 허락되었던 그녀의 눈빛과 입술, 마음. 그리고 그녀가 허락한 구원만이 그의 동행이 될 것이었다.

안녕, 안녕. 찬찬히 흩날리는 잿빛 가루를 향해 되뇌었다.

사랑이여, 안녕.
더 이상은 아프지 않기를.


댓글 '3'
profile

연꽃

14.10.12

이제 내 안에서도 그는 과거가 되었다.
profile

연꽃

14.10.12

XIA

어쩌면 영영 마무리 짓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사진이 뜨고 나서부터 홀린 듯이, 그를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묻는 일을 정식으로 마무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rofile

연꽃

14.10.12

이것으로 이제 안녕.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