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천천히 시아준수의 모든 장면 장면을 적어봅니다.


1.

린드 L 테일러의 죽음.
L 글자 뒤로 드리워지는 실루엣이 잘생겼다. 훈훈함이 느껴져. 꼭 2D처럼 현실성 없는 형상. 얼굴 없는 영상 위로 입혀지는 목소리 역시 훌륭하다. 특히 가장 첫 대사. '훌륭하다 키라.'

(참. 프리뷰에서와는 달리 린드 L 테일러의 얼굴이 영상으로 비추어졌다. 라이토가 그의 이름을 적을 때는, 그 얼굴 위로 글씨가 적혔고.)


2.

음향팀은 어제의 the game begins 에게 사과해야 하겠다. 시아준수의 노래를 깎아 먹는 음향이라니. 용서할 수 없다. 덕분에 이 넘버와는 오늘에야 비로소 만났다.

'숫자들과 데이터를 분석해서'의 순간 부풀어 번뜩이던 눈동자가 가장 선명하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얼굴에 광기가 가득했다. 정면의 허공으로 못 박힌 듯 꽂힌 시선에 미동도 없는 모습을 보고, 라이토만큼이나 엘도 정상이라 할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숫자들과 데이터ㅡ과학적 수사를 흡사 신봉하는 것과도 같던 그 모습이.

그에 앞서 '내가 상대해주지'라며 일어서면서는 특유의 걸음을 선보였다. 신묘한 걸음걸이. 발바닥을 곱게 펴서, 끝으로 바닥을 쓰다듬듯이 한 걸음 내밀고는 일순간에 발끝이 닿은 지점으로 몸을 끌어당겨 걷는다. 걸음의 방향을 바꿀 때는 어깨가 방향키가 된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고 홱 돌려놓는 것처럼, 어깨를 통해 회전해. 섬세하고 예민한 걸음걸이로 엘의 단면을 그려낸다.

아아, 걷다가 문득 라이토에게 화가 치솟는 시점에서는(건방진 멍청이 하!) 쇄골을 들썩이며 성을 내는데 이게 이렇게 멋있지 않을 수 없었다. 



3.

비밀과 거짓.

무대 중앙. 의자에 앉은 자세로 등장. 잔을 들고 있다 내려놓고 딸기를 집어 든다. 딸기는 오늘도 야금야금 2/3 정도만 베어 물었다. 잔-딸기-잔 순으로 끊임없이 입안을 바쁘게 하는 것도 여기. 손끝만 까딱하여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도 여기. 기본자세대로 폴싹 솟아올랐다가, 의자에 옆으로 누웠다가 하는 것도 여기(묘기 같기도 한 폴싹 솟아오르기는 수사팀과 음성통화를 하며 보여주는 모습.)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서 일어나 류크와 마주 보던 옆모습이 기억난다. 보이지 않겠지만, 마치 무엇인가 보이는 것처럼 투시하던 눈. 미지를 탐색하는 미간이 진지하다. 엘이 고민하는 동안 라이토-샤엘-류크의 직선구도에서 라이토와 류크는 엘을 가운데에 두고 사신의 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대화가 진행될수록 샤엘은, 물론 들리지는 않지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고는 서서히 주저앉는다. 그 자신이 신뢰하는 숫자들과 데이터로는 도달할 수 없는 '사신의 노트'라는 난제에 봉착한 채 뒤죽박죽 엉킨 얼굴이 되어.

그리고 이어서 엘과 라이토의 듀엣. 가사는 가물가물한데,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으로 합체하는 이 순간의 연출이 좋았다. 동전의 양면, 흑과 백, 분리될 수 없는 선과 악의 구도 같기도.

이후에는 왼쪽 돌출로 나와 노래를 마무리하고, FBI 뉴스 소식과 함께 홱 돌아 콩콩콩 발소리를 찍으며 퇴장☆



4.

정의는 어디에 reprise.

다리 왼쪽에서 등장. 정중앙에 멈추어 서서 노래하는 모습은, 프리뷰에서도 그랬지만, 샤토드를 연상케 한다. 다리 위에서 인간 세상을 관망하는 듯한 모습이라든지, 인간 같지 않은 서늘한 느낌이라든지.

그리고 바로 이 넘버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 속사포 랩이 퐁퐁.

난간 위에서 기본자세 취하기는 오늘도 했는데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 멋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이 난간 위에서 발꿈치까지 완벽하게 들고 있으니 불안불안멋짐멋짐불안불안을 오가는 마음.



5.

2막. 수사팀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엘. 무대 중앙의 벽 뒤에서 등장한다. 한 손에는 초코과자를, 한 손에는 봉지를 든 채로. 본인을 엘이라 소개하는데, 한마디씩 한 후 매번 초코과자를 베어 물려고 입으로 가져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질문을 건네오는 수사팀 때문에 단 한 번도 과자를 베어 물지 못한다.

작은 협탁을 디딤 삼아 의자로 성큼 걸어 올라가 앉으면서는 변명하듯이, 하지만 단호하게 "이 자세가 아니면 안 돼요."하고.

여기서 야가미 국장의 아들 라이토를 키라로 지목한다. 국장을 가리키는 곧은 팔에 확신이 실려있다. 동경대 입학 선언을 하는 것도 여기.


6.

죽음의 게임.

오른쪽에서 등장. 카키색 아우터를 걸쳤다(덕분에 섹시한 가을신사 느낌이 물씬 난다). 처음으로 신을 신고 있다. 라이토와 만났을 때, 그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로 본론을 꺼내는 그가 멋있다. 신입생 대표 인사를 할 때 소리 없이 입 모양만 움직이는 것도 의젓하여 멋있다. 본인의 순서를 마치고 라이토에게 단상을 넘겨줄 때의 동작도 멋있다. 커튼콜에서 상대 배우에게 인사를 넘길 때의 제스처처럼 손을 이케이케 들어 올리는 모습이 멋있다!

동경대에서의 샤엘은 진짜 멋있음 투성이.

노래도 변함없는 진실과 1위를 다투리만치 좋았다(어서 쓰고 다시 듣고 싶당). 오른쪽 돌출로 걸어나올 때 자못 심각하게 찡그린 얼굴도.


7.

변함없는 진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박수. 짝짝.

철퍼덕 주저앉은 채로 등장하는 모습은 다시 봐도 너무 귀엽다. 심장을 부여잡게 해. 망연자실한 얼굴이 안타까워. 그가 안타까운 만큼 "서로의 사신을 보여준다"는 제2의 키라의 메세지와 이 넘버가 조금 더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엘이 노래하는 변함없는 진실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는 있으나, 흐름이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하다못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엘 뒤 배경영상으로 '서로의 사신을 확인한다'는 글자라도 쏘아주지. 그러면 엘이 무엇에 충격을 받았고 그 혼란이 어느 정도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는지 더욱 여실히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렘과 미사의 감정선에는 그토록 충실하면서 어째서 사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된 과학수사 신봉자 엘의 혼란은 성긴 가지처럼 다루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여기서는 왼쪽 돌출로 걸어 나와 끝까지, 돌출에서 엔딩 및 퇴장.


8.

무대 오른쪽. 쪼그린 채 사탕을 물고 있다. 오늘의 사탕은 다홍색 반, 노랑색 반. 야가미 국장님과 부딪히는 엘. "국장님을 모욕할 생각은 없었어요." 할 때의 대사와 어투가 순순하여 약간의 의외성을 준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멋진 남자.

모키 형사의 순직을 알리는 일상적인 어조는 사뭇 소름 끼친다. 바로 이어지는 대사("제2의 키라가 이름을 몰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만약 있다면요?")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모키 형사가 미행 중 제2의 키라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경우의 수를 그가 몰랐을 리 없다. 한 사람의 수사관을 자칫 죽음으로 내몰 것을 알면서도 강행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사 방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표 의식. 이런 게 바로 엘이다!.. 라고... 파고들지 않아도 엘의 진면모를 친절하고 세심하게 다루어주었으면 했는데. 없죠.


9.

놈의 마음 속으로 (테니스씬)

무대 왼쪽에서 등장. 신을 신고 있다. 계단 앞에 고이 벗어두고 경기를 위해 몸을 푼다. 몸 풀 때는 뒷모습(뒤태도 예쁘지만 이 때의 표정도 궁금해. 이를 앙 물고 있을까? 미간을 모으고 있을까?).

경기는 언제나 본격적으로. 오늘은 샤엘도 보고 라이토도 보고, 바쁘게 본다고 봤는데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샤엘의 어깨뿐이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두 사람 모두 나란히 정면을 향한 채 경기하던 모습과 격류를 탄듯한 노랫소리.

아, 그것도 있다. 공 치는 효과음에 맞추어 까딱하던 고개. 그 민첩한 움직임에서 '시아준수'의 숙련된 몸놀림이 여실히 느껴져 그만 반해버렸다.

끝나고는 역시 힘들게 숨을 삼키는 얼굴. 턱 끝에 대롱대롱하다 똑 똑 떨어지는 땀방울을 나는 보았지. 땀방울은 미사의 수사를 마칠 때까지도 계속 흘렀다.


10.

"친구니까요." 할 때 라이토의 표정을 보았다. 헐 얄미워. 콩 박아주고 싶었다.

신발을 신을 땐 양쪽 모두 손가락의 도움을 빌렸다. 어쩐지. 어제도 꼬물꼬물 신발과 씨름하더니, 역시 신발이 튕기는 모양이다.

계단을 오른 후 다리의 왼쪽 돌출까지 나와 "나도 힘들어요."라 말할 때의 엘의 표정을 정면으로 보고 싶은데, 라이토의 각도에서가 완전한 정면이라 아쉽다. 변함없는 진실로 망연자실하는 듯하다가도 딛고 일어선 후 여기에서의 "나도 힘들어요", 가 엘의 감정선의 전부다. 더 알고 더 듣고 보고 싶은데 다루어지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


11.

미사의 수사.

다리 위에서 지켜보는 샤엘. 암전 후 결박된 미사가 등장하기 전, 조물조물 사탕 껍질을 벗기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조명이 들어오면,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천연스레 사탕을 앙 물고 있는 그.

오늘은 사탕 먹기로 예술을 했당. 츄~ 하는 입 모양으로 사탕을 입술에 콕 대었다가, 그대로 입안에 넣고 쪽쪽. 절대 깨물지는 않고 혀로 입안의 사탕을 이리저리 마구 굴리면, 입술에 닿은 채 바쁘게 왔다 갔다 흔들리는 사탕막대. 입술과 사탕 알맹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광도로 반짝이기 시작하는데, 그때의 그 반들반들하면서도 달달한 반짝임까지. 여기서 반짝이는 것이 사탕과 입술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원래도 형형한 눈망울과 턱끝에 맺힌 땀방울. 총체적 항성 그 자체였다..☆


12.

변함없는 진실 reprise 부터 엔딩까지.

왼쪽 돌출에서 등장한다. 돌출 끝까지 갔다가, 본무대로 향하는 그.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있고 신발 역시 신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라이토의 시나리오. 이 시나리오부터는 아직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여.. 머릿속에서도 뒤죽박죽이다. 어디서부터 라이토의 각본이고 어디까지가 엘의 자의식인지 혼란스럽다. 아무리 죽음을 결정해두었다고 해도 라이토가 선뜻 노트의 존재와 사신을 밝히는 것도 뜬금없게만 느껴지고. 죽는 마당이니 진실은 알고 가라는 배려인가?

'내가 틀리지 않았다'며 웃는 엘도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 틀리지 않았는지 보여준 바 없으니. 흐느끼는 듯 웃는 듯 미묘한 소리를 뱉어내는 그를 멍하니 볼 수밖에. 아니면 끝까지 내가 틀리지 않았다 확신하는 엘조차도 라이토의 시나리오 속에 포함되었던 건가?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이후에도 인간이 자의식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니, 이것이 엘의 자의식이 아니라 데스노트에 적힌 시나리오의 실현이었던 거라면. 그렇다면 더 슬프다. 엘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두 천재의 두뇌 싸움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였는데, 막상 엔딩에서는 그저 사신의 손에 놀아난 인간의 삶의 허무함이 주제가 되는 것도 '허무하다.' 


13.

엔딩과 화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밖에: 렘을 본 라이토는 어제와(진짜 하얗다) 다르게 '무섭다'고 했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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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1

시아준수 외의 이야기

시작과 끝이 수미상관을 이루기는 한다. 사신들의 노래 중 '인간의 목숨은 어차피 사신 손끝에 달려있지'와 엔딩이 꼭 맞으니까. 하지만 시작과 끝이 합일을 이룬다고 전부는 아니잖아? 중간이 없는걸? 과정을 그려놓지 않고 앞뒤로 "허무함"이 주제입니다. 하고 말해버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하다못해 중간에 류크가 약간이라도 지겨워하는 모습을 넣어주었더라면 마지막의 변덕이 완전한 뜬금포는 아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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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1

라이토에게 손뽀뽀 날리다 멈칫하고는 그대로 방향 틀어서 객석을 향해 츄~ 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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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1

무대 양끝에서 서로에게 건네는 손뽀뽀는 약간 견우와 직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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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2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 엘은 천재이기 때문에 데스노트의 조종하에 움직이게 되었더라도 그 상황에 맞부딪히려는 이성이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데스노트에 의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본인의 의지로 말을 할 수 있었고, 본인의 옳음을 확신할 수 있는 자의식이 남아 있었던 거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라는 마지막 대사가 라이토의 각본인 결론은 엘에게 너무도 허무하니까, 이 편이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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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2

엘이 다이코쿠 부두 창고로 향하게 되는 건 데스노트에 적힌 라이토의 시나리오 때문이지만, 창고로 이끌리는 설명하기 힘든 불가항력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가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추리해냈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변함없는 진실 repr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