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의 연속이었다. 그가 변한 걸까? 아니면 내가 지나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걸까? 그도 아니면 여태껏 보지 못한 것을 오늘에서야 인지하게 된 걸까? 분명한 것은 기념비적일 정도의 충격적 공연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요인에는 늘 그래 왔듯, 그가 있었다는 것.
*
게임의 시작. 키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파악을 마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작을 선언해왔던 것이 기존의 게임의 시작이었다면 오늘은 그 반대. 노래로 키라를 탐색하고 있었다. 가사를 따라 키라의 존재를 짚어가는 그가 느껴졌다. 호기심 한 스푼, 증오 한 스푼. 소절을 따라 한 걸음 씩 적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다 건방진 멍청이! 생명을 가지고 놀면서 하! 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 터트려졌던 분노. 화를 꾹꾹 눌러 담는 음성이었다. 가까스로 눌러두었으나, 건드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터져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보았다.
걸음걸이에서도 화가 묻어났는데, 의외로 정면을 돌아보는 얼굴은(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고요했다. 동면에서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몽롱해 보이기까지. 이어지는 숫자들과 데이터는 오랜 잠을 떨치고 나와, 흥미를 끄는 놀이에 사로잡힌 아이의 얼굴이었다. 순진무구한 동공에서 구미를 당기는 흥미로움과 함께 잠을 깨운 것에 대한 화가 설핏 엿보였다.
최후의 선언인 '시작할까'는 평소와는 달리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결이 느껴지는 소리였는데, 그마저도 어울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어린 사자의 본색을 품은 포효에.
비밀과 거짓. 어제도 오늘도 눈썹과 미간만을 사용하여 아! 하는 느낌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린 후엔, 이미 단서를 틀어쥔 것과 같은 무심한 어조.
오늘의 비웃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죠'에서 맺혔다. 확연한 웃음기.
오늘의 비웃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죠'에서 맺혔다. 확연한 웃음기.
사신의 눈에 대한 대화를 들으면서는 세 가지 표정이 순식간에 혼재되어 나타났다. 약한 흥분이 어깨에서부터 코끝, 눈썹을 휘감고 올라갔다가 얼마간의 혼란과 설마- 하는 얼굴이 되었다. 마지막엔 단서를 잡았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이 찰나의 세 가지 표정이 얼마나 소름 끼쳤는지. 아무 대사 없이도 얼굴로 추리해내고, 추리하는 과정을 전달해.. 시아준수...
네가 날 죽이길 원한다면ㅡ직전. 돌출 입구로 나와 씨익 웃는 얼굴은 심장 아프게 멋있다. 키라의 단서를 틀어쥐고 자신만만하게, 즐겁게 웃는 얼굴.
전력으로 신이 나서, 마지막 듀엣에서는 그야말로 날카롭게 부딪혔다. '거'짓말과 '비'밀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잘 벼려진 창의 날과도 같던 소리. 그대로 라이토라는 방패를 꿰어뚫을 것만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단서를 준 보답으로 관동지역이라는 힌트를 주었듯, 단서를 쥐자마자 곧장 패를 던졌다. 그가 선택한 다음 패는 'FBI'. 뉴스 브리핑을 돌아보는 얼굴과 퇴장하는 걸음걸이에서 느껴졌다. 이게 나의 다음 수인데, 자 넌 어떻게 나올까? 자못 기대된다는 듯한 기색이 여유롭게 어깨에 회전축을 두어 방향을 트는 상체에서부터 전해졌다.
정의는 어디에 reprise. 지상에 키라의 사람들. 다리 위에는 오직 그. 키라를 꿰뚫어보는 자도 오직 그. 늘 그의 웃는 얼굴이 알듯 말듯 알쏭달쏭했는데 오늘 불현듯 다가왔다.
드디어 드러나는 키라의 정체.
소름 끼쳤다. FBI 조차도 수단이었다. 키라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소한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였으면서도 키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들의 죽음을 묵인하고, 방조했다. 악마의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 악마와 다르지 않은 방법을 쓴다.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바로 정의, 라는 흔들림 없는 소릿결이 오히려 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대체 당신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그도 라이토와 다르지 않다. 종이 한 장의 차이일 뿐이야. 혼란스럽고 충격적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키라는 당신의 아들. 1막 놀이의 연장선. 오늘 역시 선언조였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의 아들이 키라니까. 선전포고 후엔 어제와 같은 정도의 낄낄대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오늘 역시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웃었다.
내 아들의 명석한 두뇌에 놀랄 거라는 말에도 웃었다. 뭘 새삼스럽게. 진짜 표정은 야가미 국장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난 후에 보여주었다. 싸늘하게 다문 입술에 부릅뜬 동공. 상대도 안 되는 걸로 까불어? 으름장을 놓는 것 같던 표정.
대사톤도 강했다. 어제 못지않게 빠르고 강했어. 연사하듯 다다다 뱉어낸 후, 지독히도 유치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 에서만 천천히 운율을 실어 발음했다. 이것이 진짜 단서라는 것처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에 비로소 본론으로 진입하여서는 흥미로움과 증오심으로 범벅된 얼굴이 되었다. 혐오도, 신남도 숨기지 않아. 직설적일 정도로 표정에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은밀히'의 섬세한 눈썹. 서슬 퍼런 놀이 중의 사람답지 않게 너무도 아름답다.
죽음의 게임. 라이토에게 건네는 대사에도 흥미와 분노가 뒤범벅. 증오심과 호기심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반짝였다. 호기심과 기대감이 근소치로 앞서있지만, 못 견디게 못마땅해 하는 기색 역시 숨기지 않는다.
오늘 귀에 꽂혔던 소절은 꺾인 돌출에서의 '누굴까'. 두 사람의 목소리가 치고받고, 섞이고 섞여드는 와중에 유일하게 창공으로 모든 소리를 감싸 안으며 솟았던 소리. 너와 나 중 누굴까, 죽음의 게임의 골자이기도 하였던 소리.
변함없는 진실. 벽에 부딪힌 얼굴. 놀이는 싸움의 단계를 지나, 전쟁으로 번져버린 지 오래. 처음으로 풀에 죽은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과연. 그 언젠가. 뼈저리게 나르시시스트 같다고 느꼈던 그날처럼 고아한 자존감으로 금세 떨치고 일어섰다. 눈앞에 미궁의 난제가 놓였다면, 풀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듯. 그래, 좋아. 까짓것 인정해주지. 인정 못 할 게 뭐야?
눈에 박혔던 표정과 소절은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포착해, 사느냐 죽느냐 갈리는 경계선. 조명과 동선이 혼연일체 되어 하나의 그림이었다. 빛이 소거되고 어둠이 드리워지던 얼굴에, 그의 얼굴을 메운 표정도 덩달아 깊은 수렁으로 내려앉았다. 이 게임의 끝이 단순한 승패의 차원을 넘어 그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한 얼굴이었다. 죽음의 게임에서 죽여야 사는 게임ㅡ을 노래하던 당시에는 예감하지조차 않았던 것. 죽는 자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의 강한 예고를 받아들인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것이 첫 번째 충격.
두 번째로는 시각적 충격. 사느냐 죽느냐 갈리는 경계선ㅡ에서 허리를 굽혔다 일으키는 간단한 동작으로, 빛을 가로막아 온통 어둠뿐이었던 얼굴이 한순간에 눈부신 빛을 머금고 찬란한 광채를 빛내는데 마치 그 순간의 그가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무대에서 용솟음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을 틀어쥐는 그 절정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취조신. 살인은 살인이죠! 라는 말은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FBI의 죽음도 모키형사의 죽음도 묵인한 그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아드님이 한 짓인데요! 라 받아치는 어조는 어느 때보다 강했는데, 건들면 바로 덤비는, 발끈하는 모습이 그 스스로 키라에 대해 묘사했던 것과 쏙 닮아있어 소름 끼쳤다. 지독히도 지기 싫어하는 유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야기미 국장을 비웃는 듯하던 어깨와 입꼬리도, 금세 무섭게 굳힌 얼굴로 노려보던 눈빛도 전부.
변함없는 진실 reprise. 늘 어느 정도 그 자신이 아닌 얼굴이었지만 오늘처럼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은 처음이었다. 의식이 없는 듯한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나왔다. 오늘 유난히 잔인하고, 키라의 쌍둥이 자아처럼 느껴졌던 그였기에 이런 변화가 못 견디게 아팠다.
약절정에서 스스로를 되찾고 사신의 존재가 떠오르리라 확신하는 모습까지도 허상처럼 덧없이 느껴졌다. 모두 소용없는 몸부림일 뿐. 더 아팠던 것은 그도 이미 그것을 예감하고 있음을 느꼈을 때.
마지막 순간. 두 번에 걸쳐 목도하는 혼란이지만, 짧다. 처음은 다른 사신이 네 이름을 적었다는 폭로가 있은 직후. 머리로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는 이 순간이 1차의 혼란. 짧지만 분명하게 일렁이는 혼란이 동공을 휩쓸고 난 후,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빛이 내려앉았다. 이어서 부르는 소절. 처음부터 다 보였어. 널 놓치지 않을 거야. 죽으면, 모든 게 끝났어.
라이토를 저격한 후, 그것이 노트의 의지였음을 깨닫는 과정이 2차의 혼란. 머리로는 받아들였으나, 노트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몸으로도 강제로 깨닫게 되는 순간. 몸으로 체득해버린, 두려움과 증오, 분노가 떨리는 호흡으로 마구 뭉쳐나왔다. 1차보다 거세고, 지켜보는 이도 아팠던 순간.
총구가 스스로를 향하고, 어떤 거스름도 허락되지 않는 최후의 시간. 잦아든 숨소리는 그가 모든 것을, 머리로도 몸으로도 받아들였음을 느끼게 했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덧없음, 허무함. 그럼에도 무엇보다 진실에 다가섰던 자의 희열이 동시에 용솟음쳤던 최후. 흐느낌으로 시작해 웃음이 집어삼킨 얼굴이 마지막이었다.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채 되지 않았던 키라와 오늘의 엘이 다른 것이 있다면 이 마지막 순간, 죽음 앞에서 자신을 지켜냈느냐 아니냐 뿐이었다.
*
오늘의 애드립:
치사빤슨가요?
맛있는데..
이거나 드세요.
맥심 3월호에 나왔었죠? 비키니 입은 사진 보다가 다크서클 생겼어요.
사탕은 처음은 진분홍-연분홍-하양의 그라데이션. 다음은 핑크와 하양의 1/2
스트레칭. 어제도 오늘도 학자세에서 대사를 먼저 시작한 후 팔다리를 내렸다. 신발은 두 발꿈치를 맞붙여 고정시킨 뒤, 꼬물꼬물 열심히 발을 집어넣었다.
테니스 시합은.. 시합 마치고, 오늘 두 사람이 숨소리 경진대회를 하는 줄. 그만큼 전력인 것이 느껴질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무대였다. 또 덕분에 시합 이후부터는 어찌나 얼굴만 보이던지... 이슬샤워는 시아준수의 잘생김을 극대화한다. 확신해.
딸기를 점점 시선으로 음미한다. 간택하기 전에 딸기 그릇을 내려다보면서도, 간택한 단 하나를 보면서도.
정의는 어디에 reprise. 난간에서 점점 더 시간을 충분히 두고 조심스럽게 내려와, 천천히 걸어서 퇴장한다.
시아준수 외의 이야기:
류크가 사과를 놓친 것은 오늘이 다섯 번째. 오늘은 어디갔어? 한 번 더! 라고 외쳤다. 본무대까지 굴러가버린 처음의 사과는 라이토가 주워갔다.
참, 테니스신. 두 번째인가, 서브 후 한 팔을 앞으로 뻗어내는 것으로 상의를 끌어내렸다. 상의를 직접 만지지 않고 옷의 태를 고쳐잡는데 엘의 것 같기도 하고, 시아준수의 것 같기도 했던 순간적인 동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