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이 없다면 아마 나는 뮤지컬 데스노트를 8월 13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오늘 공연이 완벽해서라기보다(물론 완벽했음), 오늘 보고 들으며 품었던 마음과 생각이 오래도록 기억 한편에 자리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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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결이 차분해졌다. 연기도, 표정도 헤어스타일을 따라 차분해졌어. 그래서 오늘의 그는 마치 호수의 물결 같았다. 더 부연하자면, 호숫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거대하고도 고요한 하류였다.
비밀과 거짓. 경시청ㅡ엘ㅡ라이토의 공간을 나타내는 세 개의 조명. 융화될 수 없는 세 영역이 각자의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공존하는 무대 위. 엘과 라이토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타의 영역을 넘나든다.
아, 류크ㅡ라이토의 부름에 엘과 류크가 그를 동시에 돌아보면, 두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라이토가 엘의 공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라이토가 엘의 의식으로, 엘이 라이토의 사고 속으로 침투하는 순간이었다.
사신의 눈. 발견을 그러쥔 엘이 키라의 문턱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순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경시청의 영역을 두 발로 밟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시청 영역 너머의 돌출로 걸어 나와. 인간의 잣대로 인지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미지를 향하여 걷는다.
연기적으로는ㅡ차분해진 머리처럼 대체로 차분한 억양을 유지하였으나, 웃음소리만큼은 예외였다. 외부에 공개된 적 없다는 말에 육성의 웃음을 자그맣지만 분명하게 흘려보냈고, 마지막 듀엣에서 그의 단독 소절 이후에도 옅게 웃었다.
퇴장은 무대를 울릴 것처럼 쿵쿵.
정의는 어디에 reprise. 막공 때는 망원경을 내려놓을 용기를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아 오늘 전체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맨눈으로 보았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딛고 선 엘은 거대해도 보이고, 외로워도 보였다. 천재 외톨이라는 숙명이 그를 기쁘게도, 버겁게도 휘감고 있는 듯했어.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강약은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진실. 오랜만에 뇌조명을 보았다. 뇌의 형상을 딛고 일어선 그가 무대 위로 흩뿌려진 빛을 자근자근 밟고 나오는 모습도.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그가 딛고 선 땅이 다시 없을 최대의 밝기로 빛을 발하는 것까지도.
사신의 그림자 뒤에서ㅡ의 순간 무대 양옆으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타이밍이 극적일 정도로 절묘했다. 실은 노래 속의 그림자가 어쩌면 그 자신을 가리키는 걸까 싶었을 정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너의 존재ㅡ에서는 어떤 결말도 두렵지 않다는 것처럼 웃었다. 그 결말에 설령 죽음이 있다 해도, 끝까지 완주해내겠다는 결의가 반짝거렸다.
소이치로와 사탕의 신. 세 번 웃었다. 쫓겨나가는 수사관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사르륵. 부드럽게 몸을 일으켜 걸으며, 소이치로를 돌아보기 직전 이제 그건 힘들겠다며 다시 한 번. 순직을 입에 올리며 마지막으로.
만약, 있다면요ㅡ에선 미소의 단계를 뛰어넘은 완연한 웃음기가 소이치로를 괴롭히듯 감돌았다. 퇴장 직전 훑는 듯한 시선으로도.
캠퍼스. 벗어두었던 신발을 신으며, 돌아선 상태에서 눈을 비볐는데 그만 오른쪽 눈가가 번져버렸다. 살짝이지만 분명히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상태에서 땀으로 반짝이는 얼굴이 제2의 키라라는 전리품에 취해 단서들을 나열하며 즐겁다는 듯이 웃는데, 그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비인간적인 광기에 황홀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하여.
취조신. 여전히 번진 눈가. 어째서 시아준수에겐 모든 상황이 절묘한지. 번진 눈, 구부정한 등, 사탕놀이하는 태연함. 심문에 요구되는 진지함이라고는 완전히 결여된 모습으로 이끌어나가는 비인간적 질문들. 악동의 단계를 초월하여 소악마에 이른 것만 같았다.
변함없는 진실 reprise. 비척비척. 비틀비틀. 좌우로 휘청이는 느낌이 확연하게. 꺾인 돌출을 스쳐 본무대로 향하는 뒷모습의 걸음걸이가 그랬다. 그와 함께 연기처럼 흩트려지던 '이제 넌 끝났어.' 다시금 그 자신의 레퀴엠이었다. 게임의 종막을 알리는 선언이자, 스스로를 위한 진혼곡.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반계단에 도달하여 그 자신의 걸음걸이와 강약을 되찾고 나서도 한 번 시작된 눈물을 멈출 길은 없었다.
죽음의 게임이라는 격류에 휩쓸린 인간이었음에도, 노트의 지배에 종속되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도, 주체적인 본성을 본능적으로 되짚어가는 그의 자존감이 아파서. 그렇게 뼛속까지 나르시시스트인 그가 좋으면서도, 시려서.
마지막 순간. 성큼. 노트 앞으로 다가서서, 잠시 멈칫. 라이토와 노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각오하듯, 다시금 분명하게 노트를 향한 시선으로 검지와 중지를 허락했다. 조심스럽게.
유치한 살인마가 최후의 심판놀이를 한 거겠지! 분노의 일갈이었다. 오늘은 이를 악물고 발음했어. 토해내듯이. 사신은 심판하지 않아! 는 비명처럼 들렸다. 가파르게 꽂혀내리는 목소리가 잔뜩 날서 있었다.
모든 진실이 베일을 벗은 게임의 최종장. 터덜터덜 곤드라졌던 걸음의 끝에서 라이토를 보던 그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다 보였어. 널 놓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게임의 끝에는 허무함뿐이구나. 공허하게 부스러지는 음성이 허공으로 연기처럼 흩트려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으로써 인간에게 내재된 태생적 한계ㅡ덧없음을 극복해버린 것만 같았다.
생과 사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부터가 그러했다. 데스노트에 자신의 이름이 적혔다는 사실도, 라이토의 위장죽음도 그를 충격으로 몰아넣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였는가 하면, 그를 마지막 순간 내내 그를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주도권의 상실이라는 깨우침. 그 자신이 노트의 지배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깨달음뿐이었다.
깨달음은 곧 그의 사고에서 파문으로 번졌다. 혼돈이 혼탁하게 모여든 동공이 두 손을 번갈아 보았다. 먼저 왼손. 주먹을 쥐었다 잔뜩 힘주어 펼쳐내는 그 틈으로 그의 자의식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어 오른손. 곧 총을 든 손. 떨쳐낼 수도, 던져버릴 수도 없이 손에 못 박혀버린 총은 그 자체로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족쇄의 표상이었다.
총 이리 내.
환멸 어린 표정으로 운명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라이토에게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운명의 방아쇠, 곧 결정자의 권한을 내놓으라는 의미의 겁박.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그가 곧장 라이토를 겨누었다. 마치 재차 짓조르는 음성에 대한 대답처럼.
세 번째이자 마지막 조준은 상징적인 행위였다. 운명에 대한 저항이자 노트를 향한 도발. 죽음의 노트가 미처 정해두지 못한 사각지대를 밟고 선 그의 자의식이 저항의 숨결을 쌕쌕 뱉어냈다(나는 늘 이 세 번째 조준에서 그가 불어넣는 디테일에 마음이 저미곤 한다. 앞선 두 번의 조준ㅡ노트의 지배력에 종속된 행위에서와같이 손목 스냅을 이용하지 않는 움직임에서 그의 자의식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이곤 하는 탓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였던 팔의 떨림과, '써진 대로' 된다는 말에 증폭되던 호흡은 그의 자의식이 노트에 대한 저항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최후의 순간. 팔의 각도를 바꾸는 라이토의 손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천천히 틀어지는 방향. 끝내 그 자신을 겨누게 된 자세. 라이토의 팔과 자신의 팔이 엉킨 지점에서 멎었던 시선이 점차 허공으로 비켜나며 무섭도록 고요해졌다.
여기까지구나.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저항을 마치자, 그의 비인간성이 발휘되었다. 의연하고도 고아하게, 죽음을 마치 마중하는 듯이. 환희와 울음이 뒤엉킨 비명과도 같은 마지막 한 마디가 톡, 튕겨 나오듯 뱉어졌다.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그의 육신도 죽음 앞에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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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애드립:
치사빤슨가요?
삐돌이
이거나 드세요.
맥심 3월호에 나왔었죠? 비키니 입은 사진 보고 쌍코피 터졌어요.
분홍과 하양, 오렌지.
시아준수 외의 이야기:
류크는 오랜만에 사과를 놓쳤다. 본무대로 굴러간 사과는 어김없이 라이토가 주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