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원하던 흡혈을 마친 그의 머리칼이 새빨간 날것으로 되살아나 후두둑 떨어져 내렸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손끝에 남아있다.
높은 제단을 기어이 비집고 올라서서 신의 심장을 찌르던 그 익숙한 뒷모습과의 재회도. 당신은 이미 결혼했다던 섧은 외침도, 눈물의 세레나데도.

다시 돌아온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 혈관의 모든 피를 멈춰 세웠다. 우리 처음 봤던 그때처럼.

*

오늘 나의 구역, 나의 시야에서 완벽하게 그림이었던 장면을 망설임 없이 꼽는다면 역시 ‘마지막'. 초연에서도 한 번인가 보았던 각도의 그림으로, 그때도 눈을 떼지 못했지.


그의 지친 심신이 관을 찾아 그 안으로 날아든 이후부터였다.

관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객석의 오른 구역을 향하여 치우쳐 있었고, 때문에 나의 구역에서는 관 밖으로 한껏 내민 그의 상반신만이 보였다. 정확히는 옆얼굴의 상반신. 흡사 평면처럼 느껴질 정도의 옆모습이었다. 그도, 그녀도, 그들이 나누는 사랑도. 마치 일 년 중 단 하루만 피어나는 꽃을 조심스럽게 압화하여 보존해놓은 장면을 보는 것처럼 종이 속 그림 같은 평면의 시야가 펼쳐졌다.

그녀는 한사코 버텼다. 서로의 손을 부둥켜 잡은 그대로였으므로, 관속으로 몸을 누인 그를 따라 그녀의 걸음도 당겨져야 함이 마땅한데. 어떻게든 관으로는 다가서지 않으려는 결사의 견디기에 결국 그가 그녀를 향하여 한참이나 몸을 앞으로 내밀어야 했다.

그 모습이 그림이었다. 짙은 암흑의 관 밖으로 모습을 내민 그는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난 붉은 꽃 같았다. 온통 어두워 삭막한 성의 폐허에서 그만이 강렬한 생명의 색을 머금고 있었다. 눈부실 정도의 색의 대비가,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생명력을 머금고 빨갛게 빨갛게 빛을 냈다.

그 빨갛게 아름다운 생명이 마주 잡은 손을 더욱 감싸 쥐었다.
눈물이 번진 연인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옆얼굴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사백 년의 기다림처럼 길고도 곧게, 그녀를 향하여 한껏 몸을 기울여서. 그녀가 오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가 닿겠다는 듯이. 마주 닿은 채로 감은 눈꺼풀에 눈물이 맺혀 경련했다.

그 찰나가 너무도 영원처럼 다가와서, 하마터면 눈을 감아버릴 뻔했다. 그다음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가까스로 허락된 사랑의 일치. 찰나 안에서라도 그들이 영원을 살았으면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짧은 입맞춤과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손안에서 맴돌던 단검이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그녀에게로 한껏 기울였던 그의 상체가 관 안으로 서서히 잠겨 들었다. 무너져가면서, 그가 마지막 손을 뻗어 본능처럼 그녀를 찾았다.

그것이 두번째 그림이었다. 관이 온통 그를 삼킨 뒤였기 때문에 그녀를 향하여 뻗은 붉은 팔만이 어둠 속에 가득했다. 눈에 맺혔을 눈물도, 작별의 아픔으로 얼룩졌을 얼굴도, 죽음의 고통에 삼켜진 육신도 아니었다. 내가 목격한 마지막은 외딴 빛의 붉은 팔이었다. 그녀에게 닿지 못한 채 스러지는 손으로 나는 그의 죽음을 보았다.

생과 사를 가르는 것처럼 단단한 관이 닫히고 온통 어둠만이 남은 후에도 빨간빛의 잔상은 남았다. 신을 찾는 그녀의 모습 위로 그의 빨간 옆모습이 얼룩얼룩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눈인 듯, 잿가루인 듯 흩날리는 무언가가 팔랑팔랑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내렸을 때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그것이 마치 죽어서, 형형하였던 생명의 색을 잃어버린 그인 것만 같아서. 찬란한 생명의 빛을 잃어서도 그녀의 곁에서 맴도는 영혼. 죽어서도 그녀에게 닿고 싶어하는 그라는 존재 같아서.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당신은 이런 사랑을 이어가겠지, 싶어서.




*


앞으로도 쓸 기회가 있을 줄로 믿는 간략한 나머지: 

1. 욕망의 솔리터리맨

2. 살아숨쉬는 날것, 어쩌면 심장처럼도 보였던 붉은 생머리

3. 흡혈 직후의 생머리와 미나와의 만남에 단정하게 빗어넘긴 가르마의 대비.

4. 의외의 아이같은 표정

5. 1막의 At Last. 첫공의 조화 그 이상이었던 어우러짐.

6. 단 한 번도 미나를 엘리자벳사라 부르지 않았다. 

7. 안 웃겨요?.. 

8. 고대하던 노백작님의 프블 횡단 

9. 추가된 파트(나를 살게 한 유일한 빛이죠, 폐허된 성에서의 러빙유)에서 느껴졌던 '시아준수'

10. 다음 공연을 앞둔 관객으로서의 과제: 초연 덜어내기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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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1.25

6. '단 한 번도'는 아니었다. 극 초반 가장 첫 만남의 미스 미나 머레이를 향하여 엘리자벳사? 하고 불렀던 걸 깜빡!
어쨌거나 아직도 기억을 못하겠어 (엘리자벳사)? 는 의도된 변화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대목에서 더는 미나를 엘리자벳사로 부르지 않는 그가 참으로 미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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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1.25

이기심으로는 엘리자벳사가 있는 편이 나은 것 같아. 처음부터 미나를 올곧이 보고 사랑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억울해. 그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덜 앓이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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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2.02

-본문 중 발췌-
관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객석의 오른 구역을 향하여 치우쳐 있었고, 때문에 나의 구역에서는 관 밖으로 한껏 내민 그의 상반신만이 보였다. 정확히는 옆얼굴의 상반신. (중략) 서로의 손을 부둥켜 잡은 그대로였으므로, 관속으로 몸을 누인 그를 따라 그녀의 걸음도 당겨져야 함이 마땅한데. 어떻게든 관으로는 다가서지 않으려는 결사의 견디기에 결국 그가 그녀를 향하여 한참이나 몸을 앞으로 내밀어야 했다.
 

2016 뮤지컬 드라큘라 하이라이트.mp4_20160202_014311.967.jpg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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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2.02

그래, 이 장면. 나의 이 시야가 영상으로 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