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 토드.

막연하게, 이 상태로도 내린 머리를 해주지 않을까 생각만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보여줄 줄은 몰랐다. 왼쪽으로 몰아 내린 앞머리는 지그재그로 힘을 주어 꼰 듯 부슬부슬했고, 가닥가닥이 살아 있었다. 아이라인과 입술색 때문인지 내린 토드였음에도 순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새하얗고 까맣고 붉은빛 감도는 투명한 얼굴이 마냥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강했다. 

프롤로그는 초연과도, 재연의 첫공과도 완전히 달랐다. 웃는 디테일은 같은데, 그 웃음에 지난 백 년의 무게가 휘감겨 있다거나 오랜 시간을 보내온 어깨 위로 먼지처럼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아지랑이 꼴로 피어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천사에겐 환희, 악마에겐 고통. 세상에선 사랑'. 자신이 간직하고, 또 기억하고 있는 감정에 흔히 알려진 명칭을 이리저리 붙여 보면서, '그래,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덤덤히 읊어 보이는 것이었다. 낮잠 한 번 거뜬히 자고 일어나서 지나온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견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태도는 거의 처음 보는 모습이라, 놀랍고도 흥미로웠다. 자꾸만 쌩긋쌩긋 날카롭게 웃는 얼굴에 애잔한 그리움은 없었다. 분명 그 스스로 '사랑'이라고도 말하고, 흡사 외침과도 같은 루케니의 '엘리자벳'이라는 가사에는 전과 같이 날래게 반응하는데, 그 사랑이 차가웠다. 얼음마녀의 입김에 얼어붙은 것만 같은 냉혹한 감정이었다. 그의 비위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얼음 조각처럼 산산이 바스러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재연에서 그가 보여주는 사랑의 노선은 줄곧 차갑다. 냉혹할 때도 있고, 대체로 단단하며 자비가 없다. 때때론, 혼자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선택된 사랑의 표적이 엘리자벳이었을 뿐인가 싶은데 그런 식의 사랑밖에 하지 못하는 그가 애잔(초연에선 그랬다)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목표에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엘리자벳과 그것을 사랑이라 이름 붙이며 놀이하는 죽음의 치밀한 잔악함이 무섭다.

론도에서 엘리자벳과 처음 눈을 마주하기 전, 그녀를 일으키는 손동작에도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는 그저 이제 슬슬 해야 할 일-죽음의 입맞춤을 내리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그녀를 깨우는 것인데, 죽음으로서는 일상적일 그 자잘한 동작이 참 멋스럽다. 그녀의 어깨에 얹혀졌던 손이 허공을 부드럽게 가르며 위로 향할 때, 마치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팔. 그 손짓에 반응하여 정신을 차린 엘리자벳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무던했던 손길에 알 수 없는 마력이 섞여든다. 론도의 전후로 엘리자벳을 향한 손짓의 강도와 부드러움의 정도가 대비되는 것이 좋았다. 낯선 호기심과 조심스러움, 그러나 여전히 모든 것을 발치로 내려다보는 듯한 가소로움이 숨겨지지 않는 본능적인 날랜 동작 속에 들어있다.

네 발로 내게 오리라며 멀어져가는 그는 찬찬히, 그러나 집요하게 그녀를 탐색한다. 한쪽 입꼬리만으로 웃는다. 내 안에서 꿈을 펼치라는 그의 말은 당부이기도 하고 주문이기도 하며 세뇌이기도 하다. 탐미하는 진득한 시선. 두 눈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분명히 이글거리기는 하는데 단정하고 차갑다. 차가운 열정. 이때 힘을 주어 펼친 양 손바닥의 각도까지도 죽음이라,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첫날의 마지막 춤에서 무엇을 듣지 못했나 했는데 시작하기 직전의 나른한 숨소리가 없었다. 그러나 중간중간 숨을 들이마시는 행동이나 걸음걸이, 바뀐 안무의 짜릿함이 주는 희열 탓에 거의 인지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농익었다고 할 수 있을 재연의 마지막 춤은 아주 단단하다. 조종하는 안무가 더해져서 언뜻 현란해 보이는데도, 군더더기가 없다. 정확하게 치고 빠지는 강약이 무서운 집중력을 뿜어낸다. 날카로운 양날에 차갑게 베일 것도 같고, 뜨겁게 데일 것도 같다.

지상에 내려와 마지막 춤을 부르며, 그가 고개를 살짝만 비틀어 웃었다. 입술색 때문에 입꼬리가 조금만 올라가도 강하게 머리를 치는데, 그렇게 대놓고 웃으면 너무 섹시해서.. 여기에 뇌쇄적인 고개 비틀기와 각도 꺾기까지 더해지면.. 아.. 마지막~춤~! 부르기 직전에는 어제처럼 상체에서부터 하체까지 몸을 쓰다듬어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팔을 쓰는 안무 끝에 가슴으로 착착 달라붙는 손. 달라붙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가슴을 미세하게 훑어내리는 손.

'공긴 습하고 탁해~'라면서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그러모으면서 엘리자벳을 끌어들였는데, 와. 본인의 신체,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도 모자라 공기를 조율하는 것 같았다. 그 단단하게 조여진 팽팽함. 그 쫄깃함.

마지막에 브릿지에 올라서는 유난히도 신랄하게 웃었다. 한껏 비웃는 얼굴에는, '차인 남자'의 억울함이나 억하심정 같은 것은 없었다. 할 테면 해 봐, 그래도 마지막 춤은 결국엔 나와 함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웃음과 정면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아아, '누군가의 어머니'의 아들에게 죽음을 내릴 때는 어제와 다르게 씨이익 웃었다. 어제는 그 죽음의 업무가 무료해 보일 정도로 덤덤한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예의상 웃어 보인 것도 같고. 권태로움은 여전했지만 죽음 자체를 즐기고 있단 느낌을 주었다.

침대 위에서는 여전히 위험하다. 옥주현 엘리자벳의 기본 움직임이 김소현 엘리자벳보다 크고, 행동반경도 넓어서 그녀가 죽음을 뿌리치면 그에 대응하는 죽음의 들이댐도 격해진다. 오늘 침대 위에서 입맞춤을 시도하는 죽음은 정말로 사납고 거칠었다. 침대 위에서 가뿐히 일으키는 몸을 보면, 전신의 세포가 공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볍고 날랜데 입맞춤을 위해 덤벼들 때는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단단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근데 그게 또 절대 둔탁하지는 않아서, 스르르 덮쳐드는 연기나 폭풍우, 구름을 마주하는 것 같다.

침대에서 일어난 후의 마지막 표정은 어제와 같이 으르렁하는 입모양이었다. 코끝이 찡긋, 입술 끝이 세모지게 말려 올라가며 언짢음을 드러내다가도 대번에 무표정-웃음의 순서를 밟는다. 매사에 진지하지만 무엇에도 심각해지지는 않는 그의 죽음이다.

한숨으로 내쉬며 시작하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의 '이겼어'는 또 들어도 좋다. 잔뜩 비아냥거리던 때의 이겼어도 좋았지만, 이렇게 나른한 음도 좋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있는 두 번의 입맞춤 시도 역시 침대에서와같이 옥주현 엘리자벳의 반응에 맞추어 격해졌다. 제일 멋있는 건 엘리자벳의 뒤에 서서 그녀의 한 팔, 한 팔을 조종하곤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잠식하려 들 때의 그다. 음습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 진짜, 아, 멋있다.

어린 루돌프와 대면하는 장면도 마이얼링만큼이나 짧아졌는데, 이 매정한 돌아섬 때문에 루돌프가 더 불쌍하다. 친구라면서, 왜 이야기하는 도중에 일어나서 멀어져 가요..? 첫 등장부터 위압적으로, 인사는 죽음의 입맞춤을 시도하는 것으로, 헤어짐은 못내 귀여워하는 듯하지만 냉정한 경례로. 마지막은 한껏 비웃는 것처럼 어깨와 골반을 살랑거리면서 퇴장하는, 예의 그다운 모습이다.

전염병에선 귀여운 순간이 있었다. 모자 벗을 타이밍을 잘못 계산했는지, 정면을 보고 모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멈칫하며 그대로 내렸다. 그리고 나서도, 채 뒤돌아서기 전에 모자를 벗어 던져서 얼굴이 훤히 보이는 상태에서 정체가 드러났다ㅋㅋ 사소한 착오였겠지만, 또 그 상황만을 놓고 유기적으로 생각해보면 죽음이 얼마나 그 순간이 즐거웠으면 저렇게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인가 생각할 수도 있어서, 이해가 갔다.

대망의 그림자. 처음부터 웃고 있다. 합스부르크의 문장이 모두 올라가 그의 얼굴이 보이기 이전부터 이미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새빨간 웃음. 붉은 미소가 루돌프를 마중하듯이 반긴다. '약~속'을 부르면서 난간에 몸을 눕혔던 건 첫날의 강도보다는 덜했고, 중간에 나빗짓을 하는 장면에서는 이번에는 몸이 C자가 아닌 곧은 대각선 (/)이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뒤로 몸을 젖히면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건지 봐도 봐도 신기할 뿐이다. 이때 전체적으로 어두운 의상에, 치렁치렁한 천이 잔뜩 달려 있어서 그가 손짓을 할 때마다 화려하게 나풀대는데, 그 덕에 그의 움직임이 더욱 도드라지고 현란하게 느껴져서도 좋았다.

중간에 '폭풍 앞에'를 부르는 목소리가 마이크에 실리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보는 나는 당황했는데, 그는 표정의 변화도 없더라...

짧아진, 두고두고 아쉬운 마이얼링에서는 ㅠ 기진맥진한 루돌프가 총을 건네주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총구를 홱 낚아채어 루돌프가 스스로의 머리를 겨냥하도록 조준해주었다. 그 순간적인 날랜 동작이 더할 수 없이 섹시했다.

전반적으로 강하고, 강하고, 강한 치고 빠지기. 그리고 진했다. 공기 중으로 스며드는 존재감. 어느 순간 보면 잠식당해 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은 초연과 같은데도 그에게 잠식당하고 나서 느끼는 존재감은 비할 바 없이 목직하다. 폭풍을 예고하는 검은 구름과 같이 사위에 달라붙어 호흡을 옭아맨다. 빈틈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의 여운도 탁하리만큼 짙다. 세상에선 사랑이라 불리는 뜨겁고도 차가운 감정. 그 잔여감이 가슴 밑바닥까지 자늑히도 달라붙는다.

마지막의 마지막, 그의 베일씬이 그랬다. 고개를 젖히고 감겨들기 시작하는 눈꺼풀이 시간을 세는 듯, 느짓느짓 했다.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인 입맞춤 직후, 온기를 잃은 엘리자벳의 늘어진 몸을 위아래로 거듭 훑어내리던 그의 옆얼굴에 파르르 떨리는 것도 같았다. 미세하게 으르렁하던 입술의 여운이 마지막까지 달라붙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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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6

그리고 ㅋㅋ 삼성카드 셀렉트 데이에 무대 인사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커튼콜 때 배우 전원이 앞으로 나와서는 퇴장할 기미가 없길래 살짝 놀랐다가 그가 입을 열어서 우왕! 했다. 커튼콜에서도 죽음의 여운을 크게는 깨트려내지 않는 그가 단정하고도 다정하게 인사했다. 죽음 역으로 인사드린다는 짤막한 소개 이후 삼성카드를 정확하게 언급하며 한 번 웃고는, 옥주현 엘리자벳이 멘트를 할 때 2,3,4층을 찬찬히 올려다보는 눈이 참 반짝반짝했다. 객석의 사람을 한 명 한 명 세기라도 하는 듯이 진득하게 올려다보는 눈이었다. 그 일렁이는 눈빛을 오랜만에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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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6

프롤로그 가사 중 '아직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해'가 '뜨겁게 해'로 바뀐 것도 좋다. 뜨겁게 한다는 말로 달라진 샤토드의 노선을 단번에 느낄 수 있기도 하고. 더 어울려 죽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