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토드.
붉은 입술, 짙은 아이라인. 하얀 얼굴. 어두운 무대 조명 속의 그는 말 그대로 '죽음' 같다.

밤공은 전 캐스트가 훌륭했다. 초연을 통틀어 기억으로 남길 뮤지컬 엘리자벳의 단 한 번의 공연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좋았다(자연히 후기도 밤공 위주). 다소 갑갑한 감이 있던 음향도 오늘은 양호했다. 초반의 당신처럼과 날 혼자 두지 말아요를 제외한다면 김소현 엘리자벳은 여태까지의 엘리자벳 중 가장 설득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특히 황후는 빛나야 해에서 가장 현격하게 몰아침을 당하는 모습이 돋보이는 어리고, 여린 황후였다.

완성형 공연의 시작은 프롤로그에서 죽음의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차갑고, 메마르며 건조하단 느낌까지 주었던 15일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감정이 그의 둘레로부터 불꽃처럼 타오르며 엘리자벳이란 단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격렬한 얼굴의 떨림과 눈동자의 희뜩임에서 그가 간직한 백 년의 뜨거움을 느꼈다.

살아 숨 쉬는 죽음이었다.

담대하고, 자신만만했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감정이 당장에라도 쏟아질 듯하다가도 단박에 정리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때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많이 웃는데도 그 웃음 끝의 감촉이 날카로워서, 차가움과 동시에 뜨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오늘의 론도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기쁘게 기다리마'라는 대사로 압축할 수 있다. 엘리자벳과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멎었던 그의 숨, 움직임, 눈동자. 알 수 없는 마력 속에서 일렁이며 영문을 찾던 눈동자. 그 어느 때보다 그가 동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그 일시적인 멎음. 이내 호기심과 기쁨으로 얼풋 번지며 이후를 기약하던, 웃음이 살며시 깃든 얼굴. 아주 조금씩만 꼬리를 끌어올려 웃던 한쪽 입꼬리. 새로운 발견에 생기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눈동자에서 그 자신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밭은 기쁨을 보았다.

그래서 결혼식 때 죽음은 화가 났어요. 공긴 습하고 '탁'해의 특별함으로 오늘의 마지막 춤을 전부 말할 수 있다. '탁'의 음절이 용수철처럼 튕기며 탁한 웃음과 버무려졌다. 억눌러졌던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불시에 튕겨 나온 악센트였다. 쇠꼬챙이로 단결에 낚아채일 듯, 삽시간에 박힌 '탁'의 한 음절에 웃음이 튕기듯 묻어났다. 그의 놀이판 위에서 활주하게 될 운명인 엘리자벳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화는 어쩔 수 없는 듯이 그가 포효했다.

마지막 춤의 새 안무에서 그의 몸놀림은 말해도, 말해도 모자라다. 턱선, 고개의 각도, 손끝까지 연기한다. 그의 손가락이 약지에서부터 검지로 차례대로 접히며 공기를 조율할 때면 전율이 인다.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매끄러우면서도 아지랑이 같은 원을 참 우아하게도 그린다. 황홀해!

마지막 순간 브릿지 위에서 ~서를 내지르기 전의 웃음 고르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거의 끼익 끼익 하는 소리처럼 웃었는데,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긁어내는 웃음소리가 말미엔 ~서와 겹쳐지며 끝이 난다. 들을 때마다 느끼지만 그에게는 숨소리와 노랫소리 사이의 경계가 없는 것 같다. 모든 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만 같아.. 아아, 브릿지에서 등장할 때 아주 오랜만에 숨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간 숨연기를 해왔는데도 듣지 못한 것이었다. 나른한 긴장을 한 번에 불어넣는 숨결, 그 특유의 소리를 앞으로도 다각적으로 들을 수 있을 거라 예고해줘서 참 기쁘다 ㅎㅎ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는 약간의 애잔함을 보았다. 슬픔에 잠긴 엘리자벳을 향한, 번질 것만 같은 시선. 애틋함이 가미된 만큼 훨씬 더 공들여 회유하는 듯한 음절 음절이었다.

침대 위에서도 대단히 공을 들였다. 심혈을 기울여 기회를 주는데 돌아오는 거절. 그의 미간이 찡긋 패였다. 마지막 춤에서처럼 포효하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번의 찌푸림 뒤에는 예상한 바였다는 듯 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러고서도 못내 한 발자국, 더 다가서 보는데 예상대로 끝끝내 거부당하자 웃음과 찡그림이 함께 얹어진 얼굴로 그가 멈추어 섰다. 곧게 세운 상체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삼중창에서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위로 젖혔다. 내립뜨면서도 엘리자벳에서 떼지 않는 시선의 처리. 이때 추켜올린 턱선과 얼굴의 각도가 참 아름다웠다. 노래하느라 파르르 떨리는 턱이, 노래가 멎자 떨림이 잦아드는 그 턱이 좋았다.

전염병에서는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쁘고 즐거워 보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엘리자벳을 진찰하며 그가 내뿜는 희열이 무섭고 얄밉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검은 구름처럼 엘리자벳을 휘감으며 닿을 듯 말 듯, 그의 특유의 거리감으로 보는 사람을 애태우는 모습이 그렇게 기뻐 보일 수가 없었다. 거의 처음으로, '좋아하는 여자에게 성병을 감염시키고도 그걸 좋아하는 존재라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말라디라며, 성병이라며 웃음을 뱉어낼 때의 그가 잔혹한 만큼 아름다웠다. 아아, 저 사악하고 음습한 존재여..

한 번 그렇게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몰입되기 시작하자 이후의 장면들에서도 각각의 인물들의 입장에 따라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에 의해 옮은 성병, 어머니의 음모에 의해 사랑하는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병을 옮겨 주어야 했던 남자. 떠나버린 아들. 고독한 여행과 절망 끝에 살아있는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여자. 각각의 인물을, 특히 엘리자벳에 대해 모종의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느꼈던 대단히 이례적인 순간이었다.

그가 온몸의 세포로 웃다시피 했던 것은 그림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내 즐거워 보였는데 그 즐거움의 안쪽 깊은 한구석에서는 벗겨 낼 수 없는 묵직한 무게감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에서의 그는 거대한 추를 무게중심 삼아 심연에 품은 채 그를 둘러싼 모든 청각적, 외형적 요소ㅡ손끝과 입꼬리, 눈, 턱의 각도, 어깨의 흔들림, 걸음걸이 등을 통해 연기를 빚어내는 무한의 존재다. 

심지어 어둠 속에서도 그는 죽음이다. 계획대로 루돌프를 함정에 빠트린 그가 온몸으로 웃으며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출 때, 그의 실루엣이 움직이는 형상을 어렴풋이 보았다. 두 팔을 한껏 벌려가며 웃음을 토해냈다가도 어둠이 내리자 빠르게 손을 내리고, 다음 무대를 위해 퇴장하는 모습이었다. 그전까지는 무대 위에서 죽음으로 실재하는 그를 보고 있었는데, 음영 속에 퇴장하는 그의 그림자를 보니 죽음의 얼굴을 쓴 '그'가 보여 설렜다.

루돌프와의 입맞춤은 마이어링이 짧아진 만큼 담백해졌다. 오늘도 죽기 직전 넋이 나간 루돌프를 위해 정확하게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눠 주었다. 어림없다는 듯 단호한 손놀림.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던 초연과 달리 속전속결로 정확하고 명쾌하게. 그의 냉정함과 무자비함이 두드러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리고 오늘 그에게 총을 맞았다. 빵>.<! 이어지는 그의 찡긋하는 눈과, 눈웃음, 웃음소리도 전부 받았다. 정확하게 핳하핳하

루돌프에게 죽음을 주면서는 냉정하기만 하던 그였는데, 추도곡에서는 오랜만에 분노 이외의 감정을 보았다. 엘리자벳을 향해 뻗는 손등의 미세한 떨림이 유독 눈에 박혔다. 네가 필요 없다며 일갈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분기가 가득하고 우렁차지만 동시에 옅은 울분 같은 것이 묻어났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 자신이 마련한 절망 속의 그녀를 보는 것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복합적인 심정이 그의 찡그려진 미간 속에 드러났다.

베일에선 물기가 묻어 있었다. 초연의 2월 15일을 다시 보는 듯도 했다. 그러나 더 깊은 음울함과 더 격렬한 깨달음의 충격 속에 일렁이고, 울컥하는 그의 얼굴이 나를 놀라게 했다. 검은 옷을 벗어내는 엘리자벳을 향해 한 손을 내미는 그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울컥함이 있었다. 마침내 죽음의 공간 위에서 함께 하게 된 두 사람이 마주 보는데, 감정이 고조된 김소현 엘리자벳이 흐느끼다시피 노래하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삭이는 그를 보았다. 하지만 미처 떨쳐내지 못한 감정에 이끌려 한순간 그의 얼굴이 정면을 반듯이 향했다가 (앗 키스할 타이밍인데 앞을 보나 싶어서 잠깐 놀랐는데) 재빠르게 옆면으로 선회하던 그의 얼굴이, 그때 그 고개가 돌아가는 그 찰나의 동작에조차도 물기가 맺혀있어 나를 감정의 낭떠러지로 몰아세웠다.

마지막의 아리송하면서, 슬프고, 억울하고, 깨달은 듯 괴어오르는 눈빛과 함께 그가 눈을 감았다. 한쪽 입꼬리가 실그러지며 당겨진 채로 앙 다 물린 입술에는 미동도 없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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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9

재연 흑토드의 주전공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라고 생각하는 건 4번째 공연까지 보고 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마지막 춤은 진짜. 매번, 도대체 지금까지 몇 번을 봤지? 초연 서른 번 남짓, 단독 콘서트, 연말 콘서트, 재연, 축하공연까지 도합 쉰 번 정도 본 것 같은데도 볼 때마다 항상 최고다. 밤공의 마지막 춤은 정말, 대단하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어. 그리고 앞으로도 나날이 대단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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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9

아, 음모에서 웃음에 취한 듯한 걸음걸이 맞아. 그걸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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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9

질문들은 던져졌다에서였나.. 브릿지 위에서 아무것도 잡지 않은 채로 몸을 마구 기울여가며 웃는데, 브릿지가 엄청 휘청휘청하며 흔들거렸다. 언뜻 봐도 위험해 보이는데 위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 그의 대범함이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