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의 엘리자벳은 시아준수의 죽음과 김소현 엘리자벳, 박은태 루케니, 그리고 관객만이 본인의 역할을 다한 공연이었다. 낮공은 산만했고 밤공은 유기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아준수만 봤을 때, 밤공은 -특히- 레전드였다.

깐토드.
한 가닥 한 가닥 힘주어 올렸다. 만지면 찔릴 것처럼 솟은 머리칼이 언뜻 까치집을 보는 것도 같았는데 그게 또 어울리고, 멋있어서..

프롤로그에서의 그는 참 많은 것들에 잠겨 있다. 시간, 영혼, 메아리, 그리고 겹겹의 감정. 재연에서는 초연에서 돋보였던 안개 같은 회한보다는 덜 감성적이고, 더 단단하며, 묵직한 것이 그를 휘감고 있다. 흩뿌려지기 쉬운 연기보다는 조금 더 형상을 갖춘, 검은 파도와도 같은 그다.

재연의 그는 더욱 굳세고 냉혹한 죽음이다. 유희를 즐긴다, 즐거워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순간에서조차 죽음 본연의 냉철함이 중심을 양보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추를 최소한의, 그러나 명확한 중심으로 삼아 악랄함을 마음껏 발산한다. 인간은 철저한 계산의 대상으로서만 다루어질 뿐이라는 걸 그 자신도 명심한 채 모든 놀이에 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엘리자벳이라는 예외가 갖는 힘은 더욱 크다. 죽음, 엘리자벳이라는 단어에만 반응하며 돌아보는 얼굴에서 그 유일함이 가진 힘을 느낀다. 엘리자벳의 초상화로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과 손이 그녀의 이름에 이끌려 돌려질 때 빛나기 시작하는 환희, 갈망, 고통, 애끓음. 프롤로그에서 그가 발하는 여러 감정 중 어느 것이 도드라져 표현되는지는 매일이 다르다. 낮공에서는 고통이, 밤공에서는 환희가 두드러졌다. 그녀의 기억을 되새기는 일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쁘기 그지없다는 듯, 두 눈이 잔뜩 반짝였다.

밤공의 그는 대체로 아주 강했다. 팔과 몸을 쓴 동작이 크고 강렬했다. '냉혹한 나를 잃은 채'에서 거의 분노, 혹은 한탄이 느껴질 정도의 강이 공기를 강타했다. 루케니가 '죽음'을 외칠 때, 얼핏 돌아보고는 다시 초상화에 집중하는 뒤통수는 번다한 메아리들을 성가셔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몰두하는 중인데 귀찮게 군다는 듯이. 그러다 모든 소리가 '엘리자벳'으로 수렴하기에 이르면, 뒤를 돌아본다. 맹수과 동물의 움직임처럼 날렵하고 본능적인 돌아섬에 곁들여진 기색이 반가움을 표현한다. 기다린 듯, 홀린 듯, 이 소리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다는 듯! 밤공에선 이 모든 동작이 기척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고 분명했다.

엘리자벳의 이름만이 울려 퍼지는 마지막이 되었을 땐 정면과 위쪽 허공을 바라보는 눈에 환희가 만개했다. 그녀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는 듯 웃었다가,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추켜올렸다. 나란히 위를 향해 뻗은 두 팔에서 그의 벅참이 넌지시 느껴졌다.

아, 또 하나, '악마에겐 고통'을 쉼표 없이 이어 부르며 내려가는 음이 참 좋다. 매끄럽고 음산한 공기에 폭 젖어드는 느낌이라. 인간 같지 않은 음의 미끄러짐이 그를 더욱 신비롭게 한다.

촘촘히 맞물려 있던 객석의 분위기도 좋았다. 밀집된 공기로부터 비롯된 차분한 긴장감이 극의 분위기를 탄력적으로 지탱해주었다. 낮밤 둘 다 공기밀도가 빽빽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밤공이, 2막만을 본다면 낮공이 조금 더 밀집된 분위기였다.

론도 역시 특별하게 좋았다.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울림, '감히 나를 망설이게 해'. 여기 이 감히를 표현하는 그의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더할 나위 없이 그에게 꼭 맞는 단어를 꼭 맞게 퍼트려낸다. '감히' 그를 변화케 한 존재에 대한 의혹과 호기심에 그 스스로 덫을 친다. 그녀와, 자기 자신에게로 동시에. 저음으로 새기는 주문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뿌리치기 힘들다. 명심해. 그는 그녀를 향해,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향후를 기약한다.

밤공의 론도는 프롤로그의 연장선과 같이 강렬했는데, 처음 보는 강약 조절이 있었다. 너의 차가운 생명을 얻는 '대신'. 여기 이 '대신'을 부를 때 그가 뻗고 있었던 두 팔의 분명한 떨림과 눈동자의 흔들림. 명확하게 잦아들던 목소리가 무척 생경했다. 그는 흡사 이 대목을 부르면서 또 한 번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너의 차가운 생명을 얻기보다는 따뜻한 사랑을 얻고 싶은 본인도 믿기 힘든 변화를 직접 말하면서 깨우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스스로에 대한 놀라움이 전해졌다.

의아함에 웃고, 신기함에 웃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호기심에도 웃는 그가 차차 어둠 속에 잠긴다. 한두 걸음 뒷걸음치면서도 시선은 그녀를 향한 채다. 밤공에서는 온 얼굴을 일그러트려 가며 기쁘게 웃는 얼굴 위로 어둠이 내렸다.

마지막 춤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누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자잘한 숨소리가 곁들어지며 시작한다. 등장하자마자 내뱉는 숨소리는 그에게로 주의를 환기하며 그때까지 흩뿌려져 있던 모든 것을 흡입한다. 남김없이 끌어당겨 진 공기가 잔뜩 팽팽해지면 그가 또 한 번 숨을 뱉는다. 거절당한 숨소리는 처음 것과 같은 날숨인데도 분명하게 다르다. 정색과 짜증, 부정이 동반된 할큄이다.

이윽고 시작된 마지막 춤. 첫 소절의 목소리는 그녀를 향한 경고와 같이 낮고 또박또박했다. '뻔하지만'에서는 심지어 권태로움마저 느껴졌다. 나를 짜증 나게 하지 마, 꼭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같았고. 완전히 지상을 밟은 후, '날 버리고 미소 짓는 너'라면서는 오늘도 고개를 뒤로 반 바퀴 휘저었는데, 와, 유난히 느린 화면으로 박혀서 죽는 줄 알았다. 녹진하고, 치명적이며, 현혹적이고, 선정적이며, 위태로운!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그가 처음 듣는 가사를, 아니 익숙한데 낯선 가사를 불렀다. 너의 선택이 과연 '무엇일까. 아직도 내 가슴을 뜨겁게 해'. 멈칫한 후 점차 작아지고 빨라지는 목소리를 듣고는 아, 그도 아차 했구나 싶었다. 원래의 가사와 박자를 찾아야 할 텐데 하는 염려가 생기기도 전에 곧장 원래 가사를 찾아 평소대로 돌아온 그를 보고 기묘해졌다. 실수가 잘 없기도 하지만 간혹 생기는 실수가 이토록 보는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이유는 뭘까. 실수와 대처의 매끄러운 이어짐이 만드는 불협화음 같은 조화 때문인가.. 갸웃하는 데 '마지막 춤'을 부르면서는 초연 때의 안무를 추는 게 아닌가! 아 시아준수 ㅋㅋ 

그 후로는 평상시의 그였다. 뒷걸음질할 때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엘리자벳을 약 올리는 동작이 다소 약했던 것을 빼면. 공긴 습하고 '탁'해는 오늘에도 있었다. 직전에 목으로 손을 모으고 웨이브할 때의 미세하게 절도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동작이 오늘 유난히 차졌다. 게다가 탁해~하면서 손끝을 그러모아 엘리자벳을 안았을 땐, 왜 오늘따라 그렇게 천천히, 음미하며 길게 끌어안았던 거죠. 이때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서 무섭고도 섹시했다. 무릎으로 달려들 때도 완전 직진!

밤공에서의 마지막 춤은 완전하고, 또 완벽했다. 그의 마지막 춤은 거듭될수록 좋은데, 그 좋음의 정점을 찍은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두 문장으로만 말하기가 아쉽다. 밤공의 마지막 춤은 정말 대단했다. 온갖 수식어를 끌어와 대도 모자랄 마지막 춤이었다.)

일단 그가 마지막 춤에서 정제한 모든 디테일이 분명하고 조화롭게 살아 있었다. '미소 짓는 너' 이후의 고개 돌리기, 엘리자벳에게로 처음 다가서며 입맞춤을 시도할 때 검지만을 펴서 그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 공긴 습하고 '탁'해, 꽃 피는 것처럼 손을 활짝 폈다가 부드럽게 이완하던 목 조르기, 노래 중간중간 곁들여지는 캬악 하는 숨소리, 뒷걸음질 할 때 빙글빙글 꽂히던 검지.

한 가지 새로웠던 건 '나는 알고 있어, 마지막 순간'. 아주 낮고 느짓하게 발음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옅은 웃음기가 밴 얼굴에서 비아냥과 함께 즐거움이 보였다. 팔자 눈썹을 하며 마지막 순간을 언급하는 그를 보는 별안간 그가 말하는 마지막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예감할 수 있었다. 기이한 순간이었다. 가사 안에 운명과 스토리를 단번에 예감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불어 넣는 그가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 그의 목소리의 울림은 언제나 황홀하다. 여러 겹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귀에 박힌다. 그러니 그 주문이 먹히지 않을 리 없지. 그렇게 새겨가며 노래하는 목소리를 누군들 거부할 수 있을까. 오페라 하우스 특유의 메아리?  덕분에 그의 목소리가 돌림노래로 들리는 것마저도 화음이려니.. 했다.

밤공의 그림자 역시 참 강렬했는데, 문득 그가 생의 마지막처럼 노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면을 향한 얼굴이 온통 노래하고 있었다. 너무 말라서 도드라지는 핏줄이 피아노 줄처럼 진동했다.

침대에서의 분노는 크지 않았다. 정색한 얼굴 속에서 예감했다는 듯 의연함이 묻어났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설 때의 걸음걸이도 공격적이지 않았다. 새로울 것 없는 반응이므로 놀람도 노여움도 없다. 건드려보았다가, 아직 아니라면 말고. 꼭 이런 식이었다. 아아, 입맞춤을 시도하며 엘리자벳의 뺨으로 향했던 왼손이 거절당한 후에는 침대 위로 떨어졌는데, 그 후에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설 때까지도 똑같은 손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온 신경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어 있음이 끝까지 변화 없는 손가락에서 느껴졌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빛 속에서 보는 얼굴은 마지막 순간에 항상 웃는다. 여유로움과 함께 엘리자벳을 향한 그의 비틀린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춤추고 싶어 역시 특별하게 좋았다. 낮공은 유일한 2층이었기 때문에 종종 그의 전신을 포기하고 무대 전체를 보았다.

무대 전체를 보면서 좋았던 건, 역시 엘리자벳과 죽음의 주고받는 시선.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는 눈 줄다리기가 시작을 팽팽하게 당긴다. 그리고 원. 녹빛 조명과 보랏빛 연기. 엘리자벳과 죽음을 감싸는 검은 날개.

입맞춤 시도는 더욱 진득해졌다. 왼손을 먼저 아지랑이처럼 펼쳐내어, 엘리자벳의 얼굴을 감싼다. 그녀와 밀착한 후 오른손이 허리를 끌어안으면,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다가선다. 모든 동작에 습하고 끈끈하되 뿌리치기 힘든 부드러움이 있다.

두 사람이 원을 그리며 대치하기 직전의 몸동작은, 정말 신기했는데. 너무 순간적인 동작이라 확신할 순 없지만.. 두 발을 앞으로 척척 내밀고, 뒤로 살짝 젖혔던 허리에 힘을 주어 튕기자 그 반동으로 상반신이 앞으로 당겨졌다. 다시 곧장 그 힘으로 뒤로 홱 돌아서며 원!!! 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일련의 동작들이 꼭 발작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과격하면서도 유연함이 돋보였다.

조종 신에서는 또 왜 이렇게 즐거워 보였는지. 특히 엘리자벳의 두 번째 팔을 조종할 때 잠깐 정면에 웃음을 던졌는데, 으앙 쥬금.

종일반의 좋은 점은 층과 구역 모두를 달리할 때 특히 두드러진다. 몇 시간 전 본 장면을 새로운 각도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즐거움이 크다. 2층에서 낮공의 무대 전체를 종종 보았다면 밤공에선 1층 C블에서 V자 군무를 보다 더 더 정면에서 보았다. 극에서 그를 보다 가까이 볼 수 있는 구역은 왼쪽이지만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기에는 오른쪽 구역이 더 좋을 때가 있다. V자 군무의 선두에서 엘리자벳을 몰아치던 얼굴과 그 눈의 번뜩임, 의연한 조소가 담긴 입술이 무던히도 좋았다.

전염병에선 두 번, 숨으로 웃었다. 이젠 웃음을 숨기지도 않아, 너무나 즐거워하는 그가 있다.

줄다리기 전에는 허리에서부터 배로 엘리자벳을 뒤에서 감싸 안고는, 그녀의 주먹을 그러쥐었다. 자신의 손안에 꼭 잡아넣으려는 듯, 두 사람이 힘겨루기를 한다. 그때 실랑이며, 출렁이던 몸매. 아 그런데 확실히 바지가 늘어난 게 맞는 것 같다 ㅠ

밤공에선 정체를 드러낸 후, 양팔을 가로 확 벌리며 빠르게 다가섰는데 꼭 양 날개를 펼치고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엘리자벳의 등 뒤에서 그녀를 옭아맬 때 얼굴을 바싹 붙이고 귓가에 속삭이던 농밀한 표정. 뒤에서 감싸 안으면서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 붙이고 속삭였었나? 귀를 거의 잡아먹을 듯이 붙어 소곤거리는데 아, 진짜 주금 ㅠ

전염병에서 좋은 건 즐거워하는 그 이외에도, 그가 정체를 드러냈을 때 놀라는 엘리자벳의, '당신!'. 이 짤막한 외침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는 주전공의 몫을 다했다. 아주 특별하게 좋았다.

웃음으로 마중하지 않았던 낮공의 시작은 다소 엄숙했다. 웃지 않으니 더 악랄하고 냉혹하게 느껴져서.. 나빗짓으로 꼬여낸 후에 루돌프가 약한 소리를 하자, 뒤돌아선 그의 한숨이 인상적이었다. 구제불능 모자란 놈, 꼭 이렇게 한숨을 내쉬곤 비웃었는데 루돌프에게 닥칠 역경이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렇게 웃고는 바로 계단으로 올라 소리를 빵! 무너지는 이 세상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나! 루돌프의 기를 죽이는 동시에 부추기는 노랫소리였다. 약간의 모순을 느꼈던 건 루돌프의 기를 빨아들일 것처럼 몰아치는 와중에 그가 지었던 미소가 너무나도 선해보여서였다. 어떤 악의도 없이 깨끗하게 웃는 얼굴이 순수한 악, 죽음 그 자체의 본연을 드러내보인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정면을 노려보며, 손으로는 무심히 루돌프를 짓누르던 그. 이어 회전하기 시작하는 계단 위에서 최고의 절정이 다가왔다. 재연 들어서 가장 격정적인 절정이었다. 너만이 구할 수 있다며 일갈할 때의 그 희열! 숨을 쉴 수 없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음모로 이어지는 잠깐의 정적 동안 박수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낮밤 모두 그윽한 긴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격한 절정의 직후, 모두가 생각을 잃은 것만 같았다.

아아, 나빗짓을 할 때 대단히 오묘한 기색으로 접혔던 손가락과 손짓이 기억에 남는다. 낮밤 모두. 평소처럼 약지에서부터 검지 순으로 접히지 않고 마구 뒤섞여가며 접혔는데, 보이지 않는 실을 끌어 당기는 것 같았다. 따라나서야 할 것만 같은 여운을 남기는 손끝이 느릿느릿 구부러지며 상대를 거머쥐었다. 

이어지는 음모에서, 사태를 관망하며 지배하던 그는 전쟁과 학살이란 단어에서부터 반응하며 잔뜩 웃기 시작했다. 살며시 자리 잡아가는 미소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입꼬리를 새빨갛게 끌어 올려,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즐겁게도 웃었다. 낮밤 모두 그랬다.

나락으로 떨어진 황태자를 내려다보며 최후를 장식하는 마무리에선, 온몸으로 웃었다. 악동처럼, 소년처럼. 즐거워 죽겠다는 것이 요동치는 전신을 통해 드러났다. 즐거움 가득한 목소리가 유난히 소년 같아 좋았다.

아아, 낮공의 마이얼링에서는 스태프로부터 총을 받았다. 그만을 보고 있었던 터라 전에 없이 오른쪽 장막으로부터 총을 건네받기에 영문을 몰라 의아했는데 그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대처였다. 분명 돌발상황이었을 텐데 그의 표정과 몸짓에는 조금의 당황함이나 흐트러짐도 없었다. 돌발상황은커녕 동선이 바뀐 건가 싶을 정도의 의연함이 극 중의 실수를 전혀 실수처럼 느껴지지 않게 했다.

밤공의 마이얼링에서는 다른 때보다 숨소리가 진하게 들렸다. 내내 냉혹했지만 총을 겨눠주면서 두 눈을 부릅떴을 때가 최고였다. 거의 삼켰다고 할 수도 있을 법한 입맞춤에서조차 그랬다. 퇴장하면서 추도 행렬을 보고 잠깐 보여주는 그의 미소도 밤공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이어지는 추도식에서 그가 보여줄 얼굴들이 벌써부터 떠오르며, 그조차 예감하지 못한 가까운 미래에 마음이 먹먹했다.

아니나 다를까. 추도식은.. 볼 때마다 오묘하다. 어떤 순간에도 결코 중심을 양보하지 않는 죽음 본연의 냉철함이 유일하게 철컹거리며 내려앉는다. 그것이 표정과 손짓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디테일. 이렇게는 네가 필요 없다며 떨쳐내고는, 가!!!! 하고 나서 몸을 똬리를 틀듯 숙이며 구부리는데 그 동작이 참 예술적이었다. 뱀이 몸을 꼬듯 뭉치는 몸에서 그가 떨쳐내려던, 그러나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감정의 잔여감이 느껴졌다. 방어본능에서 비롯된 것도 같은 그 동작이 어둠 속에서도 잔상을 남겼다.

질문들은 던져졌다는 낮밤 모두 그를 제외하고는 듣기가 다소 힘들었다. 특히 낮공에서는 프란츠 요제프와의 주고받기도 줄이 끊어진 현악기처럼 긴장감이 없었다. 팽팽함도, 박자도 모두 실종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생생했던 '훌륭하십니다'는 무척 진귀했다. 완전한 비아냥을 담아 끝음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박자를 맞춰가는 그가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혼란스러움을 밟고 선 그가 끝을 눈앞에 두고 외쳤던 '난 자유를 줄 거야'에선 강렬한 갈망이 전해졌다. 심지어 뿌듯해하는 것처럼도 들려, 그가 안타까웠다. 그녀가 원한 건 자유를 위한 죽음이지, 죽음을 위한 자유가 아닌데..

베일에서 그의 먹먹함은 끊길 듯 이어지는 숨소리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엘리자벳을 기다리는 얼굴에는 울음기가 있었다. 먹먹함보다 강도 높은 슬픔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스스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기를 허락한 듯한 얼굴로 잠겨드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자유를 얻은 그녀의 늘어진 몸을, 위아래로 쓰다듬던 그의 두 눈에서 믿을 수 없어 하는 빛을 보았다. 방금 일어난 일을 망연히 되새기는 것 같은 그의 눈에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밤공에선 그녀를 향해 뻗었던 손이 차마 닿지 못하고 떨구어 졌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있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그 얼굴에 얽혀든 괴로움이 그를 잠식하는 것을 보았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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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28

아. 밤공에서 V자 군무 직후 엘리자벳에 의해 뒤로 물러나며 스텝을 밟을 때. 상대 배우의 강한 몰아침에 시아준수의 걸음걸이가 꽤 다급해보여서, 약간 웃음이 났다. 죽음님을 그렇게 몰아도 되는 건가요.

belle

13.08.28

저는 그림자는 길어지고의 맺는음이 가장 생각 나네요. 음 마무리가 대단히 깔끔하고 세련되다고 느꼈어요. 샤차르트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캐릭터인데 음 맺는 것은 특유의 스타일대로-오히려 그때보다 발전한 모습이 놀랍더군요. 매번 놀라움을 주네요 김준수 배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