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 토드.
앞머리를 왼쪽으로 가지런히 빗어내려 깔끔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뒷머리는 깐토드일 때와 흡사하게 세워서 옆얼굴을 보면 내린 토드인데도 전체적으로 비죽이 솟아 있었다.
오늘의 프롤로그도 무척 강렬했다. 냉혹한 나를, 잃은 채, 특히 이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 부르르. 엘리자벳을 부를 때의 환희도 크다. 부릅뜬 눈과 벌어진 입, 잔뜩 뻗은 손으로 격정을 표현한다.
가장 좋았던 론도와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는 저음과 울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우선 오늘의 론도는, 유난히 길었다. 첫 등장이 무슨 이유에선지 다른 날에 비해 늦어졌던 것도 있었지만 노래 자체가 영원처럼 흘렀다. 좋아서 그랬을까. 막 깨어난 엘리자벳과 시선을 마주한 그가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을 때, 달달 떨리는 손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믿기 힘든 기색이 그의 눈과 얼굴에서뿐만 아니라 차마 완전히 닿지는 못한 손에서도 드러났다. 25일부터 추가된 차가운 생명을 얻는 '대신'과 함께, '얼어붙은 내 맘을 녹여'에서도 세밀한 강약 조절이 있었다. 신중하면서도 자유롭게 음을 다루는 그는 언제나 옳다.
마지막 춤에서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그가 인사를 하면 엘리자벳도 맞인사를 한다는 걸 알았다. 처음 봤어... '미소 짓는 너'라면서 고개 돌리기나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작은 언제나처럼 농밀했다. 엘리자벳을 끌어안으며 캬악을 내뱉기 전, 포효하는 얼굴이 크앙! 사납게 일그러지며 번뜩였다. 브릿지에 올라서 '우리 둘이~서'로 마무리할 때 눈에 띄었던 건 그의 왼손. 중지와 약지를 안쪽으로 구부려 넣고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바깥쪽으로 뻣뻣하게 세웠는데, 브릿지에 오를 때부터 음을 마무리할 때까지 계속 그 모양이었다.
브릿지와 그가 만날 때는 특히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섬세한 연기를 주목하게 된다. 마지막 춤은 물론 베일에서도. 한 발 한 발 아래로 내딛을 때, 브릿지 줄에 얹어진 그의 오른손이 줄을 쓸어내리며 그리는 부드러운 곡선이 좋다. 줄을 매만지는 똑같은 동작도 넘버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 춤에서는 나른함에 섞여든 언짢음이, 베일에서는 먹먹함과 함께 머뭇거림이 전해진다.
아, 브릿지로 오르기 전 마지막 춤의 후렴을 부를 차례에서 오케스트라와의 박자가 맞지 않아 신경 쓰는 그를 보았다. 미세하게 멈칫했던 것도 잠시, 큰 내색 없이 곧장 박자를 맞추어 '마지막 춤'으로 들어가는데.. 으.. 시아준수.. 아직 그의 귀신 같던 '훌륭~하십~니다~'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마지막 춤으로도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다니!
침대 위에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감은 눈이 부드럽게 엘리~자벳을 부르며 떠지는데 와.. 그때 그 주변의 많은 것이 반짝반짝 빛나서 더 현실 같지 않았다. 이어커프와 귀걸이도 반짝, 반지도 반짝, 아이라인 위에 칠한 새도우도 반짝. 게다가 눈동자도 반짝! 엘리자벳을 보던 부릅 뜬 눈이 참 좋았다. 아직 젊다며,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거라며 그를 거부하는 엘리자벳을 향해 '아직 그렇게 믿는다면 너 좋을 대로 해봐'하는 듯하던 웃는 얼굴은 멋있었고.
김소현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은 재연 중 가장 좋았다. 김선영 엘리자벳에게서 처연함과 예민함이 두드러졌다면 김소현 엘리자벳은 어리고, 여리며, 사랑스럽다. 상처받은 아기새가 나도 아직 날 수 있다며 다친 날개를 감싸 안고 부르르 떠는 것만 같았다.
아아, 행복한 종말에서 이지훈 루케니가 오늘, 죽음을 보고는 아주 미세하게 웃었는데 그 발견이 너무 기뻤다. 25일에는 분명히 없었는데, 오늘은 찰나지만 분명히 '죽음'을 발견하고 씩 웃는 것을 보았다. 행복한 종말에서 가장 좋아하는 포인트였던지라 보게 되어 정말 정말 기뻤다. 이지훈 루케니의 밀크에서 제일 좋은 부분은, 사소하지만 그가 사다리에서 뛰어내릴 때다. 몸을 잔뜩 구부려서 충격을 최소화하는 동작이 무척 가볍고 경쾌해 보여서.
나는 나만의 것 reprise 도 남다르게 찡했다. 오케스트라만 아니었다면 몰입된 공기에, 꽤 조화롭고 균형 잡힌 1막이었다. 배우들도, 앙상블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아쉬운 넘버를 꼽으라면 결혼식. 특히 <그녀는 여기 어울리지 않아>가 그렇다. 초연의 도입부에서 앙상블이 한 소절씩 던지며 저마다 한마디를 할 때 드러나는 개성과 쨍함을 무척 좋아했는데, 연출의 변경인가 싶을 정도로 재연에서는 속삭이기만 하는 느낌이라 많이 아쉽다.
그리고 2막에서 가장 좋았던 내가 춤추고 싶을 때. 김소현 엘리자벳과의 합은 나날이 좋아진다.
아아, 오늘 보니 시아준수는 엘젠 시작부터 독수리 동상 뒤에 있었다. 그때 그를 쭉 보았는데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를 기다리며 대기할 때는 다리를 요리조리 움직여가며 대기하는 것과는 달리 독수리 동상 뒤에서는 미동도 없었다. 숨 쉬느라 약간씩만 들썩이는 어깨를 빼면. 그때 조그맣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어깨가 어찌나 귀엽던지ㅎㅎ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도 그렇고 마지막 춤에서도 그렇고 엘리자벳을 조종할 때 그가 손끝을 야무지게 모으는 동작이 참 좋다. 힘이 들어가는 턱으로 삐죽일 때는 멋있고! V자 안무의 선두에 선 그가 엘리자벳을 몰아칠 때, 그 정면의 얼굴은 봐도 봐도 감탄한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섹시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내가 결정'해'! 라면서 일갈하면! 그 일갈이 김소현 엘리자벳의 '해'와 조화를 이루면! 짜릿하기 그지 없다ㅠㅠ
전염병에선 오늘도 역시나 즐거운 그를 만났다.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항상 고개를 한껏 숙이고 있는데 이때 그의 브이라인이 무척 돋보인다. 안 그래도 마른 볼과 턱이 깎아지를 듯 떨어져 어둠과 만난다. 진단을 내리기 위해 엘리자벳으로부터 한 발자국, '이건 바로'라면서 물러날 때 손바닥이 보이도록 두 팔을 펼치는 동작이 참 좋다. 반면 줄다리기의 스킨십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너무 농밀하고 야한 것만 같아... 너무 진해... 음습하고, 얼굴 가까이로 바짝 다가대 속삭이는 얼굴이 몇 번을 봐도 충격적이고 놀랍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의 그는 언제나 그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건 나빗짓으로 꼬여낼 때, 루돌프를 향해 풀어내던 손이 유난히 연기같이 아련아련 느릿느릿했던 것. 그 손을 접는 순서가 엇갈렸던 건 오늘도 그랬다. 직후에 돌아서서 피식 웃고, 그 웃음이 한심함으로 변했다가 계단으로 오르며 절정이 되는 강약 조절은 정말 최고다. 계단 위에서 루돌프를 짓누를 때, 고개를 추켜 올리며 눈은 내립 뜰 때의 그는 정말이지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너무 잘생겨서.. 내린 토드일 때는 안 그래도 예쁨이 빛나는데.. 사실 그가 눈을 내리깔거나 고개를 추켜 올릴 때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보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제대로 '듣지' 못한 부분도 없잖아 있다 ㅠ
음모로 이어지고 나서 '전쟁, 학살'에 반응하여 웃는 것은 몇 번을 봐도 좋다. 계단 위에서 내려오며 폭풍을 불러오기 전, 시동을 거는 걸음걸이와 어깨는 오늘따라 건들건들했다.
추도곡에서 그가 느끼는 감정은 나날이 혼란스러워진다. 엘리자벳이 '이 고통 속에서 날'이라고 말할 때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어 하는 눈빛으로 가득하다. 번쩍 뜨인 두 눈이 뭐? 되묻는다. 왜 그러지? 의아함과 놀람, 당혹, 황망함, 분노, 그리고 고통이 엿보인다.
행복은 멀리에는 초연과 재연을 통틀어 오늘이 가장 좋았다. 김소현 엘리자벳과 민영기 요제프의 감정선이 이루어내는 조화가 가장 돋보이는 넘버다. 그리고 이 넘버가 살아날수록 이어지는 질문들은 이어졌다가 탄력을 받는다. 죽어가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프란츠 요제프에게로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재연 들어 그를 안타깝게 여기게 되는 순간이 자주 온다. 엎어진 채 두 손으로 겨우 바닥을 짚고 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모든 삶이 흙으로 돌아가는 무상함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존재는 오로지 죽음뿐이다.
베일. 작지만 타닥타닥 걸음 소리가 들렸다. 많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제법 덤덤한 얼굴의 그였다. 엘리자벳을 너무나 소중히 안던 손이 그녀의 얼굴로 향하면서 두드러지게, 론도에서처럼 덜덜 떨렸던 것만을 빼면 그는 의연했다. 애써 삼키는 감정은 흐르기보단 응어리가 되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그가 두 눈을 감았을 때, 찹찹한 침묵과 함께 막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