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이 갓 끝났을 때의 흥분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한 흥분이 두 손에 감도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좋음’인지. 아름다움과 타락의 양 갈래 길을 가는 그의 단계단계가 선명하여 자극적일 정도로 좋았다. 그의 아름다움이 남긴 잔상, 그의 나약함이 남긴 애틋함, 그의 파멸로의 전주가 전해준 흥분. 단언컨대 이제껏 이런 1막은 드라큘라가 유일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근사근한 말투. 속삭이는 듯이 향기로운 말씨. 연극이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ㅡ계속 계속 듣고 싶은 말투.
‘배질, 헨리가 떠나지 않도록 해주세요.’의 숨결 같은 음성이 얼마나 상상 그 이상이었는지. 도리안 그레이라면, 할 법하다 여겼던 목소리와 말씨 그 자체여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막에선 1막보다 나긋한 말씨를 오래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약에 취해, 쾌락에 취해, 타락 그 자체가 되어 이성까지 흐르는 숨결처럼 달떠있던 그. 보드라운 음성이 배질에게는 함부로 사랑을 들먹여 상처 주고, 앨런에게는 죽음으로도 씻지 못할 죄악을 주문하는데 정작 그 자신의 음성에는 그 어떤 가책의 티끌도 없이 살랑살랑(몸짓도 더불어 살랑살랑). 타락의 물결을 유영하는 것 같던 그의 목소리를 어쩌면 좋을까.
역시 시아준수의 도리안은 목소리로도 아름다움을 표현하지요?
소리가 아름다웠고, 그가 아름다웠다.
‘도리안 그레이’가 누구인지ㅡ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한껏 고조시킨 상황에서 나폴나폴한 비인간적 자태로 첫 모습을 드러낸 순백의 그가 아름다웠다. 하얀 피아노와 그가 아름다웠고, 곧은 자세가 아름다웠고, 발목을 덮지 않는 길이에서 단정하게 매듭지어진 바지와의 어울림이, 단단한 상체가, 백금발의 머리칼이 얼굴에 드리우는 그림자까지 아름다웠다.
극도로 자제한 미니멀한 세트를 하이얗게 가득 메운 그가 아름다웠다. 천사 같은 순백의 의상과 성스럽게 나폴나폴하던 몸짓이 화려한 겉치장과 본능적일 정도의 격렬한 춤으로 변해버린 1막의 엔딩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모조리 다. 전부 아름다웠다. 변해가는 모습조차 아름다운 건 당신이기 때문이지요? 되묻고 싶게끔.
헨리와의 첫 대면에선 특히나 눈이 아름다웠다. 타락의 주문(타락한~ 순결한~)을 읊는 헨리를 향하여 반짝이는 기이한 이끌림이 그의 눈에 선연했다. 저 눈 저 빛으로 황금별을 좇아 반짝거리곤 하였는데..라는 생각도 잠시. 그의 눈에 감돌기 시작하는 이질적인 광채는 그간 보지 못하였던 빛깔의 것이라 생경하면서도 황홀했다.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도화지에 처음으로 허락되지 않은 붓칠을 시도하는 헨리와, 그것을 흡사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그를 멈추고도 또 멈추지 않고도 싶을 만큼.
감정이 복받치던 ‘아름다움에 멈춰버린’ 나에서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개인적으로는 초반부의 구심이 되어준 동력이기도 한 소리였고. 무엇보다 마지막. 한쪽 뺨을 살며시 감싼 채 고요히 흘려보내었던 ‘나의 얼-굴’의 음성이 아름다웠다.
사랑에 빠진 그는 반짝반짝 그 자체. 사랑에 빠진 눈이 너무도 달콤하고 왕자님이야. 순수하게 즐겁고 순수하게 황홀하여 연신 웃었다. 생글생글 환하게, 눈을 마구 반달되게 접어가며. 이미 아름다운 사람에 한 스푼의 사랑을 얹으면 이렇게 되나요? 사랑이 빚는 아름다움이 이런 걸까. 눈으로 귀로 쏟아지는 아름다움에 아주 혼이 났다. 분홍 베스트에 분홍 바지의 말쑥한 왕자님이 은은한 연보랏빛 조명에 몸을 맡기는 순간엔 감당 못 하게 예뻐서 울먹울먹. 천상의 사람이 천상의 빛을 받는구나 싶을 만큼 그림이었다. 달콤하고 아무런 근심도 없을 것 같은 그 사랑에 조금 더 빠져 있어도 좋았을 텐데, 할 정도로.
잤느냐 물어보는 헨리에게, 황홀함에 범벅되어 반짝이던 눈이 삽시간에 샐쭉해지며 짐승! 하고 질색할 땐 아직 천상 소년이라 애틋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순수의 시대를 알기에.
사랑을 끝내는 그마저도 아름다웠다. ‘시빌 베인이 아픈가 봐요.’ 친구들 앞에서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그는 귀여웠고, 당신이 내 사랑을 끝냈다며 도리어 탓하는 음성은 철벽처럼 순수했다. 매달리는 그녀를 매몰차게 떼어내는 팔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칼날이었다. 질색하며 떠나는 건 처음 보는 모습. 아. 사랑이 산산조각난 도리안의 뒷모습.
시빌 베인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본래의 선한 영혼이 아름다웠다.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어깨와 고통으로 빚은 눈썹. 여전히 형형한 선량함이 그를 일깨우자 양심이 주는 죄책감에 힘겨워하는 얼굴이 가련했다. 사랑이 선사한 이별을 겪은 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내몬 죽음까지 한꺼번에 감내해야만 하는 시련 앞에 두려움으로 질린 얼굴이 잘게 떨었다. 위로와 포용을 바라는데 정작 돌아오는 것은 헨리 워튼의 타락의 주문. 고통은 추악한 것이라며 속살이는 음성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그의 나약함이 또한 아름다웠다.
‘헨리, 전 악한 걸까요?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무구하게 되묻는 음성에 살며시 그려진 미소는 개인적인 정점이었다. 시시각각 홀려 들어 변화하는 영혼을 마치 시각적으로 꺼내어 보여주는 듯한 그의 연기가 감탄스러웠다.
2막은 그 전부가 검은 공포와 죄악의 아름다움이었다.
2막의 오프닝. 자신의 영혼을 다락 한 켠으로 매몰차게 내치는 나약한 결의의 표현이 아름다웠다. 결의를 시각화한 듯한 검은 베스트에 검은 바지.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금색 끈으로 베스트의 뒷면을 묶어 포인트를 준 뒷모습까지 결연했다. 이어 자신의 초상들과 대립하는 춤으로, 한껏 날 세운 음성으로 분노와 절망을 쏟아내는 그를 보노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도리언 그레이의 나약함과 비겁함은 견딜 수가 없었는데, 당신은 견디게 해준다는. 그의 도리안을 이해하고 싶게 해주고 그가 걷는 파멸의 길을 애처로이 여길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그가 가진 힘이라고.
무엇보다 상상을 시각으로 이끌어내는 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상화를 격리해낸 직후 태연하고도 유유자적하게 돌아서는 어깨는 어떤 죄악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나폴나폴 산뜻했다. 살랑거리는 손가락이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밀어내고 짐짓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침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밟기 시작할 때는 그가 창조해낸 이미지가 주는 위선적인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그 위로 함께 흐르는 쇼팽까지. 아, 이 극단적인 흑과 백의 조화.
그뿐인가. 초상을 격리한 이후부터 타락은 가속을 밟아 질주하는데, 베스로브만을 걸친 나신을 실제로 볼 줄은 몰랐다. 초상를 가둔 다락에서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뻐끔뻐끔 담배를 들이키며 내려오는 모습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슬아슬 내비치는 속살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모순적으로 위험했고, 그 모습에 말을 잃은 배질을 조롱하는 음성은 살그락거리는 풀처럼 은밀하게 아름다웠다. 배질이 어떤 사랑을 담아 초상을 그렸는지 알 바 아니라는 사람처럼, 그토록 가볍게 ‘사랑’을 언급하는 그는 무정하여 아름다웠고.
배질과의 합은 상상 이상의 어울림을 주었다. 헨리 워튼에게서 사사받은 타락의 주문을 그가 배질을 향하여 부를 때는 위험한 희열을 느꼈다. 배질의 뒤에 선 채 불온한 음성을 자아내는 그가 무서울 정도로 짜릿했다. 공작의 날개를 펼쳐낸 것처럼 화려하고 위험하게 스며드는 소리가 좋다 못해 심장이 아팠다.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질책하며 떠나려는 배질을 향해 빗발선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그래 아름다워. 외면의 아름다움을 순순히 인정하는 배질을 향해 단검을 들이대며, 다른 한 손으로는 초상화를 가리키며,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라 다그치던 그는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아팠다. 저 초상화가 진짜 자신이라는 걸, 그래서 지금 고통스럽다는 걸 스스로 확인시켜 주었으므로. 자신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단 하나라도 있다고, 그러니 말하라고. 확인받고자 하는 필사적인 옆모습이 아팠다.
왜 그를 감싸주지 않지. 그를 이해해줘.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하다가 아, 첫 공연부터 이렇게 당신이 안타까우면 10월은 어쩌나 싶어졌다.
‘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 불행해지지?’라는 대사는 마치 그에게 주홍글씨 같았다. 기이한 젊음을 유지하는 그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면서도 의심하고, 그의 죄악을 경멸하면서도 유희거리 삼아 이야기하는 이들뿐인 세계에서 그는 고립되었다. 그의 곁을 지키는 건 오로지 스스로 격리한 초상화뿐.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뿐.
증오와 뉘우침. 두려움과 속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저는 파리로 떠난다는 배질을 향하여 노여움을 감추지 않은 건 그래서였겠지. ‘네가 떠나? 어딜 떠나. 넌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돼!’ 할 때의 그 짓이기는 음성. 원망과 애원이 한데 섞인 낯선 소리에서 느껴지던 좌절감.
‘나는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요.’라는 회한 어린 말이 결국 이 모든 불행의 발단이었을까.
무수한 죄악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분명 그가 맞지만, 그를 앞에 두고 ‘실패’라 일컫고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헨리를 위시한 인물들을 보노라니 착잡했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서 널 사랑한 게 아니라던 지욱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아름답게 여겨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순백의 등장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순백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는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이것이 한없는 죄악을 뿌린 아름다움의 대가인가요.
(+) 조금 더 바수니적 한 줄 감상.
1. 내 사랑이 깨진 건 연기를 못한 시빌 베인 탓.
내 영혼이 망가진 건 초상화를 그린 배질 탓.
내가 샬롯을 죽게 한 건 샬롯이 멍청한 탓.
남 탓하는 시아준수가 신선했다.
2. ‘그리스 신화와 같은 인물상.’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때 짜릿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신의 모습이 정말 그대로니까. 아름다움의 현신을 하고 그런 말을 하니까..
3. 시아준수 많이 나와서 좋당. 원캐스트인 점이 염려될 정도로 1,2막 많이 보는 것 같아. 장면마다의 에너지도 상당해 보이는데 이제 시작. 오빠, 화이팅입니다.
(+) 그리고 단 하나의 '싫음.'
이 모든 '좋음'을 전복시킬 정도로 위협적이었던 것. 2막의 또 다른 나. 노래하는 모습을 왜 감추죠? 그것도 그 절정에서.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를 그를 숨기는 선택을 하다니. 공연의 절정은 현재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이없음을 넘어 화가 났고, 애가 탔고, 슬펐다. 시야를 가리는 커튼도 치워주세요. 노래하는 그를 보여주세요. 변화가 없다면 이건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