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넘버는 1막의 Against Nature, 2막의 넌 누구.
 
1. 등장
24번의 곧장 정면이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눈앞의 존재. 시공간 전부가 멈추고 그와 나의 일직선만이 존재하는 듯한 황홀한 감각.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차츰차츰 그 온전한 모습을 허락하는 베일 속 인물. 바로 그, 도리안 그레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만남과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걸음걸음 그가 다가올수록 사로잡히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면서도 달리 손쓸 도리가 없었다. 위험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넘실대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고, 고스란히 맞이했다. 정말 아름답다는 헨리의 대사는 내 마음속 목소리였는지도 몰라.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빛과 대등한 밝기가 허락된 유일한 존재. 아도니스.
 
2. 말투는 계속하여 순해진다. 보드랍고 나긋한 말씨를 머금은 눈동자 역시 착해. 소년미라 이르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뭐라 하면 좋을까. 갓 태동한 생명의 순수? 무엇과도 엮이지 아니한 채 발아한 순결함? 아니면 그 전부?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오늘의 대사는 ‘이게 정말 나에요?’ 숨결 같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 미약한 떨림이 전해지는 손. 불가사의함을 가득 품고 부풀던 동공.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최초의 자각을 보여주는 여기 이 섬세한 전부. 한 편의 지극한 명작.
 
4. 당신은 누구일까.
24번의 시야로 바라보는 계단 위의 그는 또 얼마나 그지없는 한 폭의 그림이었는지. 울먹울먹. 조명팀 절 받으세요. 도리안을 위하여 태어난 세상의 빛아, 그를 찬미하렴.
 
5. 시빌 베인의 죽음,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피아노에서 몸을 일으키며, ‘제가 시빌 베인을 죽였어요.’ 혹독한 괴로움의 음성. 지켜보는 헨리, 도리안의 쓰린 음성을 좇아 정원에서 돌아오는 배질. 여기 세 사람의 동선이 흥미로웠다. 괴로워하는 도리안을 그저 실험체의 반응 보듯 하는 헨리와, 도리안의 일거일동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안쓰러워하는 배질. 명료할 정도의 먹이사슬이 아닌가.
 
리프라이즈의 얼굴은 유독 아이 같았다. 천진함이 반짝반짝. 쓴맛을 잊게 해주는 달콤함이 반가웠나. 그래, 고통을 감각적으로 잊게 해주는 헨리의 감언이설이 달디 달았겠지. 타락의 주문에 함몰되기를 그 스스로 허락하며 안정을 되찾은 얼굴이 위선적으로 아름다웠다. 여전히 형형하여 반짝반짝하나, 나약하고도 간사한 영혼을 품은 눈이었다.
 
6. Against Nature
오늘의 절정, 그리고 24번이 선사한 정점의 하나. 온몸으로 소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소리 그 이상의 군무. 범람하였던 춤의 물결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 건 땅을 짚던 순간. 포복하는 찰나 고개를 똑바로 치켜뜨고 번뜩이는 눈과 곧장 마주쳤다. 굳게 다문 아랫입술, 뾰족 솟은 윗입술, 단단한 미간과 차갑고도 형형하게 빛을 내는 눈동자. 완전무결한 도리안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의 날카로운 빛이 남긴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날카로운 입맞춤의 기억이 이런 걸까. 아. 1초 남짓일까 싶은 찰나에서조차 도리안인 그가 진정 감탄스러웠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나의 영혼’도 너무도 좋았던 부분. 불현듯 슬프게도 했다.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끊임없이 영혼의 구원을 바랐던 그에게 꼭 어울리는 가사여서.
 
7. 넌 누구
초상화 속 전신을 이 세상 모두가 보아야 한다. 액자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그가 어떻게 자유자재로 수놓고, 단지 그 한 칸의 공간만으로 무대 전체를 장악하는지 세상 모두가 보아야 해.
우아한 팔의 동선, 곧게 뻗은 다리의 감각적인 자세. 고혹적인 전신에서 자아내는 더욱 황홀한 소리까지.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일까, 악마의 얼굴을 한 천사일까. 아니면 그 모두일까. 알 수 없다.
 
8. 무엇이 기다릴까
가운을 입고 두 팔을 아지랑이처럼 그려내어 뻗을 때 얼마나 신성하게 유혹적인지 그는 알까. 이렇게 고결한 퇴폐미를 본 적 없다. 천박한 고급스러움. 야살스러우면서도 고귀한 음성. 순결한 관능이 흐르는 하얀 팔목. 고귀한 죄악을 무수히 밟고 선 맨다리. 도무지 눈을 믿을 수가 없어. 끝까지 적응할 수나 있을까.
개인적인 정점은 유혹을 없애는 방법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거예요, ‘배질.’인 것 같다. 배질에게 한 몸처럼 기대어 귓가로 고스란히 속삭여내던 음성이 마지막의 나직하고도 살긋한 쐐기로 변모하는 순간에 맞추어 각도 바꾸며 더욱 바싹 다가서는 고개까지. 전부가 너무나 자극적이야. 끝 모를 시청각적 퇴폐미.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선정적일 수가 있는지.
 
9. 또 다른 나
‘내가 아직 그 나이로 보여요?’ 묻는 배경음이 도리안 니가 나라면..이라니, 눈물 나게 좋은 연출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조금 내려놓고 매글의 마음으로 바라본 또 다른 나는, 비로소 이러한 연출에서 의도한 바를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 화해할 수는 없지만.. 후반부. 앞뒤의 영상과 조명이 무릎 꿇은 도리안에게로 합쳐지는 연출은 절정답게 극적이었다.
 
10. Life of Joy
‘왜 그렇게 그 초상화에 집착하시는 거예요?’ 살짝 찌푸린 미간, 언짢은 입술이었는데도 목소리는 그대로 나긋나긋. 아, 정말이지 도리안의 나긋함은 천상계의 것이다.
추궁하는 배질에게 방패 삼았던 궤변. ‘인간을 매혹하는 건 불확실함이에요’ㅡ의 대사를 어둠 속의 헨리와 바로 마주 보며 하는 그는 쓰리도록 아름다웠다. 동일한 공간에 현재하지 않더라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자가 누구인지 극명하게 드러내어 보이는 연출이라 황홀하기도 하였고.
 
내내 배질에게 추궁당하며 뒷걸음질하던 그가 처음으로 웃음을 비추는 건 헨리와의 이중창ㅡ찬란한 아름다움. 마치 이 타락의 주문을 기다렸다는 듯한 비릿한 미소였다. 흡사 신경안정제를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안타까웠지. 어째서 헨리가 도리안에게 그런 존재였어야 했는지. 다른 누구일 수는 없었는지.
도리안에게 있어 찬란한 아름다움의 위력은 진정제를 넘어선다. 내내 배질에게 뒷걸음질하기만 하던 그가 이중창 후에는 타락 충만하여 배질을 도리어 뒷걸음질하게 내몰 수 있는 기백의 근원이 되어주니까.
 
11. 악의 꽃
다비드, 다비드, 다비드. 왈츠를 어떻게든 박제하고 싶다. 왈츠와 도리안이라니. 왈츠와 시아준수라니. 부드러운 어깨가 얼마나 고전적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지 세상 모두가 보아야 해.
 
참 토요일 밤공에서도, 오늘도 유혹하면서 뒷짐은 지지 않았당. 또 헨리가 도리안이 샬롯을 에스코트하여 나갈 때 뒤에서 의미심장하게 지켜보고 있는 구도는 굉장히 나를 심기불편하게 한다..
 
12. 천사의 추락
죽음이 드리운 전경에 홀로 고아하게 빛 받고 피어난 한 송이 아름다움.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듯한 무정한 얼굴이 빚는 차갑고도 차가운 아름다움. 매 장면이 이렇게 제각각의 한 폭 그림이면 어떻게 하나요.
 
13. 사라진 아름다움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왜 이렇게 다 드러내놓고 묻는가, 의문이었는데. 살인은 결코 완벽한 쾌락이 될 수 없다는 헨리의 대답을 들은 직후의 울음이 모여드는 얼굴을 보고 문득 알 것만 같아졌다.
헨리가 늘 속삭였던 신경안정제. 타락의 주문ㅡ찬란한 아름다움ㅡ을 이번에도 역시,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시빌 베인의 죽음처럼 아름답고 숭고하게만 여길 수 있도록 속삭여주기를 바라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던 걸까. 그러나 그 희망 산산이 부서지고 돌아오는 것은 존재의 부정. 삶의 종말. 아름답지 아니한 도리안 그레이에게는 더 이상의 존재의 의미가 없으므로.
 
14. 도리안 그레이
기억나지 않는 여름, 하얗게 바래버린 초상화. 더는 없는 아름다움. 전부를 절절히 느끼는 회한의 참회. 스스로의 목을 긋는 움직임을 아주 느리고도 천천히 보았다. 누군가 멈추어 놓은 것처럼 느리고 느리게 선사된 죽음이었다.
 
무너져 앉아, 오늘은 채 눈도 곧장 뜨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거의 감긴 눈이 죽음을 가득 머금고 가까스로 소리를 자아냈다. 아름다운 소년이 나를 부른다. 아름답게 되돌아오는 초상화 아래로 죽음으로 무너지는 그와, 또 함께 회색빛으로 잠겨가는 초상화가 함께 사라져갔다.
 
(+) 헨리! 쓰레기.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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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06

2막의 배'질'의 발음이 튀어올랐던 것과 '앨런'을 발음하는 목소리. 살긋한 발음이 너무도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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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06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아시죠?'의 마찬가지로 위협적으로 나긋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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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06

까먹은 게 자꾸 생각나네. 무엇이 기다릴까의 선악을 한꺼번에 입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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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06

넌 누구, 도리안과 초상화가 계단을 오를 무렵 흡사 쫓겨나듯 퇴장하는 남은 무대의 초상들. 마치 도리안의 악력이 그들을 잡아 내쫓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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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06

헨리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은데, 배질의 죽음에 대해 알고 난 이후 다가오는 도리안을 바라보던 눈은 적어둔다. 마치 뒷걸음질 하는 듯한 눈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