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넘버는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깨달음이라는 한 폭의 서사였다. 잔잔하게 짚어가는 도입부에서 몰아치는 절정까지, 자신에 대한 자각. 자기 자신을 비로소 만난 그. 치장하여 화려하기보다 담담한 폭풍 같은 노랫소리가 도리안 본연의 순수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의 눈물은 역시 사라진 아름다움ㅡ도리안 그레이.
 
많이 울었다. 오늘은 그가. 그리고 그를 보던 내가. 돌아 나오던 밤하늘의 달이 희미했다. 구름에 묻혀 뿌옇게 산화한 흔적만 남은 달이 꼭 빛 받으며 연소되어가던 그를 닮아 있기에 마음이 촉촉해졌다. 별안간엔 놀랍기도 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저 사물로부터도 나의 눈물을 끌어오는 걸까 싶어서.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이렇게 녹녹한 목소리는 처음. 그 어떤 죄악도 고통도 벗어던진 듯한 무결한 목소리였다. 저런 티 없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그럴 리 없어, 싶게끔.
‘헨리,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묻는 두 눈에는 떨림이 있었다. 어떤 기대를 품었기 때문일까. 다시 한 번 허락된다면, 구원을 주기를. 말없이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 돌아올 음성을 기다리면서도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결코 살인을 하지 않아.’ 돌아온 외면에 숨조차 멎은 얼굴로는 울음이 고여 들었다. 차츰차츰. 울음이 번져가는 얼굴이 고통을 그려갔다.
 
사라진 아름다움의 도입부는 그래서 회개였다. 받아주는 이 없는 고해성사. 울음으로 더듬더듬 힘겹게 이어부르는 음성이 심장을 고통스럽게 했다.
 
‘남겨진 추함 사라진 아름다움.’ 그의 음성이 떨렸고, 그의 얼굴을 그러쥐는 헨리의 두 손도 떨렸다. 마주 보고 있으나 서로의 그림자만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의 대치 끝엔 모든 것이 종장에 달하여 있었다.
버림. 외면. 남겨짐.
 
도리안 그레이는 철저히 고독했다. 하얗디하얀 그가 아름답다고 여겼던 이전과는 달리 오늘은 지독히도 외로워 보였다.
 
그가 늘 눈물을 참지 못해 뱉어내는 소절의 ‘내 이름마저 잊혀져 가는가’는 시작에 불과했다. 오늘의 눈물호흡은 길고 길었다. 낮공이 절제하고 정제한 울음의 죽음이었다면 밤공은 정반대였다. 털썩 끌어내려지듯 주저앉은 채로 죽음의 소절을 부르는 순간까지도 소리죽여 격정적이었다.
 
미소와 울음이 엷게 교차된 얼굴. 웃음인가 싶으면 눈물이고, 눈물인가 싶으면 옅은 웃음이던 오묘한 표정. 죽음에 몸을 맡긴 마지막 호흡이 서글픈 미소와 하릴없는 눈물을 화음으로 빚어내며 사그라져갔다.
 
 
*
 
1. 배질의 애드립 기억이..
 
2. 당신은 누구일까
어제도 ‘오늘 청혼할 생각이에요,’ 하며 헨리를 향하여 고개를 이케이케 기울여 보였는데 오늘은 더욱더 분명해진 동작으로 헨리의 주의를 끌었다. 집중해주시죠? 내지는 저 선언합니다? 하는 듯한 자세. 귀여워.
 
밤공에는 애드립 변화가 있었다.
헨-리! 그렇게 안 봤는데.. ..더러워!
그래 너 참 깨끗하다!
 
3. 최악의 줄리엣
오늘의 왕자님도 매우 두근두근. 마치 그가 두 눈으로 로미오의 대사를 읊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설렘이 반짝반짝 담겨 예쁜 얼굴. 유난히 기대를 품고 있었던 탓일까. 실망의 제스처도 격정적이었다. 세 번인가 연거푸 앞으로 푹 고개 숙여가며 어쩔 줄 몰라했다.
 
무대 아래로 내려와서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관객들 사이를 헤치며 오늘 공연의 평판을 귀동냥하는 듯이 갈팡질팡하였던 것이 기존의 그였다면 오늘은 황망해져 넋을 잃은 얼굴로 관객의 파도에 이끌려 저 멀리까지 쓸려가고 말았어.
 
아, 그리고 쓰고 싶었던 것. 줄리엣의 연기를 보는 브랜든 여사의 표정이 재미있다. 자꾸 보게 돼. 개인적인 웃음 포인트로 브랜든 여사의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음 터지는 얼굴과, 앨런이 퇴장하며 영혼 없이 재미있었다!의 둘. 이 두 대목이 특히나 도리안을 시무룩하게 하기도 하고.
 
4. 꿈 속에서 만나요
화낼 때 정말이지 너무나 잘생겼어..ㅠㅠ 그리고 밤공의 대사는 왜 그렇게 냉정함이 뚝뚝 흘렀을까? 들어본 중 가장 냉정해서, 냉혹하다 할 정도여서 깜짝.
내가 사랑했던 시빌 베인은, 하며 흐릿하게 웃는 얼굴은 볼 때마다 좋다. 안쓰럽지만 그 찰나의 미소가 예뻐서.
 
5. 시빌 베인의 죽음
‘배질-?’ 도 좋지만 여기에서의 한숨 같은 ‘헨리..’도 좋아. 피아노와 화음처럼 만나는 촉촉한 음성. 찬란한 아름다움을 이어 부른 뒤 떨림이 깃든 ‘헨리..? 나는 냉혹한 사람일까요?’ 에서의 부름도 좋다. 사람의 이름 부를 때 특유의 나긋나긋함이 더욱 증폭되는 것 같아. 마구 간지러워.
 
6. Against Nature
두 손 모아 무릎 꿇는 찰나가 점점 정제되어 간다. 금요일과는 달리 밤공에선 찰나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예 무릎을 꿇은 채로 소절을 마무리했으니까.
그가 이렇게 로미오가 될 때면 어쩔 줄 모르겠어. 좋아서.
 
가장 아름다웠던 각도의 순간은 밤공 도입부, 쾌락에 몸을 맡긴 옆얼굴. 살짝 든 고개에 내리깐 시선, 고집을 담고 다문 입술. 또 파도 타는 순간의 각도. 한눈에 포물선처럼 비스듬하게 정면인 각도가 무척이나 그림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외웠다. 프리뷰부터 꽂혔던 가사. ‘후회 속에 핀 죄-악-의 황홀한 절정.’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하는 가사라 듣는 순간 환희로 부풀었는데, 오늘 특히나 죄-악-의 퍼트려지는 음성이 퇴폐적으로 황홀했다. 아아.
 
7. 무엇이 기다릴까
무슨 일이지. 하루 만에 요염함이 곱절이 되었다. 밤공이 유난히 그랬다. 부러 준 변화였을까? 숨길 수 없는 도색적인 감각이 팽배했다. 야릇함이 숨결이 되어 본능처럼 그에게서 발하여졌다. 살짝 끄는 걸음걸이, 허공을 수놓듯 흐드러지던 손가락, 야시시 말려 내려올 줄을 모르던 입매. 야살스럽게 방향을 바꾸어 틀던 고개까지.
 
문제는 그 전부가 고결하게 아름다웠다는 것. 약에 취한 얼굴이 저격하듯이 색정적인데, 나폴나폴한 목소리도 건반음을 두드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도 순결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정말 도리안 그레이인 것 같았다. 퇴폐와 신성의 공존, 신격과 비천함의 양립. 이 모순이 실제로 가능한 존재, 도리안 그레이. 
 
선악의 변주ㅡ찬란한 아름다움은 노래라기보다는 점차 어떠한 ‘감각’으로 변해간다. 어제보다도 훨씬 낮고 음습하며 직전의 고결한 음성과 대비되는 배덕함에 온 신경이 울렸다. 배질의 심장을 후벼 파고 그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는 레퀴엠과도 같던 퇴폐적인 음성. 그래, 노래라기보다는 타락을 형상화하는 청각적 자극에 가깝다. 할큄음 그 이상의 감각. 어떤 금속성도 이렇게 감각적으로 자극적일 수는 없을 텐데.
 
유혹의 대사는 이제 완전히 은밀한 노선으로 바뀐 걸까. 치명적이기보다는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8. 넌 어디로
여기서 도리안의 눈이 너무 꿈결이라 몹쓸 상황인데도 황홀해진다. 이렇게 빛나는 눈을 본 적이 있어?
그리고 아무리봐도.. 데빌 분장의 배우가 남자인 건.. 알려주지 않았다면 난 끝까지 몰랐을 것 같다. 오늘 알고 봐도 남자인 줄 잘.. 모르겠어.. 그냥 분장 너무나 배덕하고 좋다는 생각뿐.
 
9. 또 다른 나
‘시빌 베인?’ 저 먼 기억을 불러오는 눈동자가 순간 까맣게 아득해졌다. 그녀의 존재를 완전하게 잊고 살았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서 일순간 순수한 의문이 일었을 때는 짜릿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자신으로 인하여 죽은 이조차 지워버린 감각적인 쾌락의 세월. 오로지 감각만을 좇아, 이제는 텅 비어버린 눈동자. 그런데도 여전히 반짝이며 아름답다는 위험한 모순까지.
 
그리고 샬롯 베인이 칼을 고쳐 잡는 찰나의 각도가 참 아름다워. 거듭 위협받으며 치켜 올라간 턱선이 너무나 그림이기에.
 
10. Life of Joy
삶의 두 얼굴ㅡ을 부르며 헨리에게 다가가는 도리안을, 배질이 언제고 이렇게 여기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떼어내 주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잠시.
어엿한 이중창이 된 찬란한 아름다움은 역시나 아름답다. 속박 없는 감각적인 아름다움. 죄악을 벗어던진 타락의 건배. 하지만 돌아서서는 곧장 끝나버린 여름날, 황홀했던 기억을 과거형으로 노래하는 그의 모순이 쓰렸다.
 
타락 충만하여서는 배질을 몰아세우기 전에 오늘도 주먹을 꼬옥 쥐었다. 찰나의 스르륵 감겨드는 손가락조차 그림이었어.
 
11. 악의 꽃
다비드! 1막의 무도회에서는 오늘 유난히 반짝반짝 갓 입문한 새싹같이 싱그러웠는데 2막의 무도회에서는 여유를 넘어서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현격한 대비. 무도회의 도리안은 옳다.
 
12. 너를 보낸다 reprise
충동이었고 격정이었다. 외면당한 영혼의 초상을 대신한 분노였다. 오늘의 살인은 그렇게 우발적이었다. 배질을 찌른 직후에도 얼굴 가득히 일그러진 분노는 가실 줄을 몰랐다. 그 격정의 빛이 눈물의 회한으로 사그라진 건 배질의 마지막 대사를 듣고 나서야 였다.
그제야,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인지한 얼굴에서 한순간에 분노가 가시며 공포와 좌절이 밀려들었다. 쓰러진 육신 위로 무너지며 눈물은 빨랐고 더듬어 짜낸 외침은 더뎠다. 차마, 차마 부르기조차 죄스러운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