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안 그레이>에서 눈을 맞추었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눈맞춤이었다. 그가 내 시선 안에 못을 박고 자꾸만 들어왔다. 터덜터덜 더듬어 걷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오는 눈이 점차 눈물을 머금는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깊은 상실을 품고 울음하는 눈에 공허함이 자욱했다. 그림 속 저 사람ㅡ을 돌아보는 뒷얼굴에서도 마주하였던 그 눈이 일렁거리는가 하였는데, 아, 더 질긴 눈맞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명을 긋고 우르르 무너져 내린 육신이 되어, 고개도 채 들지 못하고 하염없이 아래로 박힌 눈이 차츰 나의 시선 안으로 되돌아왔을 때 내가 보는 것을 의심했다. 생각해 보라. 마주한 눈이 울고 있는데, 공허함 가득한 채 울음하는데, 심지어 그 눈이 죽음에 잠겨 꺼져가는 빛이라면.. 황금 빛깔 천국을 그리고, 아름다운 소년의 환각에 사로잡힌 그 눈이 곧장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다면..
눈앞의 그를 위하여 그가 노래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주고 싶었다. 내게는 여전히 아름다운 당신인데. 모두가 떠나지는 않노라고. 영혼의 변화를 느끼는 한 당신에게는 구원이 있으리라고. 그 말을 믿으라고. 그렇게 얼러주어 그가 쏟아낸 생명을 도로 기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하지 못했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허망한 빛을 가까스로 발하던 그 눈이 완전히 잠겨들 때까지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죽음에 짓이겨졌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마치 내가 한 잔의 독배를 마신 기분이 되었다.
 
 
*
 
오늘의 넘버는 Life of Joy. 그리고 그 이후 전부.
오늘의 대사는 보여드릴 ‘수’ 없다구요.

 
1. 등장
오늘의 그림은 별무리를 그려낸 후 곱게 포개었던 두 손. 나비의 양 날개가 맞닿아 접히듯 살랑거렸던 움직임이 향기로웠다.
 
2. 찬란한 아름다움
액자 바깥의 세상으로 첫걸음을 떼기 전 머뭇하는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찰나의 주저함보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다. 음산하게 흐르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만개한 지점에 이르러서는 흡사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가늘게 접어 뜬 눈이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사로잡혔음이 역력한 황홀한 얼굴이 날카롭고도 촉촉한 명멸을 거듭했다.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10일의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가 깨달음의 노래였다면 오늘은 상실의 노래였다. 자각하자마자 잃어버려야 하는 유한한 것에 대한 뼈저린 상실감이 곧 노래가 되어 흘렀다. 서글프게 글썽이는 얼굴이 깨지기 쉽도록 나약해 보였다.
 
4. 당신은 누구일까
꿈틀대는 푸른 핏줄ㅡ의 도입부에서 만발하며 웃는 얼굴은 자신이 빠진 사랑이란 감각에 대하여 헨리의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일까. 아이처럼 헨리 바라기 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면 심장이 먹먹하다. 그렇게 좋아하고 따를 사람이 아닌데. 왜 헨리여야 했을까.
 
5. 최악의 줄리엣
세세한 디테일이 눈에 띄게 계속하여 변하는 부분.
 
줄리엣의 느닷없는 연기에 좀처럼 등을 편안히 붙이지 못하고 초조해하던 왕자님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놀리는 기색의 헨리를 흘긋이고 나서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고개를 팔 속에 홱 묻어버렸고, 화가 난 사람처럼 난간을 한 번 쿵 내려치기도 하더니 급기야는 뒤로 몸을 한껏 젖혀 체념하며 퇴장하는 모습까지. 온몸으로 사랑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빌 베인과 마주한 그에게서 어제 이상의 차가움이 흘렀다. ‘혹시 어디 아픈가요?’ 조금이나마 일말의 염려가 느껴졌던 기존의 억양이 아니었다. 차라리 어디 아팠다고라도 말해, 그렇게라도 말해. 종용하는 얼굴이 냉담했다. 그럴진대 너무나도 당당한 시빌 베인의 대꾸에 그가 말을 잃은 것은 당연해. 그 순간 이미 식어버린 사랑이 또다시 산산이 부수어지는 것이 보였다.
사랑이 사랑을 죽였는데, 어떻게 그다음이 있을까. 무정할 정도로 냉담한 얼굴은 그 언젠가 초반의 공연에서처럼 사나운 기세로 매달리는 옛 연인을 뿌리치며 멀어져갔다.
 
6.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나 착하게 살고 싶어요!’ 에 대번에 정색하며 멀어져가는 헨리를 망연자실하여 쫓던 눈이 황망히 배질을 찾았다. 바라던 다독임을 얻고서도 진정될 기색이 없던 얼굴이 울음범벅이었다. 부드럽게 어깨를 쓸어주는 배질의 도닥임에도 혼망하여 어지럽던 눈을 한 번에 잠재운 건 결국 헨리 워튼. 악마의 속삭임. '찬란한 아름다움.’
번뜩인다 싶을 정도로 동요하며 경탄하던 눈동자가 기억에 남는다. 헨리의 사상에 온몸과 정신으로 호응하던 말간 얼굴이 먹먹했다.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감각을 선망하여 빛을 내는 눈은 또 가득한 은하수라 먹먹함을 더해주었다.
 
7. 넌 누구
순간적으로 초상화에 질색하는 얼굴을 보았다. 굴곡이 큰 표정은 아니었는데도 눈에 확 박혀서 순간 정신이 아찔했어. 또 보고 싶다 그 표정.
 
8. 무엇이 기다릴까
배질에게로 연기를 내뿜기 위해 깊이 들이마시며 홀쭉해지는 볼이 귀엽다. 그런 상황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귀여워.
그리고 어제부터 소파에 앉을 때 인어공주처럼 무릎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모아 앉는데, 이것도 귀여워. 유혹적인 건 물론인데 가지런한 작은 무릎이 귀여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킬 때 쩍벌하며 읏챠- 허벅지 힘으로 상체까지 한 번에 일으키는 동작은 귀엽고 또 멋있다. 찰나에서 탄탄하게 다져진 육신의 날렵함이 엿보여.
게다가 오늘의 퇴장은 또 왜 이렇게 귀여웠지. 뭔가 부끄럼 타는 것처럼 허리 이케이케 숙여서 배질보다 빠르게 종종종 퇴장하는데 귀여워서 어둠 속에서 혼났네.
 
찬란한 아름다움은 격정 대신 정적인 주문이 되었다. 튀는 음 없이 낮게 포복하는 소리로 목표물을 옭아매는 것이 시각적으로 느껴졌다. 대단하지. 청각을 시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감각적인 노래.
 
그리고 연신 입가에 감돌던 미소.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생글과 설핏의 중간 어딘가에 머무르는 미묘하고도 관능적인 미소. 아, 그런 얼굴이면 누구도 결코 거부하지 못하리란 걸 너무도 잘 아는 미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한, 그런 미소...
 
미약했던 입맞춤의 기척도 되돌아왔다. 마주 닿은 입술이 떨어지며 담백하게 쪽-소리를 흘렸다. 담백하지만 거절 없을 이끌림을 담은 소리.
 
9. 또 다른 나
오늘의 팁. 오빠가 퇴장할 때는 눈을 감고 소리를 좇는다. 오빠의 퇴장을 없었던 일로 만든다.
 
10. 너를 보낸다 reprise
배질? ‘제발’ 내 선행을 폄하하지 말아줘요. ‘제발’은 어제보다 더욱 정제된 숨결과 한숨의 중간음이 되었다. ‘제발’만큼이나 ‘배-질?’도 달랐다. 짐짓 나무라는 투로,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고 하시하는 어투. 아, 자기자신의 영향력을 너무나도 깊이 꿰뚫어보고 서슴없이 부리는 억양. 더욱 큰일인 건 그가 과시하려 하는 지배력이 그에게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그 자신의 마성. 그라면 마땅하고 마땅하노라 받아들이게 하는 마력.
 
11. 사라진 아름다움
앨런의 죽음에 한 화가의 실종 사건까지. 시끄러운 입방아가 언짢은 듯 찌푸려지는 미간이 굉장히 비인간적이었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었음에도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방관하는 태도. ‘천사의 추락’에서 헨리 워튼이 노래한 그대로 텅 빈 영혼의 얼굴.
심지어는 기쁨 없이 웃었다. 웃되 웃음기 없는 웃음이 입꼬리에 맺혀 소름 돋는 위선을 그려냈다. 피시시 웃음 배인 얼굴이 특유의 나긋한 어조로 ‘헨리,’를 불러 물었다.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웃으면서 그렇게 묻다니. 말 그대로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탄식하게 되었지. 대체 어디까지 위험해지려 하는 거지. 어디까지 인간성을 배척할 거야.. 동시에 그렇게까지 내몰린 듯한 그가 안타까운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배질의 죽음마저도 그렇게 흘려보내 버린 듯한 그가, 헨리의 외면에는 결국 무너졌을 때 그 안의 헨리 워튼이라는 인간의 존재감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존재이자, 제 사상의 성역과 같은 존재. 모두가 자신을 비난해도 그만큼은 영원히 조력자에 머물러야 할 최후의 보루 같은 대상. 헨리의 외면은 결국 그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고, 그가 살아온 세계의 해체가 되었겠지. 그리고 그 외면을 통해 자신이 외면케 한 모두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겠지.
 
 
*
 
너를 보낸다. 배질의 방. 세트 교체도 늦고 막도 늦게 걷히는 해프닝. 방 인테리어가 바뀐 줄 알고 아쉬워질 뻔.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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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14

보여드릴 '수' 없다구요.

보여드릴 수'가' 없다구요.

날을 달리하며 조금씩 바뀌는 어투가 좋아. 엘의 라이토를 감시할 거예요/감시할 겁니다를 떠올리게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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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14

눈을 맞추게 되면, 그것도 <도리안 그레이> 같은 넘버에서 눈을 맞추게 되면 심장이 무거워진다. 무너지는 환희의 무게를 실감해. 내 눈을 보며 우는 그가 잔인하다 여겨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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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14

또 다른 나의 가장 큰 안타까움이 음원을 듣는 것 같다는 거라면, 시야를 가리는 연출이 잘못한 것인가 너무 음원다운 오빠의 잘못인가. 라이브감이 살아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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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16

13일 눈맞춤의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어 기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