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다듬은 머리, 더 순결한 순백색이 된 눈부신 백금발.
그리고 2월 7일이라 부를 나의 9월 19일. 밤강의 검은 고요에 맡긴 19일의 눈물. 오늘의 시아준수를 향하여 더없는 사랑을.

*
 
1. 찬란한 아름다움
후반의 절정부. '기이한 황홀한 고통'에서 검은 본색을 드러내며 비틀어지는 헨리 워튼의 목소리에 감응하는 얼굴. 온 정신으로 경도되어 마치 탄식하는 것과 같던 경탄을 담은 눈. 한껏 혼탁해진 얼굴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안타까움 그 이상으로 아름다워 넋을 놓고 보게 하는 순간의 그.
 
헨리 워튼이 턱 끝을 쓸어내릴 때, 그의 손끝을 서서히 따라가는 내려뜬 시선은 역시나 아름답다.
 
2. 당신은 누구일까
후반부 솔로 파트의 밀고 당기기가 이렇게 사랑스러웠던 적이 있는가. 어미 끝에 사랑스럽게 추어올리는 고개, 끝 음에 강세를 주어 당기고 끄는 사랑 만발한 음성. 사랑이 피어나는 형상 그 자체인 그. 세상이여, 이 노래를 들어요. 사랑을 그려내는 그를 봐요.
 
3. 최악의 줄리엣
시빌 베인의 발연기가 점점 다채로워진다. 문제는 브랜든 부인 일행이 이제는 아예 작정하고 그를 놀리려 한다는 것. 발코니에서 자꾸만 시빌 베인의 어설픈 손동작을 따라 하며 웃는 일행들 때문에 평소라면 2 정도에 그쳤을 당혹감이 오늘은 10까지 치솟은 듯했다. 아니, 오늘은 아예 화를 냈어. 발코니 난간을 세게 탁! 내려치고도 분노를 다 삭이지 못한 상체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댔다.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는 화가 담긴 숨결이 쌕쌕이며 흘렀다.
 
시빌 베인의 손동작을 흉내 내면서, 차례로 오 로미호 로미호, 재밌었어호, 추해호ㅡ를 던지며 퇴장하는 일행들은 마지막까지도 그의 화를 한껏 부추겼다. 낙심한 왕자님은 갈피를 잃고 인파를 헤매다 상심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성을 냈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해 홱 내려친 팔이 코트 자락을 강타했다. 그 바람에 펄럭이며 흐트러진 코트 자락은 꼭 갈 길을 잃은 그의 사랑처럼 보였지.
 
그러하니 시빌 베인을 대하는 오늘의 그에게서 어느 때보다 모진 냉기가 흐른 건 당연한 일. 당신은 내 사랑을 죽였다며 품 안의 시빌 베인을 밀어낼 때의 얼굴과, '내가 사랑했던 시빌 베인'을 말하며 스르르 옅은 미소가 감도는 얼굴의 온도 차는 안타까우리만치 극명했다.
 
아, 끝나버린 사랑. 끝나버린 그의 여름날의 순수.
 
4.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자살할 만큼은 아니었어요! 여기서 울음과 고통에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아직 양심의 작용 하에 놓인 소박한 성품이 드러나는 순간이라 그럴까. 내 영혼이 이렇게까지 고통을 받고 있노라 있는 대로 토로하는 얼굴이 가여우면서도 애틋하다. 그 곁의 사람들은 왜 이 모습을 지켜주지 못하였나. 그는 왜 그 자신을 지키지 못하였나.
 
오필리어의 죽음이라는 궤변에 경도된 얼굴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생기는 늘 말을 잃게 한다.
 
5. Against Nature
와, 오늘 1막의 넘버. 최고야. 노래는 물론 목소리의 건강함까지 최고양.
 
타락의 춤 이후의 소절들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꿈틀대는 푸른 핏줄'의 호흡은 특히나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 안에 눌러 담긴 차분한 격정을 대체 어느 누가 격정의 안무 이후의 것이라 여길까.
 
새로운 제스처도 있었지. 뼈무대(...이걸 뭐라해야 하나..) 위에서 일순간 손목으로 웨이브를 타며 '이  끝없는 욕망 속 (착) 삶의 환희 (착)'의 안무로 이어갔는데 멋있었어...
 
압권은 엔딩이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외치는 모두의 위로 드리워지는 초상화는, 그들 내면의 추악함을 고스란히 투영해내는 배반을 선사했다. 쏟아지는 환호와 함께 서서히 어둠으로 잠겨 드는 모습까지 허망했다. 그 서글픈 모순이 오래도록 나를 멎게 했다.
 
6. 무엇이 기다릴까
날 사랑했던 당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사랑했던'의 발음이 유독 선량을 가장한 동그란 어조였다. 너무도 순순히 인정하는 배질이 의아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목소리로 물으면 부정할 수가 없잖아요.
이어지는 널 독점하고 싶었노라는 토로에는 오늘은 소리내어 깔깔 웃었다. 목구멍에서 샌 듯한 웃음소리가 그거 봐, 그렇잖아. 하는 것 같았어.
 
곱디고와 성스럽기까지 한 미성은 언제나와 같이 아름다웠다. 숨결처럼 아스라하여 순결한 음성이 '내 영혼의 비밀'에 닿자 파르르 떨며 퇴색하는 변용을 선사하는 순간은 몇 번을 만나도 짜릿하다. 부르르 떨며 소리를 자아내는 입술이 비틀리는가 싶더니, 심지어 작은 손으로는 주먹을 바스라이 쥐기까지 했어.
 
찬란한 아름다움은 색다른 조합이었다. 도입부는 12일, 후반부는 13일이 섞인 듯한 소리였다. 아니, 12일에서 나아가 마치 흐느끼는 듯하던 도입 소절에선 원망 같은 모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만든 이 나를 보라는 듯이. 고통스러움에 좌초된 배질의 얼굴을 보고서야 푸스스 웃음을 흘리는 얼굴은 그래서 더욱 얄궂었다.
 
입맞춤 후 배질을 침실 쪽으로 끌어당기며 두 손을 잡는 얼굴에서는 눈썹이 아름답게 이지러졌다. 살짝 부풀어 포물선을 그린 아름다운 선이 말했다. 너 또한 너 자신의 탐욕을 마주 볼 차례이노라고. 나르시스트적 확신에 찬 아름다운 미소가 그린 사랑스러운 도발이었다.
 
입맞춤의 소리는 들은 중 가장 아름다웠다. 작으나 명료하고, 도발적이나 사랑스러운. 위험하나 거부할 수 없는.
 
그리고 이건 그냥 든 생각인데. 가운을 허리춤에 걸친 채 반바지 차림의 전신을 드러내는 조명 속의 그는, 정말이지 올림포스에서 아폴론과 원반던지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신이시여, 보고 계신가요? 당신의 아도니스를.
 
7. 넌 어디로
오늘 데빌 뭐양. 데빌 오늘 왜 그랬엉. ㅋㅋ 자신의 차례를 지나고도 그의 곁에 머물기에 보았더니, 아예 그 의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객을 도발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를 '에스코트'하여 퇴장했어. ㅋㅋ 아, 이걸 말로 하면 이 느낌이 아닌데.. 루시퍼의 묵인하에 신이 난 데빌 같아서 웃음이 났다..
 
8. 또 다른 나
샬롯 베인에게 쫓기는 와중에 행인과 부딪혔을 때 오늘처럼 성을 낸 적이 없었는데. 입 모양으로 너무도 정확히 이씨, 하는 얼굴에 놀랐네. 이렇게 격한 표정은 그간 어느 뮤지컬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라이브감을 없애는 연출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또 다른 나였다. 특히 도리안 니가 나라면 이후의 후반 소절. 이중으로 드리워진 막 안에서 그가 어떤 연기를 펼치는지 또렷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 절정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어. 한 팔을 홱 휘둘러 방향을 틀며 계단을 돌아보는 찰나의 휘청거림, 난간을 짚고 오르며 분기탱천한 동시에 서글픈 고개. 문을 열기 직전 정면을 쏘아보며 악물었던 웃음까지.
 
9. Life of Joy
이 넘버에서 흐르는 도리안의 노래가 어디까지 도리안의 의식인지 알 수 없다. 어디까지가 헨리 워튼의 그림자이고, 어디까지가 그 자신인가.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후회 없음'을 자꾸만 강조하는 건 그 탓일까. 고통에 잠긴 배질의 얼굴은 그것을 어디까지 꿰뚫어 본 걸까. 그것을 알 정도의 사람이 어째서 이 정도까지 그를 방치하였나.
 
기도하고 사랑하라, 짜릿하게ㅡ발칙한 사랑스러움의 순간이 오면 만감이 교차한다. 더는 헨리 워튼이 이끌어주지 않아도 악의 꽃 그 자체로 피어나는 그 모습이 아름다우리만치 서글퍼서.
타락의 건배가 얼마나 신성하게 아름다운지는 또 다 이를 수 있을까. 타락 충만하여 스르르 주먹 쥐는 오른손의 처창함은 또 다 말할 수 있을까.
 
절정은 점점 더 격렬히 빚어간다. 전신을 바르르 떨어가며, 오늘은 한 다리로 쾅 내리쳐가며 음을 찍어냈다. 더는 없는 여름을 토해내듯이. 자신에게서 떨쳐내듯이.
 
10. 악의 꽃
샬롯 베인을 마침내 포착하고 능선을 그리며 다가서는 코트 자락의 유려한 선. 얼굴을 맞대어 부드러이 속삭거리던 입술. 처음 보는 모습. 이어 손을 내미는 자태는 지극히도 여유롭고 능란한 왕자님인지라 설레기도.
 
그리고 브랜든 부인의 웃음소리에 마이크 볼륨이 돌아왔다. 아, 시원해.
 
11. 천사의 추락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헨리 워튼이 샬롯 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소절에서 확장된 동공이 미세한 떨림을 거듭했다. 무엇에 대한 떨림이었을까. 눈 앞에 펼쳐진 죽음과 그것을 야기한 자신에 대한 현실인식, 동시에 부정? 아리송해.
 
12. 너를 보낸다 reprise
오늘의 장면.
이 장면의 그를 볼 때마다 늘 메데이아를 떠올린다. 이아손의 배신에 사무친 증오가 그와의 사이에서 둔 아이들을 짓이기기 전, 격정에 사로잡힌 그녀의 얼굴과 겹쳐져. 그 잔인한 비극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비장함이 고스란히 밀려와.
 
칼을 쥔 손이 우발적인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오랜 친우의 가슴에 박혔을 때. 두 사람의 숨이 그대로 멎고, 그  숨 위로 쏟아내리던 새하얀 조명. 시간이 멎은 것 같던 침묵. 찰나의 고요를 깬 건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던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말.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해온 무수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그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언어. '구원.'
 
아, 단 하나의 구원을 잃은 그의 상체가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맺은 비극적인 죽음 앞에 웅크려 울음 뱉는 작은 등을 보았다.
 
13. 사라진 아름다움
오늘의 비극.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하였던 사르르 웃는 얼굴.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에서 인간미를 벗어던진 듯이 무결한 음성이 끔찍하리만치 좋다. 티가 없어 도리어 공허하기까지 한 살그러운 목소리. 이것이 가장한 평온이었음을 '심장이 없는 얼굴'의 괴로운 떨림이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대목까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따로 없다.
 
회한의 멜로디는 하염없이 아름다웠다. 대지로 잠겨 드는 것만 같은 두 사람의 음성이 처창하였다.
 
마지막. 초상화를 보라며 헨리 워튼이 돌려세운 몸이 던진 시선은 지쳐 있었다. 울음에 여념 없던 이제와는 달리, 시선 맺을 곳조차 찾지 못한 눈동자가 흐렸다(그리고 엄청 예뻤다, 정말 예뻤다). 지친 얼굴. 가녀린 숨. 무거운 어깨.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선고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진 후, 한참을 일으키지 못하던 상체가 무척이나 작고 여렸다.
 
14. 도리안 그레이
'나' 싱그러웠던ㅡ에서 터져버린 서글픈 호흡.
한때는 '예뻤겠지'ㅡ의 지친 가성.
 
그리고 오늘은 눈맞춤의 번호가 아니었는데 의아하게도. 내 시선을 찾은 그의 눈에 놀람도 잠시, 감사했다. 죽어가는 얼굴에서 빛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마주하고 싶어. 혼자 된 당신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으니.
 
죽음에 이르러서는, 공허-미소-울음의 세 단계였다. 그의 단계를 따라 푸른빛 노란빛 흰빛의 조명이 차례로 드리워졌다. 눈 감기 직전,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던 그를 향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를 속삭여주었다.
아름다운 소년이여, 안녕.
 
 
 
(+) 헨리! 쓰레기!
(+) 앨런을 다락방으로 밀어 넣고 난 이후의 동작으로 살짝 드러난 왼어깨. 엘을 생각나게 하여 기분이 오묘했어. 도리안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어깨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