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름다움>. 배질의 죽음에 관하여 수군대는 입방아가 번잡스러운 듯 찌푸려진 미간. 그것들을 툭툭 털어내듯 입가에 스며드는 미소. 웃음 서린 얼굴로 헨리 워튼에게 질문하는 오늘의 그는(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어쩌면... 헨리 워튼이 다시 찬란한 아름다움을 들려주었다면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결국 모두ㅡ'헨리 워튼'을 포함한 모두의 외면이 빚은 것이 <도리안 그레이>라면. 그에게 구원이 합당할까.. 하는 생각 또한 들게 했다. 그가 일삼아 온 모든 죄악을 씻기 위해서는 자살이 아니라 살아남아, 모든 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래야만 구원이 있을 수 있는 건 아닌가. 자살은 도피에 불과한 건 아닌가. 자살이야말로 모두에게 버림받은 나약한 영혼이 선택한 최악의 수단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 탓에 도리안 그레이와 커튼콜 내내 만감이 교차했다. 구원일 수 있는가. 구원인가. 구원일 수는.. 없겠구나.. 구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구원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환각이나 죽어가는 꿈이라 이르면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그런 해석이라면 그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죽음의 결단 직전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이 나의 시선을 찾은 그의 눈을 보면서도 마음이 번잡했다. 정해진 숙명처럼 스스로의 생명을 긋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쏟아지는 빛에 산화되어가는 것 같던, 여전히 아름다운 육신을. 푸른 조명 아래 덩그러니 주저앉아 더듬더듬 생의 마지막 소리를 읊조리는 작은 몸을.
그 몸을 타고 흐르는 건 울음이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끅끅 토해지는 숨이었다. 울음과 노래가 만나는 지점에서 찾아온 아름다운 소년의 환영은 그의 눈썹을 하염없이 끌어내렸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그 눈앞에 놓인 것이 도저히 천국이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구원을 주고 싶으나, 구원이리라 빌어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눈맞춤을 선사한 그가 야속할 정도로 잔인한 비극이었다.
*
그간 느낀 1층의 음향 중 오늘이 가장 좋았다. 선명하고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소리. 앞으로도 이래 주었으면.
1. 찬란한 아름다움
헨리 워튼이 남기고 간 타락의 주문을 조심조심 따라 불러보는 얼굴이 꼭 길을 잘못 든 어린 사슴 같았다. 여리고 순하여 모든 선악을 곡해 없이 흡수하는 어린 영혼에 스며드는 암흑. 그 검은 기운이 심장을 조였다. 누가 저 영혼을 혼탁한 물가에 내놓았는지. 탁류에 휩쓸리기 직전인, 아직은 순결한 그를 보는 것이 무척 아렸다.
2. 세상이 바뀐 시간
브랜든 부인 오늘 왜 그리 하이텐션이셨지. 헨리의 꿈을 응원한다며 온 무대를 누비기에 깜짝. 빙글빙글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오늘은 진짜로 넘어진 느낌이 들 정도로.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아.. 오랜만에 삼번 망원경과 함께 한 관람이었는데.. 아.. 난 얼빠인가 봐. 얼굴만 보이는데 얼굴만 보이는 게 너무 좋아서 끙끙. 아름다워. 시아준수가 아름다워요. 전신이 다 뭐야. 얼굴이 최고다. 아름다움이 최고야. 상실의 실의에 빠져 그늘진 얼굴이 아름다웠고, 절절히 애원하는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아름다웠고, 배질과 헨리 워튼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옆얼굴이 아름다웠다. 내가 초상화라도 그런 얼굴로 너의 영원을 달라 청하면 주고야 말, 그렇게나 무결한 아름다움이 눈앞 한 가득이었다. 세상 가장 사랑하는 아름다움, 시아준수 안에 다 있잖아요.
도리안 니가 나라면ㅡ의 소절에 드리워지는 주홍빛 조명은 오늘에서야 보았네. 주홍빛이라니..
4. 당신은 누구일까
후반 솔로 파트. 두 팔 벌려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뿐사뿐 걸어오던 모습이 참 예뻤다. 사랑이 사랑을 노래하는데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겠어.
5. 최악의 줄리엣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일행들의 반응에 어쩔 줄 모르는 상체가 의자 등받이에 끝내 등을 붙이지 못했다. 참담함에 난간을 쾅 내려친 손은 그러고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난간을 연신 두드려댔다. 콩콩콩. '시빌 베인이 아픈 것 같아요'는 오늘 가장 다급했다. 그만큼 초조했다는 뜻이겠지. 동시에 시빌 베인의 옹호라기보다는, 시빌 베인을 사랑하는 그 자신을 위한 변명처럼 들리는 듯한 위화감 또한 있었다.
또 어제에 이어 오늘은 두 팔로 코트 자락을 홱 내려치며 성을 냈고, 시빌 베인을 보는 얼굴은.. 잔인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 온 얼굴의 세포가 증오를 자아내고 있었다. 비죽이는 입술과 고집스러운 뺨이 더없이 쌀쌀했다. 와, 근데 너무 잘생겨서 그 눈을 정면으로 맞고 싶었어.
6.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시빌 베인은! 여배우로서의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한 거야. 떨림이 멎은 채로 고요히 숨을 몰아쉬는 옆얼굴. 배질에게 의지해 있던 자세 그대로 멎은 채 살짝 추어올린 고개가 독약을 마시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부정한 이론을 삼킨 홀로 선 모습이 안타까워 그의 귀를 막아주고 싶었어.
좋아요, 극장에서 뵈어요. 대답하는 얼굴은 다시금 길 잃은 사슴을 생각나게 했다. 저 여린 눈망울에 어느 누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7. Against Nature
쏟아지는 소리가 좋고 심장을 치는 박자가 좋다. 몰아치는 안무의 정점에 선 그가 좋다. 분신을 거느린 채 춤을 지휘하는 그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나르시시스트. 그야말로 압도적 절정의 선사.
오늘은 소리도 선명하고 웅장하여 말 그대로 음의 폭포를 맞는 것 같았다. 행복했어. 찬란한 2막이 기다리는데, 이렇게 절정인 1막의 종장이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
8. 넌 누구
요즘 생각하는 거지만 노래가 너무 짧다. 1절뿐인 거 같아.. beautiful world만큼 길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9. 무엇이 기다릴까
순순히 인정하는 배질의 고백엔 오늘도 낄낄, 소리를 실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만든 나ㅡ는 점점 더 감각적으로 배질을 몰아간다. 원죄가 너에게 있으니 결국엔 전부 네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라는 듯이. 내가 고통받는 만큼은 너도 고통받아야 마땅하다는 것 같은 태도가 발칙하면서도 타당했다.
내 영혼의 비밀ㅡ에는 오랜만에 탁한 빛 대신 매끄러이 빛나는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 배질에게 가 박혔다.
그리고 찬란한 아름다움. '기이한 황홀한 고통'에서 음을 접어 부르는 듯한 탁성의 발현. 아아, 타락한 순결을 청각화한 듯한 소리의 쓰임이 경이로웠다. 이건 꼭 잘라서 들어야지.
오늘 자꾸만 시선을 앗아갔던 것은 종종 피어올린 가느다란 검지. 뜻대로 되어간다는 듯이 까딱이는 찰나마다 시선을 빼앗아갔다. 더불어 중간중간 배질을 흘긋이며 그 반응을 탐색하던 눈은 얄궂은 만큼 사랑스러웠다. 입맞춤 후 이끌면서 짙게 흘린 회심의 미소가 그 정점이었지.
입맞춤의 소리는 어제와 같이 아름다웠다. 작으나 명료하고, 선정적이나 서글플 정도로 아름다운.
10. 넌 어디로
올려다보는 각도의 얼굴의 향연. 너무나 사랑해. 안개빛 속에 흐르는 눈동자가 꿈결이다. 이 장면의 올려다보는 얼굴을 움직이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다. 봐도 봐도 부족해. 계속 보고 싶어요.
11. 또 다른 나
행인과 부딪힌 직후 어제와 같이 거세게 '이씨' 하는 입 모양은 없었당. 레어일까. 또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음. 그의 부재 시에 느껴지는 탈력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버를 흡수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무엇보다 재등장 이후의 소리가 너무나도 잘생겨서. ㅎ 또 시아준수도 자신이 무대를 비우는 동안의 탈력감이 빚는 감각을 채워 넣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고.
피드백이 아니라 결국 그의 노래와 연기가 교정장치가 되는 상황이 좋지만은 않지만, 그가 배우로서 발휘하는 끝 없는 역량을 마주하는 건 행복하고. 이래저래 늘 마음이 복잡한 넘버가 아닐 수 없네.
12. Life of Joy
후반 절창부. 프리뷰에서 이 넘버를 처음 들었을 때의 혼돈이 생각났다. 카오스 그 자체였던 합창.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혼몽. 오늘이 그랬다. 딕션이나 음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우러지는 소리가 빚는 감각이 그랬다. 혼돈 속에 피어난 무질서한 격류. 누구의 이론으로도 결론 맺지 못한 교란으로 마무리되는 노래. 아, 결국엔 더한 죄악으로 질주하는 도리안을 위한 서곡.
13. 너를 보낸다 reprise
'헨리가 항상 이야기해 준'의 '헨리'를 발음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나긋하여 아프다. 그 순간에도 헨리 워튼을 믿고 따르는 목소리였으므로. 이름을 담는 발음만으로도 그의 사상에 지대한 공헌을 한 헨리 워튼의 존재감이 느껴져서.
그런데 오늘의 변화. '그리스 신화의 이상적인 인물'을 토하듯 뱉어내며, 입술을 악물었다. 마치 그 이상이 자신의 영혼을 속박해왔다는 것처럼. 그래서 괴로웠다는 듯이.
마침내 영혼의 비밀을 드러낸 얼굴은 계단 위 문 앞에서 피식 웃었다. 고통이 철철 흘러 박힌 웃음이었다. 어때, 아름답지 않아? 강요하는 물음에서 느껴지는 자기염오가 뼈 아팠다.
그러나 타인의 염오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유리심장. 경악하는 배질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분노로, 원망으로, 공포로, 외면으로. 이 나를 만든 사람이 너인데, 어떻게 네가 내 영혼을 외면하는가. 배질을 찌르는 얼굴에 실린 마땅한 분노가 지극히 당당했다.
이 마땅한 분노를 머금은 얼굴이 충격으로 무너지며 울음이 되는 과정은, 몇 번을 봐도 좋다. 섬세한 듯, 거친 듯. 온몸과 온 소리로 이것을 표현해내는 그가 좋아.. 당당하게 분노했던 눈이 충격으로 떨리고, 충격이 곧 울음이 되고, 울음이 절규가 되는 그가..
아, 그리고 오늘 봤당. 욕조에서 일어나 퇴장하는 배질..ㅋㅋ
(+) 헨리! 더러워! (씨..)